제1연평해전 승전 북한 포격사건
제1 연평해전(第一延坪海戰),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 해군 간의 교전 사건이다
1998년 초 김대중 정부였던 시대로 햇별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추진 중이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남한의 동해항을 출발한 관광선이 북한 장전항에 도착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에 관련된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98년 6월, 동해 북방한계선 남쪽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북한의 잠수정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인양된 잠수정 내부에는 다수의 개인화기와 사살된 9명의 승조원이 있었다 승조원의 시신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 조치되었다
1998년 7월, 동해시 부근에서 북한 무장간첩의 시신과 침투용 장비가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항의를 하였고 북한은 남한의 날조라고 주장하면서 잠수정 사고에 대해 남측에 사죄를 요구했다 11월,
간첩선이 인천 강화도 해안에 접근을 시도하다가 귀환했으며 12월에는 여수 앞바다에 침투하던 반잠수정이 격침되었다
연평도 사건 발생 1999년 6월 7일 ~6월 10일, 북한 경비정이 어선 보호를 명목으로 연평도 서남방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는 도발을 하였고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이 출동하여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거 퇴거조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북한 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한민국 고속정에 충돌 작전을 실시하며 호전적인 행동을 보였다
6월 11일, 북한 경비정의 충돌 작전에 고속정과 초계함 10역 척을 동원하여 선체를 충돌시켜 밀어내기로 북한 경비정을 NLL밖으로 밀어내기 작전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고속정이 북한 고속정에 올라타는 일이 벌어져 위험한 상황까지 벌어지뻔했다 충돌로 북한 경비정은 25mm 기관포로 선제사격을 가했고 대한민국 고속정은 즉각 대응 사격을 했다 09시 42분까지 14분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후 대한민국 해군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사격을 중지하고 안전 확보와 확전 방지를 위해 경비함정 남하를 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천 경미한 손상과 장병 9명이 부상을 당해 국군 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4척 손상, 어뢰정 1척 손상과 다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고속정 함교를 노린 저격수가 있었다 안지영 정장이 저격을 당했지만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고 한다
제1 연평해전 교전 동영상 보기:링크
제1 연평해전 이후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의 장성급 회담이 이루어졌다 북한 측은 한국 측이 먼저 도발했으며 함정이 출동한 부근은 북한 영해라고 억지 주장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9년 7월 4일, 제1차 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장병 7명을 1계급씩 특진시켰다. 이에 따라 해군 고속정 편대장 최용규 소령과 하사 4명, 일병 2명이 각각 중령과 중사, 상병으로 진급하게 됐다. 군장병들이 그동안 대간첩작전 공훈 등으로 훈장 받은 사례는 있으나 교전으로 특진한 것은 6·25와 월남전 이후 처음인 사례로 기록됐다 1999년 7월 7일, 안지영 대위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했고 1999년 11월 11일,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도 당섬에 연평해전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높이 9.35m의 전승비에는 `연평해전'이 발생한 배경과 북한 해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한 우리 군의 전력, 승전 내용, 그리고 해전의 교훈 등이 담겨 있다
6.25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간 해상 교전에서 우리 해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제1 연평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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