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괴담/사건사고에 해당하는 글 63

  1. 수원 노래방 06년생 집단폭행2019.09.23
  2. 일본 묻지마 살인 `인사`2019.06.24
  3. 고유정 제주 전 남편 살인사건 정리 신상공개2019.06.08
  4. 일본 아나타한 섬 사건 배틀로얄2019.05.01
  5. 알몸 여성 부산 소화기 난동2019.05.01
  6. 논산훈련소 훈련병 수류탄 자살사건2019.04.26
  7. 2015년 미국 마이애미 좀비사건 배스 솔트 때문일까?2019.04.17
  8. 무서운 도시괴담 지하철2019.04.09
  9.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2019.04.08
  10. 타이타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고아들2019.04.07
  11. 마오쩌등의 저주로 죽은 중국 배우들2019.04.06
  12. 대한민국 협객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2019.04.05
  13. 2002년 제2연평해전2019.03.30
  14. 제1연평해전 승전 북한 포격사건2019.03.29
  15. 인천 실미도 684부대 사건2019.03.27
  16. 2011년 인천 강화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2019.03.26
  17. 장국영 의문사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2019.03.25
  18. 충북 제천 50대 여성 토막살인사건2019.03.20
  19. 일본 AV 여배우 살인사건2019.03.19
  20. 일본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2019.03.15
  21. 일본 오사카 은행 가짜 야간금고 사건2019.03.15
  22. 일본 영구미제사건 3억엔 사건 완벽한 범죄2019.03.14
  23. 일본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2019.03.14
  24. 일본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2019.03.14
  25. 일본 도쿄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2019.03.13
  26. 일본 도쿄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2019.03.12
  27. 일본 오사카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2019.03.11
  28. 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보험금 노린 사기극2019.03.10
  29. 일본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2019.03.09
  30. 일본 미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2019.03.09

수원 노래방 06년생 집단폭행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9. 23. 15:02

경기도 수원의 한 노래방에서 중학교 1학년 여러명이 초등학생 6학년 학생을 집단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22일 SNS과 커뮤니트를 통해서 06년생 집단폭행 영상이 공개되 확산이 되었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사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글이 게재 되었다


폭행 영상은 다수의 가해자 학생들을 폭행하면서 영상을 촬영했던것으로 밝혀 졌다 무슨이유인지를 모르지만 대담하게도 폭행 영상을 SNS을 통해서 공개한것이 의문이다

폭행 영상속에는 앳돼 보이는 여학생 1명이 다수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폭행당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얼마나 심하게 폭행을 당했으면 피가 흥건했다 가해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하며 머리를 때리는등 갖은 폭력을 가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남학생은 아무렇지 않은듯 늘상 있었던 일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폭행 가해자 sns 사진

 

해당 동영상 링크 https://kakaotv.daum.net/v/402296753

 

사건발생 다음날 피해학생 부모의 신고로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일부 가해 학생들은 경찰조사에서 피해 학생이 말을 기분 나쁘게 해서 폭행을 저질렸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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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묻지마 살인 `인사`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6. 24. 11:03

일본 개그맨 요시이 마사오의 살인괴담 이다 같은 개그맨 동기의 집에서 함께 전골요리를 직접 해서 먹기로 했다 그 동기의 집은 상점가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곳이었는데 몹시 낡은 건물이었다 1층에 공동 현관이 있고 현관 옆에는 몹시 더러운 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새벽 동안 전골요리를 해 먹고 놀고 난 후에 잠들기 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진 요시이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가던 중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열린 문 너머로 2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노란 점퍼를 입고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요시이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갑자기 그 남자가 안녕하세요라며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요시이도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남자는 다른 방향을 향해 갔다

 

요시이는 뭐야? 근처에 개그맨 양성소가 있었기에 후배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동기에게 아까 화장실에 가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고 어떤 남자가 나한테 인사를 하더라고 말하자 동기는 후배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리고 잠을 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가 요시이를 흔들어 깨웠다 잠깐 TV좀 봐!

 


그 동기 집 앞의 도로가 TV에 나오고 있었고 그 화면의 상단에 떠 있는 자막에는 백주 대낮에 상점가에 묻지 마 살인마 출현이 적혀있었고 목격자인 아주머니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노란 점퍼를 입은 청년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막 찌르더라구요 그 후에 뉴스 앵커가 화면에 잡히고 취조 결과 범인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찔렀다고 진술했다


출처:네이트 판 몽크호샤 무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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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 제주 전 남편 살인사건 정리 신상공개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6. 8. 16:15

고유정 제주 전 남편 살인사건, 이 사건은 2019년 5월 25일, 피의자 고유정(36살)이 제주도 여행 중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고유정은 2019년 5월 18일, 차를 가지고 배편을 통해 제주도에 도착했다 일주일 후 아들과 전 남편을 함께 만났고 제주시 조천읍 한 펜션에서 전 남편 강모(36세)를 흉기로 찔러 살해를 한뒤 27일 펜션에서 나온 후 다음 날 28일, 배편으로 제주도를 빠져 나갔다

 


2019년 5월27일 ,강 씨의 남동 샘은 전 부인을 만나러 간 형과 연락이 안 된다면 신고를 했고 실종 신고 이틀 전인 5월 25일 오후 4시 20분 전 부인 고유정과 함께 조천읍의 한 펜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강 씨의 휴대폰의 신호가 제주시 이도1동 인근에서 끊긴걸 확인한 경찰은 범죄 연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해당 사건을 형사과로 넘겨졌다

펜션 수색 결과 강씨의 것으로 보이는 다량의 혈흔을 찾아냈다 펜션의 욕실 바닥, 거실, 부엌 등 여러 곳에서 혈흔이 발견되었다 31일 경찰은 청주시에 있는 고유정의 자택을 압수수색을 했고 범행 도구로 추정되는 흉기를 발견했다
또한 조천읍의 펜션 주변 폐쇄회로 CCTV를 확인한 결과 고유정은 27일 낮 12시 혼자서 가방 두 개를 들고 펜션을 나선후 강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후 경찰은 고유정이 전 남편을 살해하고 유기한 것으로 판단해 지난 1일, 경찰은 충북 청주에서 긴급 체포를 했다

고유정은 남편을 죽였다고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진술은 거부했다

시신의 행방? 2019년 5월25일, 전 남편을 살해를 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를 했다 현재까지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유정이 시신 유기 장소로 얘기한곳은 두 곳이고 수사를 통해 추가로 한 곳이 확인되었다 제주도~완도항 여객선 항로,피의자 아버지 소유의 경기도 김포시 주거지 인근 등 세 곳을 중심으로 시신 수색을 했다
고유정은 지난달 28일 오후 8시30분,제주항에서 출항하는 완도행 여객선을 타고 가다 1시간이 지나고 여행가방에서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봉지를 꺼내 바닥에 버리는 모습이 여객선 폐쇄회로 cctv에 포착이 되었으며 배를 타기전 2시간 전 제주시의 한 마트에서 종량제 봉투 30장과 여행 가방, 비닐장갑, 화장품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경찰은 해경에 해상 수색을 요청을 했지만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했다

범행 동기 및 공범 여부? 고유정 혼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뒤 유기까지 했다는 것이 의문이다 공범 여부의 의혹 제기를 했으나 고유정이 단독 범행을 했다고 주장했고 공범 여부와 범행 동기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범행전 고유정은 휴대폰과 컴퓨터에서 살인과 니코틴 치사량 등 살해 계획 관련 검색을 많이 했었다 미리 흉기를 준비한 것으로 보아 계획 살인 가능이 높다고 밝혔다

의붓아들의 미심쩍은 죽음과 살해 의혹? 고유정은 3개월 전 충북 청주에서 4살 의붓아들이 갑자기 숨진 사건으로 이미 경찰 수사를 받아온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3월 2일 오전 청주시 상당구의 한 아파트 고유정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이 되었고 사인은 질식사였다 사건 발생 당시 고유정과 현 남편은 잠에서 깨보니 아들이 숨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유정


신상공개 심의위원회를 열어 고유정의 실명과 얼굴, 나이 등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으로 얼굴 전체를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취재진의 의해 포착되어 얼굴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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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나타한 섬 사건 배틀로얄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5. 1. 13:35

일본 아나타한 섬 사건(アナタハン島事件), 여자 1명과 남자 31명이 아나타한(Anatahan) 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라고도 불린다

 

일본 아나타한 섬 사건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다 1945년 1월, 32톤 다랑이 잡이 어선 헤이스케 마루(兵助丸)가 일본 해군 으로부터 징용이 되고 5월 24일, 물자를 싣고 요코하마항을 출항하여 마 라리아 제도를 향했다
이 날 아침, 이들의 어선은 사이판 부근을 향해 남하하다가 미군 전투기에 발견되어 공격을 받아 헤이스케 마루(兵助丸)와 아케보노 마루(曙丸) 두척이 침몰한다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섬에 도착해 목숨을 건졌다 그 섬은 아나타한 섬(Anataban Island)이었다

 

같은 시기 공격을 받아 에비스 마루(えびす丸)가 침몰되어 카이호우 마루(海鳳丸)의 에비스 마루의 생존자를 태워 아나타한 섬에 도착했다 다음 날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카이 호우 마루는 공습을 받아 파괴되어 해군 10명과 민간인 21명이 아나타한 섬에 체류하게 된다

 

이 섬에는 70명 정도의 원주민이 생활하고 있었고 일본 기업에 의해 야자수 농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기술원 1명과 그의 아내 히가 카즈코(比嘉 和子)가 있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파간 섬으로 여동생을 데리러 간다며 그 길로 소식이 끊겼다

이때부터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영화 배틀로얄(バトル ロワイアル , Battle Royale , 2000)이 이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농원이 있었으나 32명이 먹고 살기엔 여유가 없었다 1개월도 못 버티고 식량은 바닥이 났었다 그래서 이 32명은 각 그룹으로 나누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도마뱀이나 박쥐, 야자 집게 등을 잡아먹었다 살아 남기 위해 먹을 것을 찾으려고 섬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는 일이 주 일과였다 어느 날, 폭풍우로 인해 1명이 파도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들이 섬에 있은지 1년이 지난 1945년 7월 중순에서 1개월 사이 매일 공습을 받았고 원주민들은 미군이 데리고 가거나 탈출하여 일본인 32명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9월, 일본이 항복했다고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하라고 했으나 이들은 패전을 믿지 않았고 계속 섬에 남기로 결정을 한다

 


슬슬 섬에 적응한 이들은 먹을것에 걱정을 안 해도 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코코넛으로 술을 제조해서 술파티를 했었고 바나나, 토란, 사탕수수, 과일을 먹었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먹거나 해초를 먹었다
취사 중 연기가 나면 미군에게 발견이 되어 공습을 받을것음 염려해 아침에 하루 세끼분을 준비했고 미군을 주시했다 가끔 미군이 보트를 타고 섬에 상륙했으나 금방 철수를 했고 미군이 피고 남은 담배꽁초를 주어서 피곤했다 이들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먹을것에 여유가 생기자남자들은 잊고 있었던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나타한 섬에 유일한 여자였던 히가 카즈코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농원 기술자와 카즈코가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더욱 달려들었다 위험을 느낀 카즈코는 도움을 청하는 형태로 농원 기술자와 동거를 시작했으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농원 기술자는 카즈코가 다른 남자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자 카즈코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헤이스케 마루의 선장이 급사를 했고 같은 해 8월, 미군의 배가 섬으로 오자 기술자와 카즈코는 산속으로 피신했는데 미 육군 b-29 폭격기의 잔해를 발견하게 된다 낙하산과 통조림을 회수하게 된다 이후 32명은 비행기 추락 현장으로 가서 낙하산 6개와 휘발유 탱크 7개 등을 회수해 옷을 만들거나 냄비를 만들었고 칼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남성 2명은 망가진 권총 3정과 실탄 70발을 발견해 2 정의 권총을 완성시켜 무기를 완성시킨다 이때부터 아나타한 섬에 배틀 로열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남자들의 카즈코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한 여자를 가지기 위해 치열한 전쟁이었다 

얼마 후, 사이가 나빴던 2인조 남성 두명중에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했으나 목격자가 없어서 사람들은 그렇게 믿게 되었다

 

이후 농원 기술자의 질투심에 질린 카즈코는 C 남자와 눈이 맞아 산속으로 도망갔으나 좁은 섬이라 결국 농원 기술자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권총 2인조의 한 사람이었던 A 남자는 노골적으로 카즈코에게 접근을 한다 너 내 여자가 돼라 거절하면은 농원 기술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자 카즈코는 이 사실은 농원 기술자에게 말하지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놈 곁으로 가라고 말을 듣게 된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농원 기술자,A 남자, D 남자, 카즈코 4명이 같이 살게 된다 홍일점 카즈코는 3명의
남편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7년 가을, 2인조 D남성이 권총 조였던 A 남성을 사살했다 다음 해인 1948년 신변에 위험을 느낀 농원 기술자는 D남자에게 카즈코를 넘겨주었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D남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농원 기술자와 카즈코는 D남자가 낚시하던 중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라고 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둘이서 D남자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었으나 농원 기술자와 카즈코의 사이가 좋아졌다점에서 의심을 했으나 남자가 한 명 더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추궁은 하지 않았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농원 기술자가 급사했다 카즈코를 쟁탈한 E남자는 농원 기술자는 식중독으로 죽은 것 같다고 변명을 했다 매일 같이 음식을 다 같이 먹었는데 농원 기술자만 식중독으로 죽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권총을 가지고 있던 E남자가 농원 기술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그 뒤로 1948년 2월까지 카이호 루 마루 갑판장이 절벽에 떨어져 죽었고 아케보노 마루 갑판장이 식중독으로 죽었다 의문 투성이의 죽음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그 와중에 권총을 가지고 있었던 E남자도 의문의 익사를 했다 파도에 휩쓸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으나 역시나 신빙성이 없었다

남자 23명 여자 1명이 생존하고 있는 가운데 최고 연장자였던 F남자가 어떤 제안을 하게 된다 카즈코에게 정식으로 남편을 선택하게 하고 남은 사람들은 축복해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말자는 약속의 내용이었다 카즈코는 F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에 눈이 맞았던 C남자를 선택하고 결혼하기로 한다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의 아나타한 섬(Anataban Island)에서 카즈코와 F남자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살아남은 동료들은 이 둘의 결혼식을 축복했다
그리고 이들은 권총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며 권총 2정 모두 부순다음에 바닷속에 버리게 되었다

1949년 가을, 미군이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전단)을 뿌렸으나 이들은 일본의 패전을 믿지 않았다 미군의 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110km 덜어진 사이판에서는 불발탄 처리를 하고 있었고 이때의 폭음이 아나타한 섬까지 들려왔고 전쟁 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 해인 1950년 6월, 사이판에서 폭발음이 멈췄고 전쟁이 끝나나 생각을 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미 해군의 배가 섬에 찾아왔다 카즈코는 도망가는 일행들을 따라가지 않았고 혼자서 미 해군 배로 가서 섬을 탈출하였다 이때 카즈코의 나이는 28살이었다 구출선의 일본인들과 카즈코는 편지와 일본 신문 등을 남겨 두고 갔으나 섬에 남은 남자들은 여전히 종전 사실을 믿지 않아 섬에 계속 잔류하였다 카즈코와 결혼하려고 했던 C남자는 외톨이가 되어 병사했다
1951년 1월, 카즈코가 지난해 7월 사이판에서 C남자 앞으로 보낸 편지가 해안에 도착해 있었다 같은 달 아케보노 마루의 선장이 손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죽었다

남자 21명 여자 0명이 생존하고 있는 가운데 6월, 미국은 비행기로 전단(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수일이 지나 생존자 남자들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맥아더 장군과 쇼우, 천황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있는 신문과 같이 편지가 도착했고 이걸 본 남자들은 이제야 전쟁이 끝났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신문과 편지를 싣고 온 배에 군인 출신 한 남자는 승선을 하고 섬을 떠났고 6월 14일 남은 남자들은 다음에 미군이 오면 항복하자고 의논했다

 


남자 20명 여자 0명이 생존하고 있는 가운데 6월 26일 미군은 다시 비행기로 전단을 뿌렸고 아나타한 섬에 남아있는 남자들은 흰색 천을 흔들어 비행기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 전단에는 6월 30일, 영접하러 배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6월 30일, 20명의 남자들은 머리와 수염을 깎고 신변 정리를 마치고 영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150cm 떨어진 바다에 배가 정박해 있었고 보트 한 척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20명의 남자들은 7년간의 여정을 끝내고 그 보트를 타고 아나타한 섬을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국을 했지만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즈꼬의 본래의 신랑은 행방불명이 된 카즈코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재혼해 있었고 어선 승무원의 어부 남자의 처도 재혼했다 이 남자 동료의 처는 이 남자의 동생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귀국하고 1952년 아나타한 섬에서의 기묘한 생활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카즈코를 여왕벌이라고 불렀다 히가 카즈코는 그 뒤 재혼했고, 22년간 조용히 살다가 1972년 50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나타한 섬에서 일어난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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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여성 부산 소화기 난동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5. 1. 10:49

알몸 여성 부산 소화기 난동, 부산에서 30대 여성이 알몸으로 건물을 돌며 소화기를 난사한 뒤 달아난 사건이다

 



27일 새벽 0시 20분경 부산 진구 당감동에 있는 30대 여성 A가 1층 마트로 들어와 계단을 타고 건물로 무단 침입을 했다

 

 

건물에 들어올 당시 난동핀 여성 A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후 A 여성은 5층 옥상에 옷과 신발을 벗어놓고 3층에 있던 화재경보기를 부순 뒤 비상계단에 있던 소화기를 들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소화기를 난사를 했고 1층 마트에도 소화기를 뿌린 후 마트 인근 지하철역 방향으로 달아난 뒤 행방이 묘연하다

 


당시 30대 여성이 건물로 진입하기 전 여성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택시를 타고 남은 여성 A가 건물에 무단칩입을 한뒤 알몸으로 소화기를 뿌렸다

 


경찰은 A를 30대로 추정할 뿐 3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인적사항을 파악하지 못했다 상가 입주민들은 정신질환으로 추정되는 범행이 발생하자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다 CCTV에 찍힌걸로 보아 범인은 곧 잡힐것 것으로 보고 있다

 

늦은 새벽 한 건물에 들어가 5층 옥상에서 옷을 다 벗고 소화기로 난동을 왜 부렸을까? 원한? 정신질환? 아님 술 때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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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훈련소 훈련병 수류탄 자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26. 11:24

논산훈련소 훈련병 수류탄 자살사건, 2004년 3월 15일 낮 12시 15분, 충난 논산시 육군훈련소(구) 수류탄 훈련장에서 김 모(당시 20세) 훈련병이 수류탄 투척훈련 중 수류탄이 폭발 사망한 사건이다 김 훈련병은 자신의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투척호 밖으로 뛰쳐나왔으며 인접호와 연결된 통로에서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사망했다 목격자 진술과 사고 당시 정황으로 김 훈련병은 투척호내 훈련 조교의 피해를 막기 위해 투척호 밖으로 나와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추정했다

 

 

밑에 글은 논산훈련소 훈련병 수류탄 자살사건 시기에 있었던 팔공산촌두부의 일화다

 

저는 04년 2월 군번이다 논산 출신으로 몇 연대인지 까먹었는데 그 당시에 유일한 구 막사를 쓰는 연대였다 23 연대가 29 연대인가 기억이 가물 아무튼 04년 논산에서의 겨울은 참 힘들었다 그 당시에 논산 쪽에 폭설이 내려서 훈련병 최초로 대민 지원을 나가기도 했었고 인삼밭이랑 딸기밭에서 눈을 치워었다 04년 2월 군번은 다 알 거다 ㅋㅋ

 

아무튼 사건은 3주 차인가 4주 차에서 발생했다 그날은 수류탄 투척 실습 날이었다 저희가 오후에 던진 걸로 기억하는데 저희가 수류탄 실습을 끝내고 막 막사로 복귀하였는데 연대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들리는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기수가 실습을 끝내고 다음 기수에서 자살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소문이 커져만 가고 우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내무반에서 쉬고 있었다 들은 내용을 묘사하자면 수류탄 교장에서 다른 연대 한 훈련병이 수류탄을 지급받고 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안전핀 뽑고 투척 준비 상황에서 안전핀을 뽑고 수류탄을 윗옷에 넣고 밖으로 뛰어나가 엎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펑하고 그대로 즉사했다고 한다 제가 확실히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그날 밤 경계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이 경계 근무를 나갈 때는 조교 1명과 훈련병 2명, 총 3명이 경계 근무를 나간다 시간이 자정쯤 되었는지 기억은 잘 나질 않지만 야간에 경계근무를 위해 조교와 같이 연병장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3명이서 연병장을 가로질러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계급은 아마 병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병장:야 같이 가자
기간병:어라 xxx병장님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병장:야 말도 마라 무서워 죽겠다 도저히 혼자 못 가겠다
기간병:왜 그러십니까?
병장:야 오늘 수류탄 교장에서 한 명 자살했잖아
기간병:네 잘 알지 말입니다 근데 뭔 문제 있습니까?
병장:야 ㅅ ㅂ 내가 지금 거기 있다가 오는 길이야
기간병:네 정말입니까? 거기에 왜 있었습니까?
병장:자살한 시체는 부모님이 확인하기 전까지 수습을 못하잖아 그래서 거기에 방치해 둬야 되는데 산속이라 짐승들이 시체 뜯어먹는다고 기간병들이 시체 주변을 몽둥이를 들고 24시간 지키게 해서 그래서 나 거기 지키다가 이제 교대하고 가는 길이야 ㅅ ㅂ 도저히 혼자 못 가겠다
기간병:헐 정말입니까? 시체 보셨습니까?
병장:말도 마라 수류탄이 요대 쪽에서 걸려서 배에서 터졌는데 배부터 턱까지 날아가고 다리랑 머리만 얼굴 일부만 남아있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기간병:....
병장:짐승들이 자꾸 나타나서 그게 더 무섭더라 어휴..
기간병:....

병장과 기간병이 하는 이야기를 저는 그대로 다 듣고 있었다 상상을 하니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병장은 우리랑 같이 한참을 걸어가다가 자기네 막사로 들어갔고 우리는 다시 경계 지역으로 가서 경계근무 후에 막사로 돌아갔다

그 사건 이후부터 수류탄을 던질 때는 상의를 밖으로 빼서 입는다 저희 때는 상의를 바지 속에 넣고 위에 방탄조끼를 입고 던졌는데 그 자살한 훈련병도 상의를 바지 속에 넣고 있어서 배에서 수류탄이 걸렸다고 한다 더 무서운 건 자대에 같이 온 논산 출신 동기가 자살한 훈련병과 같은 내무실을 썼다고 한다 왜 자살했냐고 물어봤다 처음부터 조금 이상했다고 들었다 자살 후 헌병들이 와서 수양록을 뒤져봤는데 수양록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들이 있었다고 한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기분일까? 이런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그 동기 놈은 그 덕에 훈련도 빠지고 잘 쉬었다고 한다 논산에서 온 후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특히 복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꼭 상의는 빼서 그 위에 방탄조끼를 입으며 꿈자리가 안 좋거나 던지기 싫은 사람은 안 던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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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미국 마이애미 좀비사건 배스 솔트 때문일까?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17. 11:25

미국 마이애미 좀비사건, 2015년 5월 미국 마이애미에 한 경찰서에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의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경찰은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는데 그곳에는 좀비가 있었다

 

2012년 5월 26일, 토요일 미국 마이애미와 사우스비치 해변을 연결하는 맥아더 코즈웨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어디선가 나타나 기이한 걸음걸이와 차림새를 한 남자가 갑자기 나이 든 노숙자에게 달려들더니 얼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후 목격자들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지만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경찰은 권총을 발사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총알 3발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았고 결국 총 6발을 맞은 후에야 숨을 거두었다

 

밑에 그림 혐오주의

 

그에게 눈, 코, 입술 등 얼굴의 80%를 물어뜯긴 노숙자 로날드 팝포는 그 즉시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안타깝게도 두 눈을 잃고 말았다

 

루디 유진


가해자는 31세의 루디 유진(Rudy Eugene)으로 특별한 정신 별을 앓은 적도 없었고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세차장에서 일하던 평범한 남자였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좀비라고 불렀다

 

좀비란? 되살아난 시체를 일컫는 말로 사람들을 물어뜯어 공격하고 공격을 받은 사람도 좀비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부두술사

아메리카 서인도 제국의 부두교 주술사가 죽은 시체를 되살려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1932년 영화 화이트 좀비에서 최초로 등장한 좀비는 이후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루디 유진의 행동은 마치 좀비와 같았기 때문이다

 

칼 자쿠닉스/브래든 데 레옹/파멜라 맥카시

그런데 이와 같은 참극은 멈추지 않았다 사건 발생 열흘 후, 미국 루이지애나 주나에 살던 42세의 남성 칼 자쿠 닉스[가해자]가 토드 크레더 [피해자]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물어뜯는 사건이 발생했고 미국 마이애미 주에서는 21세 남성 브랜든 데 레옹[가해자]이 순찰 중인 경찰관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다
또한, 뉴욕에 사는 35세 여성 파멜라 맥카시는 평소 소중히 키우던 자신의 개를 잔인하게 살해를 했고이와 같이 비슷한 사건들이 미 전역에서 연달아 발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고 짐승 같은 기이한 소리를 냈으며 사람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자 이들이 좀비라는 논란이 시작되었다

 

배스 솔트


얼마 후, 경찰은 좀비 논란에 중간 조사를 발표하게 된다 그 원인이 배스 솔트(Bath Salt)라는 마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스 솔트는 2010년 이후 등장한 신종 마약으로 목욕용 소금과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과다 투약할 경우 몸이 타들어가는 느낌 때문에 옷을 벗게 되고 다른 마약보다 강한 환각 증상을 유발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고 강한 공격성을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이 가해자들이 보인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해자들 모두 마약 투약 전력이 있다고 밝혀졌다 이에 전 세계는 마약은 환각을 유발할 뿐 아니라 사람을 물어뜯는 데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루디 유진의 부검 결과 마리화나를 복용하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배스 솔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또한, 브랜든 데 레옹 역시 마리화나와 알코올 성분만 검출되었다

 

그러자 베리 로건을 비롯한 독극물학자들은 일부 합성 약물은 현 기술로 검출이 불가능하다며 이들이 또 다른 신종 마약을 복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됐던 배스 솔트는 2012년 7월 제조 유통 판매가 전면 금지시켰다

 

사람의 얼굴을 물어뜯은 루디 유진은 배스 솔트 때문이었을까?

 

배스 솔트 같은 약이 진화되어 사람을 물어 뜯고 전염이 된다면 워킹데드처럼 좀비와 사는 세상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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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도시괴담 지하철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9. 11:39

도시괴담 지하철, 희수는 회식을 마치고 늦은 시간 귀가를 하려고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텅 빈 플랫폼에 으스스한 기운을 느꼈다

 

때마침 지하철이 오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야근과 회식에 피곤했던 희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겨 잠이 들고 말았다

 

잠시 후 희수는 깨어나 보니 맞은편에 남녀 3명이 꼭 붙어 앉아 있었다 일행인 듯 보였지만 어딘가 수상했다

 

이때 정차역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지하철 안으로 들어와 희수 옆에 앉았다 급기야 희수를 향해 다가와서 계속 치근덕거리기에 다음 정차역에 급히 내렸다

 

그 남자는 곧바로 따라 나와 희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바로 그녀 뒤에 있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 못 봤어요? 저는 의사인데 그 여자는 죽어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맞은편에 있던 남자 두 명은 죽은 여자의 시체를 지하철로 운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무서운 스펀지에서 나온 뉴욕 지하철에서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2010년 4월 3일, 영국 리버풀 공항에서 독일 여성 두 명이 이미 숨진 91세 노인의 시신을 비행기에 태워서 베를린으로 운반하려다 적발된 사건이었다
노인의 시신을 휠체어에 태워 선글라스를 씌워놓도 체크인을 하다가 항공사 직원에게 발각돼 두 여성은 구금되었다가
 보석금을 내고 풀러났으며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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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8. 20:38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RMS 타이타닉(RMS Titanic)은 영국에서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중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1,514명이 사망한 해난 사고 중 가장 큰 인명피해였다

 

타이타닉호 침몰


RMS 타이타닉은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운데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가 운영한 여객선으로 세 척의 배를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승객들은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고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승선 인원은 2,233명이었다
타이타닉호 선내에는 체육과, 수영장 등 호화스러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느슨한 규제 때문에 구명정은 20척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사건 발생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경, 갑판 선원 프레드릭 폴리트는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확인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출항 당시 쌍안경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빙산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폴리트가 빙산을 발견한 후 종을 울리고 선교에 전화를 보고 했다 조타실에 있던 6등 항해서 제임스 무디는 전화를 받고
곧바로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를 했다 빙산을 확인한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은 곧바로 좌현 전 타를 명령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를 전속 후진으로 돌리라는 기관실에 지시를 한 후 보일러실의 방수 격벽이 닫힐 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수는 지시에 따라서 왼쪽으로 키를 돌렸고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했으나 빙산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결국 배를 돌리지 못했다 빙산과 충돌하여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우현에 구멍이 나버렸다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의 지시로 빙산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타이타닉호는 멈춰 섰고 기계가 더 이상 작동이 되지 않아 움직이질 못했다

보일러실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승객들은 배에 충격을 감지함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타이타닉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사고에선 역부족이었다 4월 15일 0시 15분, 조난 신호 CQD (Come Quick Danger)을 발신해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을 했다 20km 거리에 정박 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1명밖에 없었던 터라 피로 누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고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응답해 전속력으로 왔지만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하지만 2시 20분경 이미 타이타닉호는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탈출 상황, 당시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지만 승객들에게 곧 침몰한다고 알리지 않았다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혔고 좌현과 우현에  2등 항해사 찰스 라이 톨러와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보트를 내려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그마한 배 보다 여객선이 더 안전해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몇 분 후 위험하다고 감지한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구명보트에 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2등 항해사 라이 톨러는 선장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울 것을 건의했고 선장을 승인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여자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당시 여자와 아이들을 태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구명보트에 더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태우지 않았던 것이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랄 판에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정원을 오버하고 사람을 태워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증언으로는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배 밑 보일러실에는 화부들과 기관부원들이 물로 인해 보일러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계속 밀려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하갑 판부터 물이 밀려오기 시작해 배는 점점 침수되기 시작했다
배가 서서히 기울어지자 혼란에 빠진 승객들은 구멍 보트에 타기 위해 보트를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물에 뛰어들어 보트까지 헤엄쳐갔다
그 와중에 무선사 잭필스와 헤럴드 브리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냈고 하늘에 로켓을 계속 발사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는 조금만 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선박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뭔가 트집을 잡으려던 미 해안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배가 점점 침수되고 기울어졌지만 수백 명의 3등실 승객들을 여전히 배에 있었다 이 가운데 존 애드 워트 허트와 승무원들이 구석구석 돌아다닌 끝에 3등식 승객들을 찾았고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었다

1시 30분경,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승객들은 필사적으로 구명보트를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고 라이 톨러는 5등 항해서 로우에게 허공에 대고 총을 쏘라고 지시한다 혼란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이에 승객들은 배 후미 쪽으로 몰려가서 구명보트를 타려고 했지만 끝내 타지 못하고 배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2시 5분, 접이식 보트 D가 마지막으로 바다에 내려졌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구조 배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 메이시 백화점 소유주 노부부였다 남편 이사도라 슈트라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구조되기 전까지 구명보트에 타지 않겠다면 승선을 거절했고 그의 아내도 같이 승선 제안을 거절한 후 배에 남아 운명을 같이했다

 

타이타닉호 선장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2시 10분,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 왕 중에 월리스 하트리는 구슬픈 찬송가를 지휘하면서 배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했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2시 15분 ~ 17분 사이, 배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통산사 잭 필립스와 조수 헤럴드 브리드는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내고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후 굴뚝 1이 선교 쪽으로 쓰러지면서 사람들을 덮쳐버렸고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갑판을 타고 미끄러졌다
2시 18분 2번 굴뚝 쪽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폭발하면서 무너져내려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름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정전이 생기고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이어 선수 부분이 잠기고 분리되어 다시 기울면서 침몰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2시 20분, 배가 완전히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비명을 지르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2℃였다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현장에 돌아가 사람들을 구조하자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끌어당겨 물에 빠질 거라는 걱정에 포기를 하고 만다 그나마 현장에서 가까이 있던 보트에서 사람들이 헤엄쳐와 몇 명이 구조됐을 뿐이었다 

2시 40분, 동사하고 익사해 가면서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소리가 점점 없어졌다 잠시 후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이미 30분 안에 사망한 상태였으며 4명만이 살아남아 있는 상태였다

구조인원,사망인원

탑승인원 2224명, 사망자 1514명, 구조된 생존자 710명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을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 지냈다
1등실에 탑승한 어린이 중에서는 당시 2살이던 헬렌 로레인 알리슨 양만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했으며 2등실에 탑승한 어린이는 전원 구조되었다. 반면 2등실에 탑승한 성인 남자 승객은 168명 중 겨우 14명만 구조되어 92%에 달하는 인원인 154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부자들과 사회 각계층의 고위인사들은 1등실에 탑승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구조되었지만 3등실에 탑승한 이민자들은 과반수 이상이 구조되지 못했는데 특이하게 이민자들보다도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많이 구조되었다. 하인들의 경우 고위인사들을 보좌하기 위해 1등실에 탑승한 상태였는데 해당 하인의 주인들이 자신의 하인을 구조하라고 승무원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3등실의 생존율이 가장 낮은 이유는 가장 낮은 구역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이 잠겨 있었고 배에 친숙하지 않은 승객들이 길을 헤맸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승무원들이 이들을 통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타이타닉호 침몰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으로 가는 중이었다.
망원경 보관함 열쇠도 항구에 두고 왔고, 달빛도 없었던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빙산의 대부분은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또한 조타수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동안 우현 전타와 좌현 전타를 헷갈려했다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격벽 구조에 문제가 있어 해수가 하나둘씩 흘러갔다. 게다가 충돌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계속 전진하였다.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호의 유일한 무선사 에반스는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 발신 당시 통신장비를 끄고 자고 있었다.
3등객 승객들이 탈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후에는 대부분 나오긴 했지만 이미 많은 구명보트가 떠난 상태였다. 구명보트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안됐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라는 판에 많은 수의 구명보트가 꽉 채우지 않은 상태로 보내졌다.
타이타닉을 제조할 때 사용한 철의 강도가 문제였는데 이 당시의 기술로는 현재 조선에 사용하는 수준의 철을 제조할 수가 없었다. 즉, 황이 너무 많이 함유되어 강도가 약해진 철을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일부에서 주장하는 저질 철을 썼다는 의견과 달리, 타이타닉에 쓰인 철강은 당대 최상품에 속했다
 

1985년, 미국 심해 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 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훼손도 된 부분이 있었고 뒤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연돌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를 뭉개고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하였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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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침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고아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7. 18:39

타이타닉의 소년들,1912년 프랑스 니스 한 여자가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두 아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시각 뜻밖에도 아이들은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었다

 

타이타닉 사고 - 신문


1912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상 최악의 해상 사고가 발생한다 영국 사우스햄튼에서 출발해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과의 충돌로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2.224명의 승객 중 1,514명이 사망하고 710명만이 생존했다 그중 두 명의 어린 생존자가 있었다 4세,루이스와 2세,롤라로 부모나 보호자 없이 구출된 유일한 어린이들이었다

 

루이스와/롤라 가명의 아이들


워낙 어린 데다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탑승권을 구입할 때 사용된  루이스와 롤라라는 이름도 가명으로 밝혀져 신원 확인 불가였다 이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타이타닉의 고아들이라 불렀고 미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가족을 찾아 나서는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이 아이들의 엄마라며 한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러왔다

 

마르셀 카레토

 

그녀는 30대의 마르셀 카레토 여성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천 km 떨어진 프랑스 니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신문에서 아이들을 보고 연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조 한 달여만에 엄마와 기적적으로 재회한 타이타닉의 고아들이었다

 

 

아버지 마이클


이에 경찰은 어떻게 아이들만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었는지 물어보자 마르셀 카레토는 납치당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납치범은 뜻밖에도 아이들의 친부였다

 


친부가 아이들을 납치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907년 마이클과 마르셀은 영국에서 결혼해 프랑스에 가정을 꾸렸지만 1912년, 가정불화로 마이클과 마르셀은 이혼하게 되고 양육권은 엄마인 마르셀에게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마이클은 두 아이와 떨어져 살게 된다

 

 


그 후 마이클은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아이들을 보러 왔다 그리고 얼마 전, 마이클은 부활절 휴가기간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막상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차마 아이들을 보낼 수 없었던 마이클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고 타이타닉호에 탑승했던 것이다 혹시나 프랑스 경찰의 추적을 대비해 자신과 아이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적었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그런데 출항 4일 후, 그들이 탄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게 되는 일을 발생하고 말았다 마이클은 아이들을 살리고자 곧장 구명정을 찾아가 아이들을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남아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구조 한 달 만에 엄마와 프랑스로 무사히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에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마이클의 첫째 아들은 한 언론사에 인터뷰를 통해 사고 당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털어놓았다 가족 모두 다시 함께 살기를 바랐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둘째 아들 에드먼드는 1956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첫째 아들 마이클은 2001년 93세 나이로 사망했는데 당시 타이타닉의 남자 생존자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었다 역사사 최악의 해상사고로 기록된 타이타닉 침몰 사고, 보호자 없이 구조된 유일한 사례로 남은 타이타닉의 고아들은 지금도 타이타닉과 관련된 안타까운 사연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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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등의 저주로 죽은 중국 배우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6. 10:52

저주받은 배우들,2005년 7월 2일 중국 광둥성, 2006년 10월 2일 대만 난터우, 2008년 10월 16일 중국 헤이룽장성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목숨을 잃은 중국 배우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마오쩌둥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드라마 설립자

2009년, 중국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제작된다 설립자라는 제목의 28부작 드라마였다 195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공산당 정부에서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투입해 석유를 탐사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그린 시대물이었다 배우 허밍즈가 이 드라마에 출연을 결정짓게된다 

허밍즈는 1958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서른다섯살에 데뷔한 후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중국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배우였다 이에 허밍즈의 출연 소식에 그를 걱정했다 그 이유는 마오쩌둥의 저주 때문이었다

 

 

마오쩌둥


초기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은 장 세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1949년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1959년, 국가 주석에서 물러난 뒤에서 사망할 때까지 당 주석 전임하며 막강한 권력 행사한 그는 중국 현대사에 단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뽑히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영화,드라마계에 마오쩌둥의 저주가 내렸다는 기사가 쏟아진다 이는 몇몇 배우들의 죽음 때문이었는데 

 

구웨

1981년에 데뷔한후 총 84편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 구웨이는 2005년 한 영화에 촬영을 끝낸 후 사우나를 찾아다가 급성 김근 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왕리셴

1년 후인 2006년에는 배우 왕리셴이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여행을 가던 중 원인모를 브레이크 고장으로 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마유페이

2008년에는 배우 마유페이가 드라마 촬영을 마친 후 차로 이동하던 중 갑자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들에게는 뜻밖의 공통점이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마오쩌둥을 연기한 전문 연기 자였던 것이다 중국 대륙에만 있는 전문 연기자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는 싱크로율을 중요하게 생각해 실존 인물과 닮은 배우들이 고정적으로 같은 역할을 맡는 배우들을 전문 연기자라 부르며 그 배역 외에 다른 배역은 맡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마오쩌둥 전문 연기자로 활동한 구웨이는 말투나 걸음걸이는 물론 행동이나 표정에 이르기까지 마오쩌둥과 흡사하게 연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우언라이

왕리셴과 마유 페이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4년 동안 마오쩌둥 전문 연기자 세명이 연이어 사망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마오쩌둥의 저주라며 언론에 기사화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마오쩌둥 역할뿐만 아니라 그의 조력자였던 저우언라이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까지도 사망했다

 

쑤리 / 차이원칭

2005년 12월, 저주 언라인 전문 연기자 쑤리 배우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2007년 4월에는 역시나 배우 차이원칭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저주 이야기는 점점 퍼져나가 마오쩌둥 집권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허밍즈

그러던 2009년,허밍즈가 드라마 설립자에서 마오쩌둥 역할을 맡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역시 죽음을 맞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우연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마오쩌둥 전문 연기자라고 해서 모두 사망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배우 허밍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드라마 설립자 촬영을 마친 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한 것이다 허밍즈의 여동생은 그가 왜 갑자기 사망했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에게 죽은 사람들의 저주는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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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협객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5. 13:48

대한민국 협객 시라소니 이성순, 본명은 이성순 전주 이 씨로 1916년 2월 29일생이다 1983년 1월 25일 서울 성공 구 군자동에서 사망했으며 개신교를 믿었으며 가족은 아버지 이기정, 배우자, 이진옥, 자녀 술하 2남 5녀, 막내아들 이의현, 형 이성덕이다

가운데 시라소니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17세부터 신의주와 만주 사이를 오가며 기차에서 밀수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절 이성순은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다시 열차에 올라타 목숨을 건졌다 이때부터 이성순은 스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소니가 이름을 알린 계기는 이북 싸움꾼 박두성을 이기고 나서부터다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 등 함께 만주와 중국을 누비고 다녔었다 스라소니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고 훈련을 해왔다 특기는 먼 거리에서 뛰어들어 공격하는 공중걸이 박치기, 니킥, 팔꿈치 공격, 단검이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넘어와 이북 출신의 서북청년단 이화룡과 정팔과 함께 활동을 했다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부 청년단은 KLO부대원으로 전쟁에 참전했었고 공수 강화훈련을 교육도 했었다
한국전쟁 이후 명동파의 이화룡과 동대문파의 이정재가 둘로 나눠다 라소니는 1.4 후퇴 당시 부산에서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일로 인연이 닿았다

 

이정재


하지만 1953년, 동대문파 이정재에게 동대문 점포 양도를 요구하다가 동대문 상인연합회에 린치 당하여 중상해를 입었고 이정재의 부하 이석재에서 한 번 더 폭행당했다 그간 라소니는 KLO대원들을 위해서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빌렸었다 이후 점포 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에 5억 원에 달한 거금과 상가의 점포를 달라는 더 큰 요구로 부하 김사범, 조열승, 임화수는 물론 이정재 또한 분노하고 자존심이 상해 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정재와 동대문 사단

이 사건은 시라소니 동대문 린치 사건으로 당시 라소니의 부상이 너무 참혹해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부하들을 시켜 사무실로 유인해 흉기로 라소니를 잔혹하게 린치 해 종로 5가의 반도 병원으로 옮겨 진후 얼마 뒤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며 후환을 없애겠다면 이석재는 혼자 백병원으로 찾아가 쇠막대로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렸다
난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정재는 이석재의 뺨을 때리면 크게 호통쳤다고 한다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들의 방해로 실패를 했으며 폐인 생활을 하게 된다

 

임화수

임화수는 처세에 능한 싸움꾼으로 연예가의 대통령이자 동대문의 이인자였다 어린 시절 서울 미나도 극장에서 소매치기를 하면서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광복 후 김두한과 이정재의 도움으로 미나도 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아 영화계의 대부로 급부상하여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정재가 은퇴후 동대문 사단을 물려받아 1인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을 경호하는 곽영주/오른쪽은 곽영주 사형집행 마지막 모습

곽영주는 30대 나이로 경무관으로 승진해 이승만 부부의 총애를 받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곽영주는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와 유지광과 친하게 지냈다
곽영주는 경찰학교 시험에 3번이나 낙방해으나 이정재의 백으로 경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지광

유지광은 이천 출생으로 단국대를 다녔으며 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후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의 행동대장급으로 일했었다 제1공화국 당시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렸다 행동대장 김동진에게 배신을 당하고 신뢰가 높은 행동대장을 원했던 이정재는 사돈인 유지광을 끌어 들었고 특별히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나 조직 내의 특급 비밀이나 중요한 이권이 걸린 문제 등을 모두 유지광에게 맡겼다고 한다 
조직 내부에서의 서열은 이정재가 위였으나 고모부의 동생이라 항렬이 높은 덕에 이정재가 사돈이라고 존칭을 해줬다
실제 유지광은 싸움보다는 머리가 좋았다 뛰어난 언변 실력으로 상대방을 잘 설득했으며 조직 내의 책략을 다 맡을 정도였다

 

 

이후, 3.1 공수 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해 장면,신익희의 경호를 맡았다 5.15 군사정변 이후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일제히 검거할 때 라소니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러나왔다 그리고 당시 구속 중이었던 이정재는 라소니 린치 사건으로 심문을 받았는데 라소니는 린치 사실을 부인하면 이정재를 감쌌다고 한다

 

 

라소니는 서부 청년단들을 교화시키며 생활을 했고 딸들과 친척의 도움으로 단칸 셋방에서 지냈으며 1983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27일 오전 11시 발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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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제2연평해전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0. 13:53

제2 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 해군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제2연평해전

제1 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 09시 54분 ~ 10시 01분, 북한 등산곶과 육도에서 경비정 2척이 기동하여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였다 대한민국 고속정 2척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접근하자 북한 육도 경비점은 북상했다

 

10시 23분, 북한 등산곶 경비정은 계속 남하하여 북방한계선 5.6km 침범했고 대한민국 고속정 편대가 0.9km 전방에서 차단기동을 실시했다

 

10시 25분, 북한 경비정이 예고 없이 대한민국 고속정 편대의 참수리 357정에 대해 85mm 함포로 선제 기습사격으로 북한과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사격 대응 명령을 내린 윤영하 대위는 초탄 파편과 총탄 여러 발들을 흉부, 두부, 옆구링등 주요 부위에 맞고 가슴과 등에 관통 당해 전사하였다 이후 의식이 없는 정장을 대신해 이희완 부장이 지휘권을 받았다 조타장 한상국 중사(진)가 조타실 피격으로 전사했다
승조원들을 중상을 입었다 이어진 사격으로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 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희완 중위는 부상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두지휘를 감행해 비상 전력으로 발칸포를 수동으로 발사했다 대응 사격을 한 지 12분 후 22포 발칸 담당 병기 부사관 황도현 하사가 적의 집중 사격 속에서 포탄을 맞아 방아쇠를 잡고 안은 채 전사하였고 조천형 하사는 21포에서 응전하던 도중 집중 사격을 받던 도중 포탑 내부에 화재가 발생해 전신 화상을 입고 질식한 채 전사, M60 기관총을 맡고 있던 서후원 하사도 교전 중 684에 승조한 저격수에게 왼쪽 흉부와 양 팔 부위를 관통당하고 전사한다

 

갑판에서 소병기 사격을 담당하던 승조원들과 기관실, 통신실에 있던 승조원들이 총포탄과 7호 발사관 등의 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그 와중에 의무병 박동혁 사병이 5군데나 총상과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하던 중 서후원 중사가 684의 저격수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자 권기형 상병은 자신의 왼손이 고사총과 파편에 부서져 왼쪽 손가락을 못 쓰는 상태로 M60 기관총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남은 잔탄을 등산곶 684호에 전탄 발사했다

10시 30분 ~ 10시 56분, 현장에 중원 된 대한민국 고속정 2척과 초계함 2척이 격파사격을 실시해 북한 경비정을 대파 해 북방한계선 이북으로 퇴거시켰다
11시 59분,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사격으로 손상을 입은 대한민국 참수리 357정이 예인 도중 기관실이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제2 연평해전 재현 동영상:링크

 

제2 연평해전 교전 중 전사한 대한민국 장병들,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대한민국 해군의 대응, 참수리 385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358 정의 공격을 무시한 채 357정만은 집중 공격하였다
후방에서 한국 해군 PPC들이 급히 북상했지만 북한이 지상 기지에서 스틱스 대함 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감지되어 접근할 수가 없었고 인근의 공군 비행장에서 F-5, F-4 편대가 출격 명령만 기다린 채 대기를 하고 있었다

 

제2 연평해전에서 국구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의 교전 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전에도 경고방송-> 차단기동-> 경고사격-> 위협사격-> 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 연평해전에서도 똑같은 교전 지침과 차단기동으로 대승을 거둔 바 있다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기동 중 기습을 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기동'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4년 경고방송·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3단계로 개정했다.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제2 연평해전 사건으로 대한민국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했고 고속정 6천, 초계함 2척 중에 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다 북한군은 등산곶 684 호정 파손 전사 13 명, 부상 25 명이 발생했고 경비적 2척 중에 경비정 1척이 대파당했다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부근 NLL(북방한계선) 일대에서 북한 해군의 도발로 일어난 교전. 발발 시 언론사에서 '서해교전'이라고 보도했으나 국방부의 발표에 따라 제2 연평해전으로 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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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연평해전 승전 북한 포격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9. 18:44

제1 연평해전(第一延坪海戰),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인민군 해군 간의 교전 사건이다 

 

1998년 초 김대중 정부였던 시대로 햇별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추진 중이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남한의 동해항을 출발한 관광선이 북한 장전항에 도착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에 관련된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98년 6월, 동해 북방한계선 남쪽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북한의 잠수정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인양된 잠수정 내부에는 다수의 개인화기와 사살된 9명의 승조원이 있었다 승조원의 시신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 조치되었다

북한 무장간첩

1998년 7월, 동해시 부근에서 북한 무장간첩의 시신과 침투용 장비가 발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항의를 하였고 북한은 남한의 날조라고 주장하면서 잠수정 사고에 대해 남측에 사죄를 요구했다 11월,

 간첩선이 인천 강화도 해안에 접근을 시도하다가 귀환했으며 12월에는 여수 앞바다에 침투하던 반잠수정이 격침되었다 
  


연평도 사건 발생 1999년 6월 7일 ~6월 10일, 북한 경비정이 어선 보호를 명목으로 연평도 서남방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는 도발을 하였고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이 출동하여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거 퇴거조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북한 해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대한민국 고속정에 충돌 작전을 실시하며 호전적인 행동을 보였다 
6월 11일, 북한 경비정의 충돌 작전에 고속정과 초계함 10역 척을 동원하여 선체를 충돌시켜 밀어내기로 북한 경비정을 NLL밖으로  밀어내기 작전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고속정이 북한 고속정에 올라타는 일이 벌어져 위험한 상황까지 벌어지뻔했다 충돌로 북한 경비정은 25mm 기관포로 선제사격을 가했고 대한민국 고속정은 즉각 대응 사격을 했다 09시 42분까지 14분간 교전이 벌어졌다  이후 대한민국 해군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사격을 중지하고 안전 확보와 확전 방지를 위해 경비함정 남하를 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천 경미한 손상과 장병 9명이 부상을 당해 국군 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 침몰, 경비정 4척 손상, 어뢰정 1척 손상과 다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고속정 함교를 노린 저격수가 있었다 안지영 정장이 저격을 당했지만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고 한다
 

제1 연평해전 교전 동영상 보기:링크

 

제1 연평해전 이후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의 장성급 회담이 이루어졌다 북한 측은 한국 측이 먼저 도발했으며 함정이 출동한 부근은 북한 영해라고 억지 주장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9년 7월 4일, 제1차 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장병 7명을 1계급씩 특진시켰다. 이에 따라 해군 고속정 편대장 최용규 소령과 하사 4명, 일병 2명이 각각 중령과 중사, 상병으로 진급하게 됐다. 군장병들이 그동안 대간첩작전 공훈 등으로 훈장 받은 사례는 있으나 교전으로 특진한 것은 6·25와 월남전 이후 처음인 사례로 기록됐다 1999년 7월 7일, 안지영 대위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했고 1999년 11월 11일, 대한민국 해군은 연평도 당섬에 연평해전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높이 9.35m의 전승비에는 `연평해전'이 발생한 배경과 북한 해군의 선제공격에 대응한 우리 군의 전력, 승전 내용, 그리고 해전의 교훈 등이 담겨 있다

 

6.25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간 해상 교전에서 우리 해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제1 연평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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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실미도 684부대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7. 20:24

인천 실미도 사건(實尾島事件),인천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북파공작원들이 교관 및 기관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진입하여 총격적을 벌이다가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건이다 684부대는 209파견대,오소리공작대로도 불린다

인천 실미도 사건


1968년 4월에 창설된 694 부대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목적의 비밀부대였다 684 부대가 창설된 이유는 19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인 124군 부대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를 했다 (121사태 즉 김신조 사건이다)
이같은 사실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보복을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김형욱 중앙 정보부장은 박정희 명령에 따라 비밀부대를 창설해 부대의 운영과 감독을 맡게 된다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위치한 실미도는 중구 용우동에 딸린 무인도로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밀리에 훈련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 였다


깡패,소매치기,잡범,범죄자가 아닌 사람을 포함한 공작원 31명,장교 1명,사병 42명,조종관 5명으로 구성해 1968년 4월월 - 1971년 8월 /  3년 4개월동안 혹독한 훈련을 실시 했다 하지만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고 상황이 점점 변하면서 김일성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밀려나 중단하게 된다

실제 훈련사진 1
실제 훈련사진 2
실제 훈련사진 3
실제 훈련사진 4


그 뒤 대우와 부식 지급등이 부실해지고 소대장,교관,조교들 대부분이 떠나고 상황이 나빠지고 작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공작원들은 탈영을 시도하거나 하극상,성폭행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건 발생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교관들과 기간병 18명이 살해 당했다 이 과정에서 공작원 1명도 사살되었다
섬을 빠져나온 23명의 공작원들은 12시 20분경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시내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소사,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당시 버스 운전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고 이 모든 일의 책임자인 박정희를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무장공비로 간주된 공작원들은 육군과 총격전한 후 버스타이어가 터져 버스가 움직일수 없게 되자 인천-수원간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하여 14시 15분경,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30사단 육군 병력에게 포위 당한 공작원들은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가 공작원 대다수가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 하였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4년 2월에 대한민국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 한꺼번에 행방불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줄타기 1명,무의도 강간으로 2명이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는 달랐다

훈련중 익사사고로 1명 사망
탈영시도로 즉결심판 2명 사망
하극상으로 집단구타 1명 사망
무의도 강간 사건으로 3명 사망
실미도 교전중 2명 사망
버스에서 자폭 18명 사망
군사재판 사형 4명

 

1명은 실미도에서 사망, 20명은 서울에서 자폭으로 사망, 4명은 군법재판 회부 후 사형당했다 그리고 김방일 소대장외 5명은 숨어있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족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을 처음엔 무장공비라고 발표하다가 무장공비가 아니라 특수범 23범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무장난동을 벌였다고 말을 바뀠다  박정희 정부는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 하였다 
실미도 사건은 30여년간 묻혀있다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2003년 영화 실미도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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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인천 강화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6. 20:42

인천 강화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江華島海兵隊銃器亂射事件),해병대 2사단 해안 소초에서 김민찬 상병이 K-2 소총을 탈취해 동료 해병들에게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2011년 7월4일,해병대 제2사단 소속 김민찬 상병(당시 19세)가 오전 7시 30분 창고에서 몰래 숨겨두었던 소주1병을 마시고 오전 10시30분, 잠이 깨서 나온 정준혁 이병과 창고에서 만나 대화하면서 권승혁 일병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정준혁 이병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말렸으나 소초원들을 다 죽이고 탈영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 둘은 지금 죽이자면서 함께 창고 밖으로 나왔다


오전 11시 20~35분경, 김민찬 상병은 상황실에서 상황병 L 상병과 대화를 나누다 상황 부사관 H하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상황실에 있는 K2 소총 1정과 실탄 75발 공포탄 2발,수류탄 1발이 담긴 탄통을 탈취 했다


H하사는 고가초소 근무에 투입될 근무자에게 소총을 지급하기 위해 총기보관함을 열었다가 교대 근무자의 소총을 반납 받기 위해 총기보관함을 열어둔채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상황병과 상황부사관 모두 상황실을 비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민찬 상병은 정준혁 이병에게 수류탄 1발을 건네주고 고가 초소를 폭파시키라고 지시한뒤 오전 11시40분 ~ 50분경, 김민찬 상병은 전화부스fh 가서 이승렬 상병에게 2발 총격을 가했다

총소리를 듣고 나온 상황 부사관은 쓰러져 있는 이승렬 상병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를 했다 이어 김민찬 상병은 부소초장실 입구에 있는 부소초장 이승훈 하사(당시25세)에게 총격을 가했다

곧바로 제2생활으로 가서 잠을 자고 있던 권승혁 일병의 가슴에 3발을 발사했으며 박치현 상병에게 1발, 권혁 이병은 총소리를 듣고 깨어나 몸을 돌려 피했다


이때 김민찬 상병이 자기 쪽으로 돌아서려고 하자 권혁 이병은 재빨리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결국엔 총을 빼앗지 못했다

권혁 이병은 곧바로 김민창 상병을 문 밖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은 다음 침대를 밀어 문을 못 열게 막았다 당시 몇 몇 고참들이 있었지만 뒤에서 떨고만 있었으며 아무도 권형 이병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몸싸움 와중에 권혁 이병은 하반신에 네 발의 총알이 스쳤지만 치명적인 부위를 피해가서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이후 권혁 이병은 쓰러진뒤 지혈을 해달라고 고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혈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혼자서 옷으로 지혈을 할수 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김민찬 상병은 생활관 근처에 있는 창고로 가서 정준혁 이병과 만난후 고가초소를 폭파시키지 못한것을 알게된다 김민찬 상병은 동반자폭하기 위해 정준혁 이병에게 준 수류탄을 뺴앗아 터트렸고 얼굴 및 등에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생명에 지장이 없었고 정준혁 이병은 곧바로 도망쳤다 수류탄 파편을 맞은 김민찬 상병은 부상을 입고 쓰러지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총 4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이승렬,이승훈,권승혁,박치현으로 밝혀졌다 박치현은 사고 하루 전이 생일이였고 권승혁 해병은 걸그룹 나인뮤지스 전 맴버 은지의 외사촌이며 이승렬 해병은 개그맨 임혁필의 사촌동생이었다 부상자는 권혁을 포함한 총 2명이었고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부대 인근 민간인들의 말에 의하면 총소리가 들린후 속옷 차림의 여러 해병대원이 소초에서 뛰어나와 해안도로와 민가쪽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군무이탈,탈영으로 중범죄에 해당 됐다 원칙상으로 명령이 떨어지기전까지 도망가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도망친 해병대원은 다른 생활관에 있던 인원들 이었다


붙잡힌 김민찬 평소에 군 생활을 잘해왔 고 전역 9개월을 앞두고 있었다 김민찬은 훈련소 인성 검사에서 7가지나 되는 정신과적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으로 귀가 시키 않았다는 것이다


김민찬 상병의 사물함에서 나온 메모와 유서 내용이다


내가 싫다. 문제아다. 나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반항했던 사회성격이 군대에서 똑같이 나오는 것 같다. 선임들이 말하면 나쁜 표정 짓고 욕하는 내가 싫다.

저를 바꾸려고 노력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제가 그만큼 문제아였고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진짜 제 심정을 말씀드리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다 끝내고 싶다.


입대전 정신과 진료나 정신병력은 없었으나 부대에서 관심 사병 이었다  


2011년 7월6일 새벽 1시,김민찬 상병과 범행을 모의한 정준혁 이병을 체포 했다 실제 범행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부대 상황실 탄약고에서 총과 실탄을 훔칠 때 같이 도와줬다는 이유다



2011년 4월 9일,정준혁 이병은 개신교 신자였다 부대원들이 정준혁을 왕따시키고 성경을 불 태우고 담뱃불로 몸을 지지는 가혹행위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김민찬 상병과 같이 소초원들을 모두 죽일려고 했던걸로 추정 된다


이후 재판에 김민찬은 사형 선고,정준혁은 징역 10년에 선고 되어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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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의문사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5. 10:33

장국영(張國榮,Leslie Cheung)의문사 죽음,1956년 9월12일 생, 하카계 출신으로 홍콩 출생이다 원적지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로 중산층 집안의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영국의 리즈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도중 중퇴하고1977년,우연히 나간 아시아 가요제에서 American Pie 불러 2위로 입상해 연예계에 데뷔했다


천녀유혼


1986년,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 1,1987년,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 1에 출연을 해 인기를 얻어 영웅본색2(英雄本色續集),천년유혼2(倩女幽魂II人間道),에 연이어 출연을 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무력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발생한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비판하고 삼합회가 영화계 진출에 대해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으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떠는 이유는 영화 데뷔작《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젼이었는데 영화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스탭들이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해서 영화를 찍어기 때문이다 이후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낀 장국영은 1990년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다

연예계 은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였지만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이민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고 다시 홍콩에 돌아와 연예계 활동을 했다


아비정전(阿飛正傳),종횡사해(縱橫四海),패왕별희(霸王別姬),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여 뛰어난 연기력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1995년 가수 활동을 다시 하게 된다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가 크게 호흥을 얻어 인기를 얻었다


장국영


한국 활동은 1989년 오리온제과 초콜릿  투유광고에 출연을 했고 같은해 KBS 젊음의 행진에서 이선희와 합동 공연,쟈니 윤쇼에 출연을 했다


미국 타임지에서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지만 장국영은 자신의 성적 지향성은 확연하게 동성애다 양성애다라고 확정지어 말한적이 없다고 밝혔다

알려진 이성 연애는 22세에 여배우 모순균(毛舜筠)과 교제를 했고 여배우 예시배(倪詩蓓)와 2년동안 교제를 했었다 이후론 남자 애인 당학덕(탕허더 | 唐鶴德)와 죽기전까지 교제를 시작했다


2003년 4월1일,거짓말 같은 비보 소식을 듣게 된다 장국영은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에서 투신 자살했다(향년 48세)

이 날은 4월1일 만우절이라서 사람들은 언론사들의 이벤트라고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뒤늦게 거짓말이 아니라는걸을 알게 되었다 4월5일,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애도 했다


장국영과 당학덕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대만의 삼합회가 살해했다는 설과 장국영의 전 재산 460억을 상속받은 남자애인 당학덕이 돈을 노리고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평소 당학덕은 삼합회 행사에 자주 보였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병원측은 장국영이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4층에 투신했다면 무조건 즉사했을거라는 의료진들의 주장이다


-경찰은 장국영의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했지만 현재까지도 내용을 공개 하지 않았다 또한 유서에 전재산을 당학덕에게 상속한다는 부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호텔 건물의 형태는 아랫층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다 장국영이 투신 하였다면 중간층에 떨어지거나 부딧쳐서 추락하는데 그러한 흔적이 없었다


-자살 직전 장국영은 10분전 주차장에서 지인과 통화를 했다 장국영이 주차장에서 호텔 24층까지 갈려면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가 투신해야한다


-장국영은 사망 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했었다 평상시와 다른점이 없었다고 한다...


-24층에서 떨어지면 엄청난 큰 소리가 난다 그런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장국영의 시신을 최초 발견 했다


-24층에서 떨어지면은 신체가 크게 훼손되어야 했지만 시신은 너무 온전한 상태였으며 거리에 흘린 피도 매우 적어 혼자 투신한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주장이다


-24층에서 떨어지면은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머리로 떨어지는데 머리 부분에 외상이 거의 없었다


-사건 당일,장국영이 투신하기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한 말다툼을 하는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장국영 사망 당시 당학덕은 나타나지 않았고 알리바이를 댓지만 거짓말이었다


일각에서는 여러 정황과 증거로 보아 누군가 장국영을 살해한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에 말에 의하면 평소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국영의 매니저 진숙분은 장국영이 죽기전 죽고 싶을 땐 뛰어내리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장국영 의문사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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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 50대 여성 토막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0. 20:17

제천 독신녀 토막 살인 사건,충북 제천시 한 배수로에서 50대 여성의 토막난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발생 몇십년후 가해가 병으로 사망해 사건이 종결 되었다

 

시신 매장 위치

 

 

 

사건발생 2003년 3월,충청북도 제천시 한 배수로 공사현장에서 작업 도중 굴착기 기사 정씨가 머리,몸통,두다리,두팔이 토막난 사체를 발견 하였다

 

 

게다가 시체는 흩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부패가심했지만 시랍화가 되어서 지문이 남아있었다

수사기관은 확보한 지문을 복원해서 신원을 파악 했는데 4개월전 용인에서 실종되었다는 서울에 사는 50대 독신 여성 구씨였다

 

 

현장 주변에는 피해자의 여행 가방과 옷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었다 그녀는 제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부패가 진행되어 시랍화로 사망자의 사인을 알아낼수 없었지만 머리에 뭔가 충격을 받아서 생긴 두피하출혈이 발견되어 사인은 교살로 교살된 후 공구등으로 토막 낸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 인물과 휴대폰 통화 목록과 피해자의 계좌에서 4,200만원을 뺴간 남자가 CCTV 화면을 통해 용의자들을 좁혀 나간 결과 유력한 용의자 1명을 찾아냈다

 

신명호

 

용의자는 남성 신명호(당시 45세), 춘천 출신의 부산으로 주소가 되어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기 전과만 10범으로 사기꾼이었다

사기혐의로 여러번 고발되었지만 대부분 벌금이였고 징역도 기소유예, 감방행을 피한 운 좋은 범죄자였다 골프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여성 회원들에게 접근해 관계를 맺고 돈을 후리치며 제비족 생활을 해왔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서 확인 결과 피해자는 신명호의 사기 행각을 눈치챘고 다른 여성 회원들에게 폭로 하겠다고 하자 신명호는 감옥 살이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입박음을 할려고 피해자를 살해 했을거라고 추정 했다

 

피해자가 실종 되기 전날과 다음날,피해자는 신명호에게 여러번 전화를 걸어 왔었다 또한 피해자가 사망한후에도 3개월간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피해자의 아이디로 동호회에 접속한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어 피해자가 살아있는것처럼 속이고 자신과 관계가 있던 여성 회원들과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신명호는 살인 전후에도 피해자 지인과 가족들과 전화를 했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친오빠와 여동생에게 사기를 쳐서 돈까지 받아먹을려고 했다

또한 피해자의 유품을 팔때 피해자의 지인에게 대리를 시켰다 신명호의 치밀한 계획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피해자가 실종되었을때 친오빠는 사업도 포기하고 여동생을 찾아다녔다 이후로 친오빠의 사업을 부도가 나고 부모님은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앓아 누웠다

 

 

2018년 6월 22일, 강원도 속초의 한 원룸에서 신명호가 사망한채 발견 되었다 사인은 지병인것으로 추정했다 가해자가 죽어버렸기에 사건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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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AV 여배우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9. 21:56

AV 여배우 살인사건,일본의 아이돌 유닛minx 맴버이자 AV 여배우였던 모모이 노조미가 갑작스레 살해당한 미제 사건이다

AV 여배우 살인사건,모모이 노조미


모모이 노조미(ももい のぞみ,桃井 望)는 1980년 9월23일생, 도쿄 출신으로 초등학생 시절 나가노 현이나시로 이사 고등학교까지 현지에서 보내고 도쿄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도쿄의 단기 대학에 진학 후 영양사를 목표로 전문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둔후 2001년 AV에 데뷔하여 로리타계 배우로 인기를 얻었고 여태까지 찍은 AV가 무려 200편이 넘었다

이후 AV 배우들과 함께 MINK 아이돌 유닛을 결성해 활동을 했지만 모모이가 살해 당한후 해체를 했다


함께 죽은 사카이 히로키와는 같은 지역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2002년에 다시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사카이는 사건발생 3일전부터 모모이와 함께 집에서 지냈었고 사건 당일날 친구와 약속이 있는날이었다


2002년 10월 12일 밤,나가노 현 시오 지리시 이카와 하천 부지에서 승용차가 불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됬다

소방대원이 출동하여 화재는 금방 진압이 되었지만 차 안에 타고 있던 남녀는 구하지 못했다

두 시신의 신원을 조회한 결과 여성은 AV배우겸 아이돌이였던 모모이 노조미였고 남성은 모모이의 애인이었다


모모이는 차량에서 8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옆으로 누운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복부와 허리에는 4차례 이상 찔린 상처가 있었고 얼굴은 불에 타지 않았다 또한,소방 진압으로 인해 현장 보존이 어려워서 혼자 차에서 걸어 나와 숨졌는지 살해를 당하고 제 3자의 손에 의해서 옮겨졌는지는 판별할수 없었다

부검 결과 폐에는 담배 한개피분의 연기밖에 들어가지 않아 이미 죽은 상태에서 불에 태워진 것으로 추정 되었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사카이는 오른손잡이에 칼을 무서워 했다고 한다 경찰은 시체 사진을 사카이 가족에게 보여줬더니 두개골 정 가운데가 찌그러져거나 깨져있고 구타당한 상처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히 동반자살 살해로 단정지었다 사카이가 모모이를 찌르고 등유를 뿌려 불을 붙이고 자살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건 정황으로 보아 누가봐도 제3자의 타살 이다


ⓐ신발이 집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차에서 사망한 모모이와 사카이 둘다 맨발이었다 

ⓑ집에 컴퓨터가 커져 있었고 휴대폰이 사라져 있었다

ⓒ자동차 소유자였던 사카이 히로키가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다

ⓓ사카이는 차안에서 발견되었고 여성은 차 밖에서 발견 되었다

ⓔ두명 다 사건 이후의 날 지인과 만날 약속을 하고 있었다

ⓕ등유를 뿌리고 점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유를 담은 용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두명 다 연기를 연기를 마시지 않아 불에 타 죽었을 가능성이 낮다

ⓗ모모이 노조미를 찌른 것으로 추정된 칼이 오른손잡이였지만 사카이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불에 탄 차는 문이 전부 잠겨있었고 차의 열쇠는 차안에 있었다

ⓚ사카이는 사건 몇 달 전에 한 남성에서 80 만엔을 빌려 줬지만, 차용 증서에 적힌 이름의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모이 노조미와 사카이 히로키


사건 발생후, 사카이의 모친이 아파트를 정리하다가 나온 사진 필름은 사건 당일 밤, 방안에서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사카이가 입고 있던 녹색 트레이닝복은 발견되지 않았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외출하지 않았다


사건 전, 모모이는 1년에 200작품에 출연을 했다 1주일에 3번을 촬영했고 개런티가 100만엔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데 사카이와 사귀기나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카이와 교제를 하기 위해 AV여배우를 그만둘려자 업계 관계자와 갈등이 생겼고 사건 발생 이틀 후에는 모모이 출연하기로한 촬영 일정을 취소하고

다퉜다


또한 사카이는 아파트 이웃 남성의 꾀임으로 피라미드 다단계 사업을 손을 대게 되었는데 나중에 이 남성과 본산의 연락이 두절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남성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이 되었다 차용증에 쓰인 필적이 일치했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위조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 조사결과 증거하나 찾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속에 빠졌다 사건 전 그가 빌린 80만엔의 차용증에 기입된 돈을 빌려준 사람은 그의 가족 친구들도 전혀 모르는 인물이였다


모모이 노조미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수사가 종료되고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야쿠자,관동연합가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밝혀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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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5. 22:08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鈴木俊之 失踪事件),한 어린이가 밖으로 놀라갔다오다며 나간뒤 행방 불명된 실종 사건이다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


사건발생 1965년 7월3일 오후 4시15분경,일본 시즈오카현 이토시 우사미구,스즈키 토시유키(鈴木俊之, 당시 7세)가 밖에 놀러갔다 올게라며 나간뒤 실종되었다 늦은 시간이 되어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는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이틀 후, 한 여성으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3번 걸려 왔다 


이틀이 지난 7월5일 낮 12시30분쯤,200미터 떨어진 인근 호텔에서 한 여성이 유킨 군 집으로 전화를 걸려왔다


집 근처에 아이가 없어진게 사실입니까?그럼 틀림 없겠네요? 라고 말한뒤 끊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인근에 사는 유키 군의 친척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마찬가지로 여성이였다


여성:아이가 없어진게 사실인가요?

친척:예

여성:내가 납치 했다 오늘 3시까지 아타미 역 1 번 홈에서 ...

놀란 친척은 순간 수화기를 던져버렸고 수색대에 전화해 알렸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전화는 끊겨 있었다


같은 시간 유키 군의 아버지의 직장인 여관에 전화가 걸려왔다 또 그 여자 였다

유키 군의 아버지(이름을 불렀다) 계신가요?라고 말한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계속 이상한 전화를 받은 가족과 친척들은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 후 유키 군의 어머니와 경찰 2명은 아타미역에서 범인을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7월6일,동네 아이들의 유키 군을 목격했다는말에 유키 군이 목격된 산으로 가서 수색 했지만 찾을수

없었다

같은 날,인근 생선 가게에 전화가 걸려왔고 또 그 여자였다 4살 난 소년이 전화를 받았다


여성:뭔데? 토시 짱?


곧바로 소년의 할머니가 전화를 받아 누구냐고 물어보자 꺼져라고 한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후로 그 여성으로부터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사건 전 인근 강에서 유키 군이 벌레를 잡고 있었고 여기서 유기 쿤이 납치된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 후 3일째 오전 8시부터 9시반까지 유키 군 집으로 오는 국도에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왕복했으며 뒷자리있던 여자가 창문을 내리고 유키 군의 집 쪽을 보면서 주시 하고 있었다


또한 집에서 100미터 거리에 있는 유키 군의 아버지가 일하던 여관방에 휘집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전기는 켜져 있었고 부엌에는 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한 침대 이불속에는 장난감이 있었고 립스틱이 묻은 목욕 타워이 발견되었다

이 방은 4월에 딱 1번 사용된 방이었다...


이 정황으로 보아 3번이나 같은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1번은 유키 군의 아버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유키 군이 실종된 3일째날 한 여성이 차를 타고 유키 군의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킨 군 아버지가 일하던 여관에 유키 군을 데리고 와서 잠시 머물렸다

유키 군을 납치한 범인은 이 여성이 맞다 그리고 왜 유키 군을 납치 했을까? 돈을 요구하지도 않은채 유키 군을 납치 했다는 말만 한뒤 전화를 끊었다


유키 군 아버지와 내연 관계였거나 옛 애인이 아니였을까? 무슨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키 군 아버지에게 원망이 있었던게 아니였을까?

  

여관방에 범인이 여러 흔적이 있었지만 1965년에는 과학수사가 어려웠다 DNA 채취가 어려웠던 시대라 범인을 잡는데는 힘들었다 육감과 직감으로 수사를 하던 시대라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쉬웠었다

인근 강에서 유키 군이 목격된 이후로 더 이상 볼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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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 은행 가짜 야간금고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5. 17:37

오사카 가짜 야간금고 사건(大阪ニセ夜間金庫事件),일본 산와은행 우메다 지점에 가짜 야간금고를 설치해 고객들이 예금한 돈을 절도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일본 오사카 가짜 야간금고 사건


사건발생 1973년 2월25일 저녁 8시40분,일본 오사카시 키타 구 우메다 의 위치한 산와 은행 우메다 북쪽 지점의 야간금고 벽면에 안내문이 부착 됐다



'이용 고객님들 열쇠 접속 부분 고장으로 인해 금고 개폐가 불가능해졌으니 지점 전용 문에 위치한 임시 금고를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임시 금고 안내문에는 열쇠는 필요없습니다 바로 돈을 넣고 우측 레버를 아래로 끝까지누르면 영수증이 나옵니다 또한 이 금고는 임시금고이므로 영수증을 반드시 챙겨가시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은행 부근에는 상가에 점포가 많았다 점포상들은 당일 번돈을 매일 은행에 예금을 했다 의심할만한 이상한 안내문이였지만 은행을 온 고객들은 은행안이라는 생각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임시금고를 이용했다


그러는 와중에 은행 근처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점장(당시24세)이 매출 30만엔을 들고 은행에 찾았다 그 역시 안내문을 보고 임시 금고로 이동을 했고 돈 봉투를 넣으려는데 안에 뭔가가 콱 막혔는지 봉투가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자 점장은 경비센터에 신고 했다 신고를 받고 온 은행 경비원과 은행 직원이 왔는데 뭔가 이상 하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은행측으로부터 야간금고가 고장났고 임시 금고를 설치했다는 말을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경찰에 신고 했다



조사 결과 임시 금고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가짜 였다 보통 금고와 달리 합판에 스테인리스 판을 붙이고 테투리는 알루미늄 섀시를 사용하고 간판 뒤에는 수은 전지를 설치해서 빛나게 했다 얼핏 봐서는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것 처럼 보였다

게다가 금고의 크기는 은행 금고의 크기와 일치했다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진 금고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못챘다 더구나 의류매장 점장의 돈 봉투가 들어가지 않은 것도 금고를 너무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30분사이, 가짜 금고안에는 2.576만엔이 들어있었고 콱 차있었다 그래서 의류매장 점장이 돈 봉투를 넣으려고했으나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가짜 금고를 완벽하게 만들어지만 돈을 비우는걸 계산하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현금 수송 담당자들이 와서 기계안의 현금을 빼서 비워주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범인이 남긴 증거물이 많아서 범인을 금방 잡을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가짜 금고가 만들어진 경로가 어디인지를 집중 수사 했다

 

범인은 가짜 금고 설치는 4분만에 이루어졌다 오후 8시 40분, 25명의 사람들이 금고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금고의 열쇠 구멍에 철 조각을 삽입한뒤 간판을 들고 다른 쪽에서 가짜 금고를 설치 했다

설치가 끝난후 바로 가짜 금고를 이용할려는 고객이 들어온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였다


가짜 금고를 설치후 적당한 시간을 가늠해 돈을 회수에 오려고 1층 비상 계단에 담배를 피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류매장 점장의 신고로 은행 경비원과 은행직원이 오게되자 범인들은 돈도 못 챙겨가고 황급히 도망 갔다

1층 비상 계단에는 담배 꽁초,호테이 오사카 다방 성냥갑,작업복,포대자루가 발견 되었다


한달 전인 1월30일,고베 이쿠타 구내의 슈퍼에서 야간금고 플라스틱 플레이트판을 주문 했었고 금고의 본체가 된 합판은 같은시기 이타미 시내의 건축 자재 상점에서 구입 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고의 설치와 돈회수를 생각하면 범인은 3명이상이 유력 했다

그리고 범인은 간판에 「猶」「儘」「成可く」など、旧漢字や旧仮名遣い 옛 한자를 사용한것으로 보아 나이대는 중년 이상으로 추측 했다

가짜 금고에는 범인것으로 보이는 지문이 발견되었지만 대조 결과 신원이 파악 되지 않았다


사건 발생후 3개월,경찰로 시민의 제보가 있었다 두 형제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 형제는 인근 도시에 살고 나이는 30~40세로 화물 관계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잘 되지 않았다 형제는 사업하기전 현장 인근 상가와 판금 도장 관련일을 했었고 사건 직전에 금전 문제를 겪었다

두 형제가 의심스러워 제보를 했다는 지인의 신고였다

이후 경찰은 두 형제를 조사했지만 관련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하게 끝났다 


에필로그?


가짜 야간금고 사건이 벌어진후 2개월이 지난 1973년 5월1일, 오사카 다이마루 백화점에 협박장이 날아왔다

3,000만엔의 현금을 내놓을것 지시에 불응할 경우 3일뒤 소고 백화점에 사건 하나가 터질거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이마루 백화점 측은 아무일도 안 일어나겠지 하면서 거절을 했다


사건발생 5월4일, 소고 백화점 매트 판매장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 했다 결국 다이마루 백화점 측은 직원에게 3,000만엔이 든 가방을 주고선 경찰과 함께 범인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 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한 승용차를 지목해 드렁크 안에다 돈가방을 넣으라는 지시를 받은후 백화점 직원이 돈가방을 드렁크에 넣었다

그런데 범인과의 연락이 끊어졌고 경찰은 급히 차쪽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었고 드렁크에 있던 3,000만엔이 든 가방도 사라져 버렸다

차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돈가방만 없어진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범인들은 경찰들이 쫓아올것을 대비해서 차 트렁크에다가 트릭을 설치해 두었다

차 트렁크가 닫히는 순간 돈가방은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해두었다 그리고 돈가방이 떨어짐과 동시에 낚싯줄에 걸리게 해서 잡히지 않으면서도 돈가방을 안전하게 가로챌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3,000만엔 돈가방이 사라지게 한 트릭에 사용된 장치가 약 2개월전 산와 은행에서 가짜 금고를 만들때 쓰였던 합판과 동일한 재질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만이 아니였다 1984년 ~1985년까지 1년동안, 교토와 한신 일대에서 괴인 21면상이라고 자칭했던 범인들이 글리코,모리나가,마루다이등 식품 회사들을 상대로 협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으로 불린다 이 범인들은 모리나가 제과에 1억엔을 요구하면서 맨홀 위에 둔 옷상자를 통해서 현금을 강탈하려는 트릭이 가짜 야간금고 사건의 트릭과 비슷했다


모두 관서 지방이라는 점을 토대로 두 사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범인은 실패를 했지만 성공도 했다 그리고 잡히지 않았다 7 년 후인 1980년에 시효가 성립되었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글 출처: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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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구미제사건 3억엔 사건 완벽한 범죄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22:20

일본 3억엔 사건(三億円事件(三億円強奪事件),일본 도쿄도 휴츄시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으로 3억엔을 강탈한 일본에서 일어난 희대의 현금 절도 사건이다 


일본 3억 엔 사건


아직까지 범인히 잡히지 않은 영구 미제사건이다 범인의 완벽한 계획에 경찰들은 속수 무책으로 당한 사건이기도 하다..


사건발생 1968년 12월10일, 비가 많이 내리던날 도쿄 코쿠분지에 있는 일본신탁은행 코쿠분지점에서 도쿄 후추에 위치한 도쿄 시바우라 전기(현재 도시바)후츄 공장으로 현금 3억엔이 들은 가방 3개를 실은 현금 수송차량이 출발했다 후츄 공장으로 간 이유는 직원들의 연말보너스와 사무비를 지급할 목적 이었다


수소차량은 1964년형 닛산 세드릭 일반 세단이였고 일본신탁은행 코쿠분지점 은행직원 3명이 타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휴츄 공장에 도착할 무렵 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온 경찰이 접근해왔다

경찰은 손을 내밀어 정차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수송차량은 영문도 모른채 길가에 차를 정차를 했다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무슨 일이시죠?


경찰:일본신탁은행 스가모지점 지점장의 집이 폭파되었습니다 이 수송차량에도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수송차량을 조사해봐야 합니다


코쿠분지점 은행직원:출발 당시 수소차량의 외부와 내부를 모두 검사를 했기 때문에 이상이 없습니다


경찰: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량 하부를 검사해봐야겠습니다

.....잠시후

경찰:다이너마이트다 곧 폭발 합니다 빨리 도망치세요!

실제 범인이 놓고간 오토바이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을 모두 멀리 대피시킨후 수소 차량을 운전하고 경찰 오토바이를 그자리에 남겨둔채 도주했다


이때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은 자신들을 구하려고 폭탄이 장착된 수소차량을 몰고 사라진것으로 생각 했었다 하지만 몇초후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은 경찰이 타고온 오토바이를 보고선 경찰이 놓고간 오토바이가 가짜라는걸 알았다


경찰 오토바이는 혼다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범인이 타고온 오토바이는 야마하꺼였던것이다


도쿄 전역에 경찰 만명의 인원이 투입되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했으나 범인의 흔적도 못찼고 놓치고 말았다


범인이 보낸 실제 협박장


사건발생전 1968년 12월6일,일본 신탁은행 코쿠분지 지점장 앞으로 협박장이 배달되었다 다음날 오후5시까지 현금 300만엔을 지정된 장소에 여성 직원이 가져오지 않으면 지점장의 집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이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12월7일 오후 5시, 경찰 50명이 잠복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범인이 버리고간 차량


사건 당일, 범인은 치밀할 계획을 세웠다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 하기 좋은 장소에다가 경찰 오토바이를 숨겨 놓았다

범인은 가짜 경찰복을 입고 대기를 탔다가 현금 수송차량이 지나가자 가짜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수소 차량을 쫓아 갔다 수소 차량을 따라 붙은후 짜여진 각본대로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을 현혹 시켜서 수소차량을 탈취를 해서 도주를 했다

이후 현금 3억엔을 원래 가져온 차량에 옮기고 탈취한 차량을 숲에다 유기 시킨뒤 도주를 했고 경찰의 대대적인 검문이 있었지만 걸리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이 흘리고간 실제 물품


범인은 놓쳐지만 범인이 흘리고간 물품이 무려 120여개나 되서 범인을 잡을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증거품이였다 경찰이 얻은 유력한 단서는 수송차량과 오토바이였지만 뚜렷한 단서 하나 나오지 않았다

헌데 경찰은 오토바이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를 했지만 중요한게 아니라며 배제를 했다 왜 그랬을까? 경찰도 공범이였던걸까?


실제 범인이 버리고간 코롤라 차량과 현금가방



사건 발생 4개월후, 코쿠분지 근처 고가네이의 주차장에서 범인이 탔었던 코롤라 차량을 발견했다 코롤라는 시트에 덮혀있었고 차 안에는 빈 현금 가방 3개가 있었다 코롤라는 도난 차량이었다

A군과 몽타주


몇일후 경찰은 코쿠분지에 살았던 19살의 소년 A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을 했다 불량아의 리더였던 A는 자주 차량을 훔치던 상습 절도범이었다


사건 발생전, A는 학교나 은행,현금 수소차량을 털자고 제안한 사실이 있었다 정황상 A는 운전을 잘했으며 지리에 밝았다 또한 부친이 오토바이 경찰이라 경찰 위장 하는데 유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날 A는 집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했다 왜 자살을 했을까? 의문점이다....


A가 죽은후 현금 수소차량에 타고 있었던 은행 직원들의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어야 했지만 1년전에 죽은 A의 사진을 몽타주로 사용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12월21일, 부정확한 몽타주를 일본 일대에 배포했고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A는 3억엔 사건의 범인이 아니였다 협박장이 보내지던 날 알리바이가 있었고 협박장에 검출된 혈액형과 일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범인은 오토바이를 몰면서 한쪽 발을 지면에 끌면서 끈었다는 것이다 발이 지면에 닿을려면 최소 키가 170cm되어야 한다 하지만 A의 키는 165cm에 불과 했다


이후 경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탈취된 현금 중 유일하게 알고 있던 500엔짜리 지폐의 일련번호 2,000개를 공개했으나 범인을 잡는데 실패 했다

7년간 10억엔의 예산을 부으면 17만명의 경찰을 투입하고 11만명의 용의자를 지목했으나 수사에는 진적이 없었다 



31년이 지난 1999년,한 여성이 과거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해 놓은 워드프로세서 파일이 유출됐다


워드프로세서 파일은 신주쿠 어느 가게의 단골손님인 남자가 가게 사장이었던 여성의 컴퓨터에 문제의 파일을 보고는 몰래 훔친 것이었다


여성의 일기는 3억엔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후 남자는 워드프로세서 파일을 출판사에 넘겼고 그 해 서적으로 나오면서 화제가 되었다


나는 내가 3억엔 사건의 실행범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표현한 것은 그때 나 자신에게 스스로의 의사가 있었는지 분명치 않아서이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친척집을 전전하던 여고생에게 있어 신주쿠의 재즈바 재즈 빌리지는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

그곳은 떨어져 살던 오빠가 매일 같이 친구들과 상주하던 곳이었다


당시 극렬한 학생운동 전개와 시대의 파도를 비웃으며 오빠와 친구들은 시끄러운 재즈에 몸을 던졌다

나는 그곳으로 처음 오빠를 보러 간 날 오빠의 친구 무리에서 키시를 만났다

도쿄대생인 키시는 스마트한 데다 무언가 오빠의 친구 무리와는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곧 나는 오빠의 친구 무리 사이로 녹아들었고 키시와도 점차 친밀해졌다

운전을 해보고 싶어 하던 나에게 키시는 오토바이와 차량 운전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 모르게 나랑 키시는 비밀스레 가까워졌다


어느 날 키시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키시는 나에게밖에 부탁할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고

나는 내가 필요하다는 말에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승낙했다 


키시의 부탁이란 도쿄 시바우라 전기 후츄 공장으로 향하는 현금 수소차량을 빼앗는 것이었다

키시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나는 몇 달 동안이나 키시와 함께 예행연습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키시와 범죄를 모의하던 그때가 나에게 있어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1968년 12월10일,나는 키시의 계획에 따라 뒷머리를 질끈 감아올리고 현장으로 향한 자리에서 실행범이 되어 현금 수소차량을 빼았았다

키시는 계획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즉시 중단하고 현장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했지만

폭우가 쏟아지고 커버 시트가 오토바이 뒤에 걸리면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현금 수소차량을 따라 잡을수 있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현금 수송차량을 빼앗은 뒤 약속지점에 차를 타고 대기중이던 키시를 만났고 그곳에서 키시에게 현금 가방을 넘기고 나는 미리 준비된 도난차를 몰고 지정된 곳에 유폐시켰다


이후 키시와 나는 얼마간 평소처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냈지만 키시는 빼앗은 현금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나 또한 키시에게 묻지 않았다

거물 정치가의 서자였던 키시는 아마 사건이 범국민적인 관심거리가 되었을 때 스스로 범인임을 자수하여 희생함으로써 내각에 쏟아질 비난을 투쟁의 디딤돌로 만들려던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버림받은 아버지로부터 복수를 꿈꿨던 것이거나 말이다 키시는 사건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져도 나는 여자이고 무현허이니 걱정하지 말고 수험공부에 매진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키시의 말은 맞았다


더불어 키시는 만일을 대비해 빌려두었던 집의 열쇠를 쥐여주곤 나에게 수험이 끝나면 그곳에서 살아도 된다는 말도 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키시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했고 키시는 나에게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다고 대답했다


1969년,수험이 끝나고서 나는 키시가 구한 집에서 키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키시는 반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키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에도 지쳐갈 때 즈음 나는 처음부터 집안에 있던 어느 책에서 키시의 메모를 발견했다

책 본문 사이로 마치 낙서처럼 적혀있던 그 메모로 나는 키시가 말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알수 있었다


소녀를 만났다 맑은 눈을 한 소녀는 올곧게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아마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걸 전할수는 없다

나는 그녀의 눈을 더럽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까.


내 오빠인 리키는 1990년 46세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재즈 빌리지 무리 중 작가 지망생으로 오빠와 가장 친했던 켄지도 오바를 뒤따르듯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키시는..키시는 지금도 여전히 실종상태다 키시는 내 첫사랑이다..


여성의 일기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3억엔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자들과는 달랐다 범행 전,범행 당시,범행 후의 경위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록 했다


사건이 벌어지던 현장 부근에 장시간 정차 중인 차량이 목격되었다 차량에는 한 남성이 타고 있었다 이 차량은 범인이 수송차량에서 갈아탔던 차량과 나란히 목격되었다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한 범인 얼굴

사건 직후 경찰은 검문 대상을 남성으로 제한했었다 범인이 절도 했던 또 다른 차량은 낫산 스카이라인 2000GT에서는 재즈바에서 유통되는 성냥과 여성의 귀걸이가 발견됐다

수송차량에서 다른 차량으로 갈아타던 범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는 차량이 너무 빨리 달렸고 비가 마니 쏟아져 범인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본것은 범인의 뒷머리가 장발이었다는 증언이었다


경찰의 지목했던 A군과 이 여성의 애인이였던 키시가 동일인물이 아니였을까?

 

A군이 3억엔 수소차량을 탈튀한 범인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불명예를 피하고자 아들을 독살시킨것으로 보인다는 추측이 있었다


사건 당시. 범인이 수소차량에서 다른 차량과 동일한 몸델의 차량을 현장 부근에서 홀로 운전 중이었던 여성의 사진이다 당시 운집한 경찰을 찍던 시민에 의해 찍힌 사진이다 


이 사진과 일기장,A군의 자살?범인은 A군(키시)와 리키의 여동생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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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15:47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事件(いのかしらこうえんバラバラさつじんじけん),일본 도쿄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아 영구 미제사건 이 되었다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1994년 4월 23일,오전 도쿄도 미타카시에있는 이노 카시 라온시 공원의 쓰레기통 비닐 봉투에 들어간 인간의 발목이 버려져있는 것을 우연히 청소원 여성(당시59세)이 발견했다

처음에는 생선이나 돼지고기라고 생각하고 고양이 먹이를 줄려고 열어볼려다가 사람의 다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공원 일대를 수색했고 총 27개에 절단 된 팔다리 몸통의 일부가 봉투에 담겨져 있었고 7곳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신체 부위가 반투명한 봉투에 이중으로 싸여져 있었고 머리와 일부의 몸통은 발견되지 않았다 손발의 지문은 모두 깍여져 있었지만 남아 있던 지문과 DNA를 발견해 피해자의 신원 파악을 알아냈다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사는 1급 건축사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 당시 35세)로 밝혀졌다


당시 발견된 쓰레기통의 시체들


시신은 관절이나 장기등을 무시하고 전기 톱으로 20cm 간격으로 정교하게 절단되었다 이것은 공원의 쓰레기통 투입구 크기인 세로 20cm, 가로 30cm로 거의 일치 했다

또한, 절단된 시체는 혈액 한 방울 남김 없이 빼갔다 혈액 없이 시체를 절단하려면 의학지식이 필요했다 시체는 3가지 방법으로 절단 되었고 범인은 한명이 아니 2,3명이상이라는 추측이다


발견되지 않은 머리와 일부 몸은 어디로 갔을까? 일각에서는 시체 토막들이 4월23일 이전에 버려져 쓰레기차에

실려 쓰레기 매립지에 이미 버러져 찾을수 없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피해자의 발걸음과 목격담


4월21일 오전 7시30분,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4월21일 오전 8시30분,미나토 구 신바시의 건축 사무소에 출근

4월21일 낮,아내에게 술자리가 있어 늦게 간다고 전화

4월21일 오후 5시 30분,옛 동료들과 술자리에 참가

4월21일 오후 11시30분,신주쿠 역에서 옛 동료2명과 헤어졌다

4월22일 오전 0시10분,집근처역인 키치죠지 역 도착

4월22일 오전 0시15분,키치죠지 역에서 2명의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것을 봤다는 여성의 증언

4월22일 오전 0시~1시경,카와무라 세이치 자택근처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주민 사람들 증언

4월22일 오전 9시경,이노카시라공원 2km 거리에 있는 스기나미구 구가야마 근처 편의점에서

대량의 쓰레기 봉투를 구입하는 남자 2명 목격 반투명 쓰레기 봉투 10팩(총100매)를 구입했으며

1명은 30세 전후로 티셔츠를 입었고 다른 1명은 50세 전후에 검은 작업복을 입었다

쓰레기 봉투를 사면서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점장의 증언이였다


4월22일 저녁,남편 카와무라 세이치가 돌아 오지 않자 아내는 직장에 전화를 걸었지만 출근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동안 무단 외박,무단 결근을 하지 않았던 남편이기에 아내는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4월23일 오전 4시경,이노카시라공원내에서 쓰레기 봉투를 가진 의심스러운 두 사람이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1명은 정장을 또 다른 1명은 점퍼를 입었고 30세전후 165cm키에 점퍼를 입은 남자가 비닐 봉투를 가지고 있

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남자는 2명이 아니였다 공원근처에 2명의 남자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4월23일 오전 11시,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청소를 하던 여성 미화원에 의해 남자의 발목이 발견됬다

공원 일대를 수색한 결과 7곳의 쓰레기통에서 총 23봉지에 토막난 신체 부위가 담겨져 있었다


5월11일 정오,공원 근처에서 오른쪽 어깨의 일부인 뼈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발견 되었지만

경찰의 확인결과 돼지 뼈로 판정 났다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


피해자 남성은 온후한 성격이였고 부부사이도 좋았다 1958년 도쿄 출생 지역의초등학교,중학교를 졸업하고 도립 아키 고등학교는 건축과를 나왔다 성인이 된후 다카다 노바 바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게된 아내 미요코와 결혼을 했고 아내와 아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손바닥 지문을 의도적으로 깍아 있던것으로 보아 아는사이,아주 가까운 인물이 범인이라고 추측 했다 그리하여 친한 사람들,친구,친척,직장 동료등 모두 조사를 했지만 다 알리바이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신흥 종교단체에 의해 살해 당했을거라는 주장이 있다 두 부부는 신흥 종교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신흥 종교에서 탈퇴를 하자 남편을 살해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2009년4월23일 오전0시, 공소 시효가 성립되었다 범인을 찾을만한 단서와 증거가 없어서 수사의 진적이 없어서 수사가 중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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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12:49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BOAC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영국 해외 항공 (BOAC 현 영국 항공 ) 일본인 여성 객실 승무원 (스튜어디스)이 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미제사건이다



사건 발생 1959년 (쇼와 34 년) 3월 10일 오전 7시 40분, 도쿄도 스기 나미 구에 있는 젠푸쿠지 강(善福寺川) 하류에서 일본인 여성 승무원(당시 27세)의 시체가 발견 되었다 시체는 옷을 입은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고 물 위에 떠 있었다


처음에는 자살로 수사를 마무리 할려고 했으나 3월11일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부검을 한 결과 목이 졸려 죽은 교살로 드러났다 또한 피해자의 몸과 팬티에서 O형,A형,AB형 남자의 정액이 발견 됐다


피해자 여성은 타케가와 토모코(武川知子)로 1958년 12월, BOAC 현 영국 항공에 취직 했으며 일본인 여성 9명중 1명이였다

이 사건의 전후에 BOAC 항공의 다른 스튜어디스가 돈이나 마약 등의 밀수에 관여 한 사건이 발각 되었다


국제 조직적인 밀수 루트에 관한 모략 사건이 아닌가하는 설도있다

피해자 여성의 행적은 3월8일 오후3시 세타가야에 있는 스튜어디스 숙소에서 외출한것이 마지막이였다

동료들에게 코마고메에 있는 숙부 다카하시 고로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고 말한뒤 외출을 했다

그러나 확인결과 그녀는 숙부의 생일잔치를 갔던게 아니였다 그 핑계로 남성을 만났던게 아니랴는 경찰의

주장이였다


루이즈 벨메르쉬


어느 날 수사 도중에 유력한 용의자가 지목이 되었다 벨기에 신부 루이즈 벨메르쉬(당시 38세)는 벨기에 가톨릭 신부였던 그는 1948년 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와서 1953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돈 보스코사에 배속되어 재무담당으로 일해 왔다


그런데 벨메르쉬는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유치원의보모,간호사들과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한다는 이야기 였다 타케가와 토모코가 죽기전 살레시오 수도회 산하의 성 오델리아 유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벨메르쉬와 만나다는게 확인 됐다


벨메르쉬를 집중 수사를 하던중 하라주쿠 호텔에서 벨메르쉬와 피해자 여성 토모코가 함께 들어간것을 목격자 제보가 들어왔다

3월10일 오전 5시, 토모코의 시신이 발견된 날, 센푸쿠지 강 인근에 살던 주부가 밖에서 차 소리가 나서 확인해보니 하얀색 승용차가 센쿠지강 옆 둑길로 가고 있다는것을 제보 했다


이후 주부에게 차량 카탈로그를 보여 주자 하얀색 르노 차량을 지목했다 벨메르쉬의 승용차가 하얀색 르노 였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자 한결같이 하얀색 르노 차량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벨메르쉬가 범인으로 유력 해지자 당대 일본의 유명한 형사 히라츠카 하치베가 심문을 맡기로 했다

토모코의 성기에서 발견한 정액 혈액형이 O형 남자인것을 확인했던 경찰은 벨메르쉬의 타액을 채취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벨메르쉬는 경찰이 권하는 커피와 주스등 입에 대지 않았으며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다 

5월 11일,12일,13일,20일,21일 총 5회에 걸쳐 30여 시간동안 심문을 했다 벨메르쉬는 토모코와의 성관계를 부인했으며 알리바이가 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3월9일 오후9시에서 12시 사이의 알리바이를 추궁하자 알리바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했고 하라주쿠 호텔에서 투숙한것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하다가 경찰이 증거를 보여주자 쉬러갔을뿐이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경찰은 벨메르쉬의 혈액을 알아내고 정액의 혈액형과 일치함을 밝혀내 구속영장을 청구 할려고 해으나 6월11일 오후7시30분, 벨메르쉬는 로마 본부로 전속되었다면서 하네다 공항에 에어 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떠났다

이후로 수사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


토모코는 왜 죽었을까? 일각에서는 돈 보스코사가 토모코 살인에 개입했다는 추정이 있었다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유치원에서 일하던 토모코가 갑자기 BOAC의 스튜어디스가 된것이 이상했다 20세에서 25세로 연령제한 규정이 있었는데 토모코는 27살로 BOAC의 스튜어디스가 되기 어려웠다 또한 시험성적도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뽑현던데 의혹을 사게 되었다

런던 본사에서 교육을 받았던 토모코는 단독 행동이 많았고 편지를 들고 아침 일찍 어디론가 나가곤 했다 또한 항상 초초하고 무서워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는 동료들의 증언이었다


당시 돈 보스코사는 카톨릭 포교를 위해 위법을 서슴치 않았다 부당이득,암시장,자금밀수,불법자금 수송등을 해왔다 심지어 BOAC는 돈 보스코사의 자금 밀수로였다 여러 정황을 보아 돈 보스코사의 재정 담당이였던 벨메르쉬의 애인 토모코를  BOAC의 스튜어디스로 들어가게 한뒤 달러르르 밀수하는 운반책을 맡기려고 한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다가 토모코는 반황을 했거나 밀수한 달러는 빼돌리려는 모습이 포착되 그녀를 살해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타케가와 토모코를 죽인 범인으로 루이즈 벨메르쉬가 확실했지만 체포도 못한채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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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3. 19:18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東京都日野市の小学4年生の首吊り事件は),일본 도쿄 히노시의 타카하타 산에서 초등학생 4학년 (당시 10세) 남자 아이의 손.발이 묶인 상태로 나무에 목을 메달아 사망한 소년이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을 지었지만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였다



2015년10월25일, 사건이 일어나기전 소년은 오전 11시경 어머니에게 놀러갔다온다면서 외출을 했다 그런데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발견된 장소


오후 8시경, 일본 도쿄 히노시의 산에서 목을 메달아 죽은 소년이 발견되었다



소년의 옷과 신발은 나무 근처에 놓여져 있었고 목과 양발 양손이 비닐끈으로 묶어져 있는 상태로 경사진 부분에 옆으로 눕혀져 있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고 저항 같은 흔적이 없었다 또한 현장에서 타인의 지문,DNA등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 경찰은 자살로 판정 했다


죽은 남자 아이는 특수 대안학교(東京賢治シュタイナー学校)에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슈타이너가 만든 교칙으로 운영되는 학교다

구애받는 시간표,교과서가 없었고 자유를 중시하는 교육을 했고 한 학년은 10명 정도의 정원이라 이지메나 괴롭힘이 없었어 다들 친하게 지냈다

또한 인터넷,게임,TV을 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사이비 종교 같았다


경찰이 자살로 단정지은 이유는 손과 발이 묶여있었으나 매듭의 강도가 느슨했고 시체에 외상이 없으며 저항한흔적이 없었다 또한 옷과 신발이 강제로 벗겨진 흔적이 없었다


10살 남자아이가 손과 발을 묶고 경사진 나무에 목을 메달아 자살할 생각을 가졌다는게 의문점이다 또한 날씨가 상당히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옷과 신발을 다 벗고 자살했다는점이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학교 친구들이 아닌 타 학교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의 짓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별문제가 없어겠지만 동네 아이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한 아이로 취급을 당해 이지메를 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동네아이들은 소년에 손과발 그리고 목을 비닐끈으로 묶어서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경사진곳으로 내려가게 한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소년을 지켜본후 소년가 죽자 급히 도망쳤을거라는 주장이다


다카하타산은 등산객들이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산이나 마찬가지로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지매를 당한 시간이 늦은 저녁이라며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 되었지만 여러 의문점이 있는 미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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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2. 19:25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歌舞伎町雑居ビル火災),일본 도쿄도 신주쿠 구 카부키 쵸의 명성 56빌딩 상가에서 일어난 화재로 44명이 사망했으며 일본에서 발생한 화재중에 5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사건 발생 2001년 9월1일, 일본 도쿄 신주쿠쿠의 가부키쵸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 했다 화재 지점은 빌딩 3층에 마작 게임장에서 시작되 옆의 엘리베이터 근처인 건물 3층과 4층의 섹시 술집에 종업원(직원) 중 한 명이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 버려 화재가 급속도록 퍼져 큰 화재가 발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건물 안에 있던 손님과 종업원을 포함 4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 했다 3층에 있던 인원은 19명중의 16명이 사망, 4층에 있던 28명은 전원 사망했으며 3층에서 종업원 3명이 무사히 빠져나왔다 목격자의 의하면 4번째 생존자 있었다고 한다 행방은 확인 되지 않았고 추측으로는 불을 지르고 도망간 범인이 아니였나 쉽다


섹시 술집[섹시 펍(セクシーパブ)] 종업원 한명은 도로쪽 비상구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구급차를 불렀다 또한 종업원2명은 창문으로 탈출해 지붕을 타고 3층 게임점에서 목숨을 건졌다



화재의 원인은 3층 계단에 있는 도시가스 미터기에서 발생한것으로 확인됐다 열로 의해 배관을 연결하는 알루미늄 합금 피팅이 녹아 떨어지는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알루미늄 합금이 녹아 내릴 정도라면 높은 온도여야 한다

일각에서는 방화범이 의도적으로 저지는짓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화재 발생시점에 급히 빠져나온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화재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오작동이 많아서 전원이 꺼져 있었다 또한 4층은 천장 화재 경보기 마다 내장재로 덮어버리고 있었고 3충에는 피난기구가 설치가 안되있었고 4층에는 설치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수 없는 상태였다

소방시스템이 잘되어있었더라면 44명의 사람들은 사망하지 않았을것 같다


2003년 2월, 건물소유주와 세입자등 6명은 소방법 위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되었고 건물은 사용 금지 명령을 받았다 한편 사망자 가족은 건물소유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2006년 4월 18일,합의후 건물주와 세입자가 배상을 했다


2008년 7월2일,도쿄 지방 재판소는 건물소유주 및 세입자 포함 5명에게 집행유해를 선고하고 마작게임장 점장에게만 무죄를 선고 했다


화재의 원인은 도시가스 미터기인한 화재로 결론이 났지만 방화범에 의한 화재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단서와 증거가 없어서 범인은 찾지 못한 사건으로 건물소유주와 세입자에 책임으로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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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1. 19:27

일본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쿠마토리쵸 연쇄),일본 오사카 부 구마 토리정에서 17세에서 22세의 젊은 남녀들의 잇다른 연쇄 자살사건이지만 원인모를 죽음도 있기 때문에 미스테리한 미제사건이다


일본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 사건이다 의문점이 너무 많은 기묘한 사건이다


소년 A군이 자살한곳


첫번째 죽음


1992년 6월 4일 목요일 오전 3시경, 소년 A군(당시 17세)은 집 근처의 양파 오두막에서 목을 매고 자살 했다


친구2명의 이름과 10만엔, 빚을 갚고 싶어라는 메모를 제외하고는 유서가 없었다 주변사람들은 왜 그가 자살했는지 전혀모른다고 했다


17세 A군은, 중3떄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학생이였고 파칭코의 자주 출입을 했다 동급생에 따르면 친구 B군보다 거칠고 그냥 막 덤비는 스타일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용사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1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그만두고 백수[무직]생활을 했다 이후 친구 B군,C군들과 오토바이트 타고 다녔고 폭주족을 결성해 신나를 흡입 하면서 지내왔다


소년 B군이 자살한곳


두번째 죽음


1992년 6월 10일 수요일, 소년 B군(당시 18세)은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 헛간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다 B군, C군, E군 3명은 이전부터 지인이나 가족에게 "차에 쫓기고있다"고 말했다. B군은 "백색 크라운에 쫓기고있다"고

어머니에게 말을 했었고 어머니가 C군에게 물어보자 여러번 그런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E양은 친구들에게 검은 차가 쫓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18세 B군은, 건축일을 했으며 쿠마토리쵸 일대 불량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친구 A군,C군과 시작한 폭주족 조직에서 리더 였다 당신 임신시킨 여자가 있었고 결혼해서 새로운곳에서 살려고 준비중이였다

친구 A군의 장례식을 치른후 남은 친구들에게 우리 이제 제대로된 생활을 하면서 살아나가자고 격려를 했지만 그도 며칠후 자살 하게 된다


소년 C군이 자살한곳



세번째 죽음


1992년 6월17일 수요일,소년 C군(당시 18세)은 농기구 오두막에서 목을 매고 자살 했다


두손이 뒤로 묶인 채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다 옷을 깨끗했고 뒤로 묶인 방법은 혼자서도 할수 있는 방법이였고 자살을 못할까봐 일루버 뒤로 묶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손을 묶을 이유가 없다며 항의를 했다


18세 C군은, 고치현 출신으로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를 했지만 중퇴후 B군과 친하게 지내다가 건설회사에 다닌후 미에현에서 여관 종업원 일을 하다가 친구 B군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쿠마토리쵸로 돌아왔다

이후 이전 사귀던 여성 (당시 17 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 두 명의 친구를 데리고 여자를 만나러 갔다 그 여성과 만난후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에게 밧줄 있어?라고 한뒤 6시간후 자살 했다


C군도 B친구처럼 정체를 알수없는 차가 뒤쫓아왔다는 얘기를 했었다


D군이 자살한곳



네번째 죽음


1992년 6월25일 목요일,D군(당시 22세)은 동네 숲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 했다


유서가 없었고 목을 매달아 죽은 나뭇 가지의 높이가 보통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높이였다 그 높이에 혼자서 나뭇가지에 옷으로 매듭을 만들고 자살 했다는점이 이상했다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22세 D군은, 키시와다시의 직원외 뚜렷한 정보 없음


소녀 E양이 자살한곳



다섯번째 죽음


1992년 7월2일 목요일,소녀 E양(당시 19세) 과일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 했다


유서가 없었고 주택가 도로에서 과일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죽어가는채로 발견되었다 주택가 주변은 사람도 꽤 다니는곳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양은 사람이 많은 도로 한복판에서 자살을 했다

게다가 죽기전 머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매우 기뻐했고 죽어가면서 다르다 다르다 말을 계속 반복했다 


19세 E양은 돗토리 현 요나고시 출신으로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오사카 체육 대학에 진학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프트볼 선수였지만 대학 진학 후 육상선수로 전향 했다



A군 B군 C군 D군 E양의 자살 사건 이전에도 2건의 사건이 있었다


소년 X군이 자살한곳



여섯번째 죽음


1992년 4월29일 목요일, 소년 X군(당시 17세)는 신나를 흡입후 연못에 빠져 죽었다


17세 X군은 A군,B군의 중학교 후배고 Y와는 같은 학교다




7번째 죽음


1992년5월 29일 금요일,소년 Y군(당시 17세)는 신나를 흡입하고 호흡곤란으로 사망 했다


17세 Y군은 A군,B군에 속해져 있는 폭주족 이였고 셋은 쿠마토리쵸를 일대를 장악했다 


D군과 E양을 제외한 A군 B군 C군 X군 Y군들은 서로 친분이 있었고 신나와 폭주족에 관련되 있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 반경 1.2km 이내였다는것이 의문점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자살이 베르테르 효과 때문에 전염되어서 자살했던게 아니냐는 추정이 있었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야쿠자나 같은 폭주족에 의해한 타살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지만 단서나 증거가 없어서 일단락 되었다

 


출처: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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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보험금 노린 사기극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0. 11:37

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2004년 8월 17일, 경상북도 칠곡군의 한 모텔 사장의 신부 최영은(당시 22세)이 결혼한지 5개월만에 갑자기 행방불명된 사건이다

 

최영은


최영은에게 오빠 최국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남매 였다 두 남매는 어린 시절 종교에 깊게 빠진 아버지 때문에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교단체에 끌려 갔다 종교단체에 끌려온 두 남매는 교주한테 억지로 산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로인해 최씨 남매는 9년동안 받아야할 의무교육 받지 못했다 종교시설에 억지로 끌려와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에 최영은은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최국현


오빠 최국현은 동생을 말리며 성인이 되면 같이 나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응하지 않고 혼자 떠난다 이후로 두 남매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10년후 동생 최영은는(은) 오빠에게 결혼할 사람 강씨를 소개했다

하지만 최국현은 강씨를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다 동생보다 15살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성실하고 동생을 아끼는 사랑하는 모습에 둘의 결혼을 승낙 하게 되고 2004년 3월 결혼식을 올렸다


사건발생 2004년 8월17일,결혼한지 5개월만에 동생 최영은이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가출한것이라면 지갑이나 휴대폰을 들고 나갔을텐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한참 신혼 생활을 할 시기인데 갑자기 가출할리는 없고 가출을 해도 오빠 최국현에게 연락을 했을것인데연락한번 오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강씨가 운영하는 칠곡군에 있는 모텔에서 시작되었다 두 부부는 크게 싸우지 않았지만 약간의 다툼을 벌었다 가출할만큼의 큰 싸움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빠 최국현은 곧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몇달이 되어도 동생의 행방을 찾을수 없게되자 남편 강씨가 아내를 찾으러 나갔고 모텔 일은 처남 최국현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1년 ~ 2년이 되도 최영은의 행방은 찾을수 없었다


2006년 6월9일,최영은이 실종된지 2년이 지나고 최국현은 보험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그 전화는 최영은 앞으로 거액의 사망보험금이 걸려 있다는 내용이였다 보험금의 액수는 24억이였고 보험금의 수령자가 매제 강씨였다

최영은이 죽으면 강씨에게 24억이라는 많은돈을 가질수 있게 된다 순간 최국현은 동생 최영은이 단순 가출이 아니라 강씨로 인해 살해당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04년 8월17일,5년이 지나고 최영은눈 법적으로 사망 처리가 된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보험사는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고 남편 강씨는 체포 되었다

체포된 강씨는 살인죄가 아닌 보험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최영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점으로 살인죄를 면하게 된것이다


그런데 남편 강씨가 체포되자 실종되었던 최영은이 8년만에 돌아왔다?

 

2003년 최영은는 남편 강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혼인신고도 하기 전부터 보험에 가입 했다 가입한 생명보험만 총 13개로 수령금이 60억이였고 정해진 기간내에 사망해야만 보험금을 받을수 있는 정기 보험이였다


실종된 최영은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실종된지 1년이 지난 2005년 강씨가 운영하던 당구장에서 일하다가 여러 지역을 오가며 원룸과 월세방을 전전해야 했다

모텔을 운영하던 강씨는 2003년 함께 일하던 최영은이 카드 빚에 시달리는걸 알고 보험사기를 계획했다 

강씨는 보험사기를 감출려고 본처와 이혼하뒤 최씨와 혼인 신고를 한뒤 최영은 앞으로 13건의 보험에 든후 최영은을 숨기고 실종 신고를 했다 13건의 보험으로 최영은이 사망하게 되면은 60억원이라는 거액을 수령할수 있다는 생각에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5년간 최영은을 숨기고 강씨는 5천만원의 보험금을 계속 납부를 했다 2010년 5년이 지나자 최영은는 자동으로 사망처리가 되었다

사망처리가 화정되자 강씨는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 24억을 청구했다 하지만 보험사는 보험사기로 의심하고 강씨를 신고 했다 강씨가 체포된후 재판을 받자 최영은이 자진출석해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조사 결과 최영은는 8년간 사회와 격리돼 감금당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검찰은 최영은이 공범이지만 실질적 피해자에 가까운 최씨를 재판에 넘기는 대신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근로복지공단 및 여성인력개발센터와 연계해 구직 및 직업훈련 상담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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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23:32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일본 훗카이도 다이 세츠 산 아사히 다케에서 일어난 의문의 조난 사건이다 일부 해명되지 않은 점이 남아 있지만 조난자가 확인된 사건이다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사건 발생 1989 년 7 월 24 일 오후,홋카이도 구로다케 산 구로 다케에서 아사히 다케로 가는 길에 행방불명 조난자 남성 2명을 찾기 위해 훗카이도 경찰에서 헬리콥터로 수색을 했다 수색 도중 등산로에 쓰러진 나무를 쌓아 만든 SOS를 문자를 보고 2 ~ 3km 북쪽으로 향하던중 조난자 2명을 구조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2명에게 SOS 문자에 대해서 물어보자 전혀 모른다고 대답을 했고 경찰은 또 다른 조난자가 있다고 생각해 다음날 다시 헬기를 동원해 조사를 진행 했다

수색 결과, 쓰러진 나무 문자에서 30 미터의 범위에서 동물에 의해 물린 자국이있는 골반, 대퇴골, 상완골 등의 인골이 흩어져 있었고 "SOS"라고 외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 된 카세트 테이프와 테이프 레코더가 든 회색 가방을 발견 됐다


회색가방 안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 3개와 녹음기 테이프 레코더,세면 도구 천 조각2장,면허증,치약 세트등의 일회용품이 들어 있었다

유품의 소유자는 1984년 7월에 행방 불명 되었던 아이 치현 고난시의 거주하는 회사원 남성 (당시 25 세)로 결과가 나왔지만 인골을 분석한 결과 남성이 아니였다 25~35세의 키 160cm A형의 여성으로 밝혀졌고 발견 5년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다 당시 쌓아 올린 나무는 3그루 이상올려 만든것으로 문자의 한폭은 5m이상이라 성인 남성 한명도 힘들다 근데 인골은 여성의 것이였다 그렇다면 남녀 둘이 조난을 당했던걸로 추측할수 있다



수수께끼의 카세트 테이프 케이스중 하나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붙어있었고 애니메이션의 주제가가 녹음된 테이프도 있었다



①SOS 도와달라 벼랑 위에서 움직일수가 없다..를 세번 반복

②장소는 맨 처음 헬기를 봤던 그곳이다

③조릿대가 우거져있어 위로 올라갈수 없다

④여기에서 끌어 올려 달라!



남성은 헬리콥터를 언급하고 있었고 조난 절벽 위에 있는 상황에서 헬기가 날고있는것을 보고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다가 가방안에 있던 테이프 레코더(녹음기) 스위치가 우연히 눌러져 녹음이 된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또한,당시 남성은 벼랑 위에서 움직일수 없다면 SOS구조 요청을 했다

하지만 유류품과 인골이 발견된 장소 주변은 능선이였고 벼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은 벼랑이 있던 장소에서 탈출을 한후 능선 주변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육식동물에게 먹이감이 되었을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실제 SOS 문자


1984년 7월, 조난당한 남자 회사원은 연인이 있었고 같은 날 산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밝혀졌고 연인의 DNA와 인골의 DNA가 일치해 신원이 확인됐다

또한 경찰은 처음 인골이 발견된 장소 근처에 또 다른 인골과 면허증,시계를 발견했고 인골은 남자 회사원 것으로 확인 됐다 두 커플은 조난 당한후 SOS 문자를 만들고 지나가던 헬리콥터를 향해 소리를 질러지만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한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 유류품


남자 회사원의 유품을 전달했지만 유품을 받은 가족들은 두번째로 발견된 면허증과 시계는 맞지만 첫번째로 발견된 유류품은 아니라고 주장을 했다 그래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었지만 목소리가 다르다며 주장을 했다

이후, 1차 유류품과 2차 유류품의 DNA를 조사 한 결과 서로 불일치해 제3의 인물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던중 SOS 문자 근처에서 또 하나의 가방을 발견 되었다 가방 안에는 부적,만화책,카레라 삼각대,보험회사 서류 봉투 1983년에 만들어진 휴지 봉투가 있었다

DNA 조사결과 1차 유류품과 동일했고 회사원 커플이 조난당한 시점보다 1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제3의 인물의 인골을 찾을려고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1989년 8월 4일, 경찰은 현장의 상황에서 범죄 가능성은 없다 더 이상의 단서가 나오지 않는 관계로 현장 수색을 중단하기로 결정 하기로 한다


사건의 의문점이 너무 많다 회사원 커플이 같이 입산했다가 문자 근처에서 조난당해 사망한것으로 결론이 났다

SOS 구조 문자를 만든 남성은 회사원 커플이 아닌 제3의 인물이였다

그런데 SOS 구조 신호를 보낸 남성은 왜 구조문자를 만들고 구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 시간에 산을 탈출해도 남을 시간 이였다


또한, 조난당한 세사람은 왜 시간차를 두고 한 자리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묘한 사건이며 미제사건으로 남게된 SOS 조난 사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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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18:08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東電OL殺人事件),도쿄 전력 간부 직원이었던 여성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가 아파트에서 살해된 미제 사건이다 유력한 용의자로 네팔인이 범인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요코하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원뢰로 인정되 감옥에서 풀러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


사건 발생 1997년 3월19일 오후 5시,도쿄도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에있는 목조아파트 101호 방 안에서 도쿄전력의 간부급 여직원 39세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 현장 아파트


처음 시체를 발견한사람은 아파트의 관리를 맡았던 네팔 요리 가게의 점장이였다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당시 30세)는 이 아파트 옆 건물 4층에 불법 체류한 네팔인 4명과 살고 있었고 피해자가 생전에 매춘했던 상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


사인은 교살(사람을 목을 졸라 죽임)로 사망 했다 시간은 8일 자정부터 다음날 9일 새벽으로 추정 했다 1997년 5월 20일, 경찰은 살인 현장 옆 건물에 살고 있는 불법 체류자 신분과 피해자 여성 지갑에 있던 4만엔이 없어진점등을 고려해 경찰은 고빈다를 용의자로 체포 했다



-살인 현장에 남겨진 사용 된 콘돔에 피고인의 정액과 체모 발견

-피고인은 피해자와 안면이 아니라고 공판 시작 몇 달 동안은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 후 몇 번의 성교하는 정도의 사이로 이었음이 판명 거짓말이 발각 된 것.

-사건 직전에 현장 근처에서 피해자와 함께 목격 된 남성이 피고인 여부.

-현장 아파트의 열쇠를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었지만, 사건 이틀 전에 관리자가 반환하는 데 함께 투숙하는 사람이 열쇠를 전달 키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고하는 피고인의 진술의 신용성.

-교유 관계를 상세하게 증거, 사건 직전에 만난이 범죄자라고하는 피해자 수첩의 신용성.

-사건 전에 7 만엔 밖에 소지하고 있지 않은 피고인이 사건에 따라 10 만엔을 지인에게 건넨 돈의 마련.

-피고인이 근무했던 가이 힌 마쿠하리 역 근처의 음식점에서 오후 10시 폐점까지 근무하는 경우 살해 시간과되는 오후 11시 30 분 전후까지 시부야 역 부근의 현장에 도착할 것인가? 피해자의 정기권이 피고인의 토지 감이없는 토시 마구 의 민가에서 발견 된 것.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


피해자 여성은 게이오 대학 경제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도쿄 전력에 입사 한 엘리트 사원이였다 그러나 회사에 퇴근 후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 부근의 거리에서 손님을 초대하고 매춘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 졌다

도쿄 전력에 입사한 그녀는 연수입 1,000만엔으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1991년경부터 시부야 일대에서 6년간 매춘을 해왔다 그 이유로는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와 압박감과 어머니와의 갈등이였다는 추측이 있었다


아버지는 1949 년 도쿄 대학 공학부를 졸업, 도쿄 전력에 근무하고 공무 부부장시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했기 때문에 강등을 당했고 와타나베 야스코가 게이오 대학 2학년 때 52세에 암으로 사망 했다 

와타나베 야스코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린 109건물 화장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와타나베 야스코는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반원전을 주장하자 반감을 느낀 직속상관 카츠마타 츠네히사는 와타나베 야스코를 뒷조사를 한후 시부야에서 매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시부야 마루야마 쵸 일대에 있는 야쿠자에게 청부살인을 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사건 발생 당일전 피해자는 퇴근 후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시부야 109의 화장실에 들렸고 야쿠자는 뒤를 쫓아 살해를 한뒤 마루야마 쵸(渋谷区円山町)에 있는 2층 목조 아파트키쥬우소우(喜寿荘) 1층 101호실의 빈 방에 유기를 했다는 추측이 있다


사고 이전 후쿠시마 원전(事故前の福島第一原発)/카츠 마타 도쿄 전력 회장(勝俣恒久 東電会長)



도대체 와타나베 야스코를 죽인 범인은 누구였을까?  네팔인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가 였을까? 카츠마다 츠네히사의 청부살인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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