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괴담/사건사고에 해당하는 글 63

  1. 일본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 미해결 미제사건2019.03.09
  2. 일본 미제사건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북한납치설?2019.03.08
  3. 일본 미제사건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2019.03.07
  4. 일본 미제사건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2019.03.07
  5. 일본 미제사건 파일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2019.03.06
  6. 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 사건2019.03.06
  7. 일본 미제사건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2019.03.05
  8. 1998년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살해사건2019.03.05
  9. 한국 미제사건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2019.03.05
  10. 일본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판타지 호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중 사라지다2019.03.05
  11. 일본 미제사건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2019.03.04
  12. 일본 미제사건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2019.03.04
  13. 일본 미제사건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2019.03.04
  14. 일본 미제사건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2019.03.04
  15. 일본미제사건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2019.03.04
  16. 일본 미제사건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 1년동안 실행된 범인의 연쇄 협박2019.03.04
  17. 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 2년동안 사육 당하다2019.03.03
  18. 제2차 세계대전 일본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22019.03.03
  19. 14년만에 해결된 일본 여고생 살인사건2019.03.03
  20. 미스테리 일본 히로시마 일가족 실종 사건2019.03.02
  21. 미해결 미제사건 나고야 임산부 엽기 살인사건2019.03.02
  22. 미제 사건 일본 사가현 여성 연쇄살인사건2019.03.02
  23. 미제사건 일본 하치오지 슈퍼 강도살인 사건2019.03.02
  24. 일본 신주쿠 러브호텔 연쇄살인 사건 미제로 남다2019.03.02
  25. 일본 니카타 소녀 감금 사건 납치후 무려 9년5개월동안 감금한 범인2019.03.01
  26. 일본 츠보노 온천장으로 흉가체험하러간 여성2명 실종 미제사건2019.02.28
  27. 미스테리 일본 쁘띠엔젤 사건 짜여진 각본2019.02.28
  28. 1989년 일본 3대 미제 마츠오카 신야군 실종사건 미스테리로 남다2019.02.27
  29. 덴마크 잠수함에서 스웨덴 여 기자를 살인한 백만장자2019.02.27
  30. 일본 후쿠시마 정화조 죽음 의문사 미제사건2019.02.27

일본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 미해결 미제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12:01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柴又女子大生放火殺人事件),수사는 계속되고 있지만 범인은 체포 되지 않은 미해결 사건이며 수사 특별 포상금(공공 현상금 제도) 대상 사건이다

코바야시 쥰코(小林 順子(こばやし じゅんこ,당시21세)


1996년 9월 9일 오후 4시, 반경 도쿄도 카츠 시카 구 시바 3 쵸메의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에 신고로 소방대원이 출동 했다 약 2시간 후 화재를 진압후 소방대원이 자택 안을 확인해 보던중 2층에서 상지 대학교 4학년 여대생 코바야시 쥰코(小林 順子(こばやし じゅんこ,당시21세의 시신이 발견해 즉시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사망 했다


시신은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옆을 향해 누워져 상반신에 이불이 덮여 있었다 시신을 확인 해보니 입과 손에는 테이프로 부착되어 있었고 두 다리는 팬티 스타킹 묶여있었으며 목은 날카로운 칼에 6차례 찔려 과다 출혈로 죽어있었다 


사건 현장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2006년9월, 경찰은 두 다리 묶는 방법이 휘감기매듭이라는 특수한 방법,현장에 남겨진 성냥갑 안에 범인의 DNA를 발견

2015년 9월, 2층 시체에 걸려 있던 이불에 묻은 혈액에서 범인 DNA를 발견 했다 두 DNA 모두 가족 이외의 DNA로 범인것으로 확인되었다

2009년1월, 범인이 가져온 접착 테이프에는 세 종류의 개털을 확인했다 피해자의 집은 한번도 개를 키운적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키우던 개로 판단 했다 부검에 따르면, 폐에서 그을음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 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 발생 당일날 오후부터 강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아버지는 후쿠시마에 출장중이였고 준코의 언니는 직장에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쥰코 둘만 있었다

15시50분,준코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기 방에서 한층으로 내려와 미용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자전거 타고 갈거야?라고 물은 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피해자의 가족은 부모님 언니,쥰코 이렇게 4명이였다 쥰코는 명문대학 조치대학 4학년생이였고 2일후 해외 유학을 떠나려던 시기에 변을 당했다

현장의 상황이나 교우 관계 등으로 안면의 범행이라고 생각했다 범행이 준코의 해외 유학 여행 2일전 상황을 생각하면, 범인은 준코의 일정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있어 관련 조사를 해보았지만 유력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 


사건 당일 오후 4시 30분부터 40분 무렵,  20 ~ 30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우산도 쓰지 않은채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배회를 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도로에 서서 피해자의 집을 엿보고 있었다

오후 4시경,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니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40세 전후의 남자가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주부를 미행하고 집 앞에서 라이터를 만지면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3시까지 6시간동안 흰 장갑을 낀 남자가 카나 마치 공원 주변을 서성였다

사건 전날인 8일 오전 5시경, 피해자의 집 근처 게시판 부근에서 젠장 때려 죽이는거야를 외치며 군가를 부르면서 자전거로 달려온 남자

사건 당일 오후 4시경, 검은 우산을 쓰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피해자 집 근처에 서 있었다

사건 3일전, 40세 중년 남자가 남의 집 문 앞에서 라이터를 만지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오후 4시30분, 비가 많이 내리던날, 흰 장갑을 낀 20 ~30대 초반의 남자가 우산도 쓰지 않고 현장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사라졌다 



준코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쥰코 씨 스스로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있는 모습도 있었다고 2016 년에는 언론에서 새로운 증언이 공개되었지만 현재도 유력한 단서가 파악되고 있지 않다

한때 TV 프로그램의 초능력 수사로 해외에서 영매를 불러오고 영시에서 범인을 특정하려고 시도했지만 어이 없게 무산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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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북한납치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8. 21:09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야마모토 미호(山本 美保)가 자택에서 도서관에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후 행방불명된 미제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미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사실을 알고 의아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미호의 가족들


미호의 가족은 아버지,어머니,큰 아들,미호랑 쌍둥이 미사 다섯식구였지만 큰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미호마저 행방불명이되고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다


이틀 뒤인 6월6일, 미호가 타고간 미니 바이크가 고후역 앞에 놓여있었고 6월8일에는 니가타현 카시와자키 아라하마 해안가에서 손가방이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면허증과 지갑이 있었고 도난당한 물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종 반 년이 지난 4년간 미호로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오게 된다 대부분 수초만에 끊어졌지만 실종후 3년 4개월에서 6개월사이 2개월동안 2번의 전화가 걸려왔고 10~15분정도의 긴 통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만히 들고 있었다

10월18일, 몹시 서러워 흑흑 소리를 내며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미호지? 잘 있어?

미호:잘 있어(・・・げんき・・・).....

어머니:잘 있니? 잘 있어?어서 돌아와.....

갑자기 TV소리가 커진다


얼마후 전화가 끊어졌지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는 카시와자키에 갔다고 말한후 다시 전화가 끊겼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가 빨리 돌아와라고 얘기하니 끊겼다 불과 1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사가 사라진후 일각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로 보고 있다 1970년~1980년대 사이 일본에선 이유를 알수 없는 실종자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일이 많았다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이라는 사실이 알려진것은 2000년대 고이즈미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하여 북일 정상 회담을 하면서부터였다

미호 실종사건 당시 일본에서 납치라는 인식이 없었던탓에 미호의 가족들은 18년간 미호가 귀가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2002년3월,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한 하스이케 카오루부부의 납북문제 보도에서 몇번이고 카시와자키라는 지명이 나온것이다


카시와자키는 미호가 실종된 날 들고 간 손가방이 발견된 장소다 미호 가족들은 의심이 확인으로 바뀌게되었고 동생 미사는 납북 문제가 명확해진 지금 나서질 않으면 영영 미호를 만날수 없을거라 생각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자 야마나시현 경찰이 미호의 가족들의 사정을 듣고선 연락을 하게 되었다 미호의 이름을 납북 가능성이 있는 특정 실종자 조사회에 올렸다 미호 구출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는동안 부친 미츠오가 병으로타계하여 세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2004년, 야마가타현의 유사마치 해안에서 익사체가 발견이 되었다 DNA 확인결과 미호의 쌍뚱이 자매 미사와 일치했다 20년전에 발견된 시체가 미호였던 것이다

미호가 실종되고 2주후인 1984년6월21일, 일부 백골화된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와 관광객이 발견하여 신고했다 일란성 쌍뚱이 미사와 DNA가 일치해서 미호와 동일인물이라고 판명했고 자살에 의한 익사였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DNA 감정을 한것이다 야마나시현 경찰은 미호씨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있는데 1구는 DNA감정이 가능하니 감정을 하자고 2004년4월26일에 4번이나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일체 듣지 못했고 미호 시체가 2구나왔다는 말에 충격을 받게 된다 경찰 주장이 거짓말이 확실했다


또한 20년전에 발견된 시체의 DNA는 일치했지만 키,체형,복장,속옷사이즈등 당시 미호의 인상착의가 아니였다...


납북 피해자로 접수한 미호를 두고 납북당하려다가 실패한 가능성을 보고 있다 북한 공작원이었던 안명진의 말에 의하면 납치한 사람이 저항하면 심하게 구타를 한뒤 죽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미호가 그런 상황이였다면 유사마치 해안가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권혁이 1994년 북한에서 봤던 여성이 미호와 너무 닮았다고 증언했다 납북당했다면 북한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후 미호의 가족들이 남긴말 이다..


우리들은 진실이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시체가 미호가 맞다면 당장이라도 아빠와 오빠의 묘에 안치해서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체의 자료와 유류품 사진 속에 미호를 나타내는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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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7. 16:50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北海道室蘭女子高生失踪事件),고등학생 1학년 치다 아사미(千田麻未,당시16세)가 빵집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중 실종된 미제사건이다

치다 아사미(千田麻未,당시16세)


2001년 3월,아사미는 집에서 가까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3월6일이 학교 휴교일이라 오후 1시에 커피 볶는법을 배우러 간다고 점장하고 약속을 했었다

3월6일 오전 11시30분경, 아사미는 빵집 본점에 전화를 걸어 오후1시에 갈려고 합니다 점장님 계신가요?라고 여자직원과 전화 통화를 했다 여자직원은 알았다고 한뒤 아사미가 1시에 온다고 점장에게 전달했다


낮 12시가 되자 아사미는 집을 나서 편의점에 잠시 들린후 하쿠쵸다이중앙(白鳥台中央)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뒤 히가시마치 터미널(東町ターミナル)에서

12시2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이때 친구의 목격 증언에 따르면 버스에 탄후 아사미가 뒷좌석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한다



12시56분, 아사미는 빵집 근처 히가시도리(東通り) 정류장에 왔지만 내리지 않았고 히가시마치니쵸메(東町2丁目) 정류장에 내렸다 이때 시각은 오후 1시로 빵집 점장님과의 약속이였다

버스에 내린 아사미는 대형슈퍼 무로란사티(室蘭サティ)에 들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화장품 매장 카메라에 포착이 되었다 오후 1시 04분부터 1시 26분 사이였다 먼가를 살려고 온것은 아닌것 같았다 매장을 배회하면서 누구를 찾고 있거나 피해다녀다거나 했던걸로 보인다


아사미가 버스를 탄 정류장


무로란 사티를 나온 아사미는 우연히 동급생 남자 2명과 마주쳐 간단하게 인사를 한뒤 버스를 타고 빵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에 13시 41분경 하차 한것으로 밝혀졌다

1시42분,아사미는 빵집 옆 히가시도리 정류장에 도착한후, 남자친구에게 지금 아래에 도착했다고 말한후 전화를 끊고 오후1시46분 다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은 아사미는 지금 말할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걸게라고 말한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남자친구 말로는 주변이 조용해서 실내에 있는듯한 느낌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남자친구는 다시 아사미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무로란사티 화장품 매장 CCTV에 찍혔던 모습과 동급생2명이 목격된 이후로 아사미를 볼수 없었고 남자친구와의 전화통화를 했지만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점장과 마지막에 아사미가 있던곳과 빵집과의 거리


아사미가 마지막으로 통화한곳이 아르바이트하는 빵집 근처였다 당시 점장은 아사미를 기다리고 있었고 오지 않자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서 자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지만 알리바이가 없었고 마지막에 아사미가 있던곳이 빵집 근처라서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점장을 용의자로 지목을 했다


빵집 직원


점장은 아사미가 오지 않자 가게를 나갈때 아사미를 찾으러 가겠다고 직원에게 말했다고 했지만 직원은 그런말을 듣지 못했다고 증언을 했다 또한 아사미를 찾으러 갔다고 말했지만 아사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점이 수상했다


점장 건물


한편, 탐정을 자처하는 인물이 블로그에서 점장이 운영하던 점장은 건물 소유자이고 2층과 3층은 빈 임대 아파트였다 빈 아파트 어느 방에 아사미를 감금하면서 지내오다가 의심을 받자 아사미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경찰은 점장을 용의자로 의심해 집과 매장을 수색했지만 빈 임대 아파트에 방을 조사하지 않는 실수를 했고 점장이 조사받던 도중 빌려왔던 여고생 강간물을 비디오 가게에 반납한것이 이상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범인은 점장일 확률이 높다고주장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점장이 1순위 였지만 빵집 주변 상황을 보면 아닐수도 있다 빵집 뒷문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뒤편에 있는 산이 있어서 납치를 한후 시체를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토커의 납치일 가능성도 있다 아사미는 부모와 남동생까지 4인 가족으로 살았고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성적도 좋았다 얼굴도 미인이라서 팬클럽이 있을정도였다


워낙 이뻤던 탓에 다니던 학교 남학생들과 성인남자들이 따라다니거나 연락처를 받는등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동급생들과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사미를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었고 계속 전화를 걸어와 괴롭혔다고 한다 

실종 당시 아사미는 남자친구와 두번째 통화를 할때 지금 얘기 할수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걸게라는 말을 한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떄 스토커가 따라와 당황했던 아사미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할려고 했는데 스토커의 방해로 전화를 끊게 되었고 스토커는 곧바로 아사미를 납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목격자도 없고 단서도 없어서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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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7. 08:57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愛知豊明母子4人殺人放火事件),일본 아이치현 토요아케시의 주택에 어떤 한 남성이 침입하여 4명의 모자를 살해하고 방화한후 도주한 미제 사건이다

사건발생 2004년9월9일 새벽 4시25분경, 인근 주민에 신고를 받고 119가 도착해 불을 진화 했다 피해자는 아내 카토 리요(加藤利代,당시 38세), 장남 유우키(佑基, 당시 15세), 장녀 리나(里奈, 당시 13세), 차남 쇼고(正悟, 당시 9세)였으며 아버지는 늦게 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없었던 이유로 살인을 면할수 있었다 전날 남편 카토 히로토(加藤博人)은 오후 11시경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을때는 평상시 처럼 아무일도 없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오전 4시 5분경, 집 근처에 사는 형에게 자택에 불이 났다는 얘기를 들은 남편 카토 히로토는 직장 동료에게 사정을 얘기한후 집으로 달려갔으나 자택은 모두 타있었고 연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카토 히로토는 소방대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다 숨을 거둔 상태였다


등유는 네 모자 시체 외에도 곳곳에 뿌려져 있었고 성냥개비와 등유가 묻은 신문지가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집에는 원래 등유가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가져 올것으로 확인 되었다 아이 치현 경찰(愛知県警察)은 처음에는 일반 화재로 생각했었지만 실내 등유를 뿌린 흔적과 시신에 손상의 흔적을 본후 살인 방화 사건으로 수사를 전환하고 특별 수사 본부를 만들게 된다



범인의 침입 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현관과 부엌 문(부엌 및 목욕탕 앞 통로에 연결)외에 1층의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2층 방 창문이 방충망이었기 때문에 들어오는것이 가능했지만 2층에 올라간 범인의 흔적이 없었다

남편 히로토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심야에 귀가했을 때는 뒷문 옆에 숨겨놓았던 만능 열쇠로 출입하고 있었다 근데 사건 당일은 주차장의 소정의 장소 (창고)에 뒷문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아내와 장녀는 잭 나이프로 얼굴과 다른 부위 수십곳을 찔린 상처가 있었으며 장남과 차남은 칼에 찔린 상처가 없는걸로 보아 둔기 같은것으로 맞았던 걸로 판단 했다 또한 저항에 흔적이 없는걸 보아 네 모자가 자고 있을때 벌어진것 보였다 당시 네 모자는 범인의 방화 후에도 어느 정도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현장에는 범인의 혈액 흔적이 없었다 범인은 네 모자를 살해 한뒤 입고 있던 옷 등을 현장에서 함께 소각했을 가능성이있다


오전 4시경 이웃 주민이 여성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범행은 30 분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살인과 방화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 소방 작업을 하던 소방대원과 근처의 주민이 현장 근처에서 수상한 승합차를 목격했는데 30~40대 가량의 남성이 운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였다 2003년 7월 하순 오후 8시반, 누군가가 피해자 집의 현관 문을 억지로 열려고 했으며 2004년에는 피해자 집을 둘러보는 수상한자를 봤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네모자 살인사건이 잊혀질 무렵, 2005년 3월 11일,남편 카토 히로토가 전 직장의 회사에서 약 520 만엔을 컴퓨터 구입비로 횡령한 사기혐의로 체포되었고 다른 회사에서 약 5500만엔의 약속 어음을 가로 챈으로 사기 혐의로 재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카토 히로토는 사기죄로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을 받고 복역중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남편 카토 히로토가 네 모자를 죽인 범인이 아니냐는 추론이 있었다 카토 히로토(당시 45 세)는 대기업 자동차 메이커의 자회사 자동차 부품 회사 근무하면서 고급 클럽에 자주 다니는 등 씀씀이가 심했고 애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사기 혐의로 체포될 당시 경찰은 네 모자 살인사건에 용의자로 지목을 하고 수사를 했었다 이 과정에서 카토 히로토에 애인과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증거는 없지만 카토 히로토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증언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고백했다고 추정을 했다 이에 카토 히로토는 사기혐의는 인정했지만 네모자 방화사건은 억울하다며 완전히 부정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 카토 히로토였지만 알리바이가 확실해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청부살인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건발생 1년전부터 피해자의 집을 배회하는 수상한자가 2번이나 목격되었다 도둑이라면 굳이 같은 집을 2번이상 훝어볼 필요가 없었다 다른집도 많은데 굳이 피해자 집을 여러번 훝어봤던것일까?  살인을 계획한 청부살인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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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파일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6. 17:13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江東区亀戸漫画家女性殺人事件), 2000 년 9 월 29 일 일본 도쿄도 고토 구 카메이 여섯 쵸메 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며 범인이 검거 되지 않은 미해결 미제사건 이다



2000 년 9 월 29 일 오후 1 시경, 센서스 조사원이 도쿄도 고토 구 가메이도 6 초메 카메이 그린 아파트 604 호실에있는 만화가 요시다 요코 씨댁을 방문했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벨을 눌러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볼려고 했지만 악취가 심하게 나섰던 이유로 센서스 조사원은 관리인에게 통보 하게 된다 관리인과 같이 들어가 안을 확인해보니 목이 졸라 죽어있는 요시다 요코(吉田陽子,당시 28세)의 시체를 보게 된다


요시다 요코(吉田陽子)가 살았던 아프트


당시 요시다 요코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아래는 벌거벗은 몸으로 얼굴에 흰 천을 덮어진채로 침대에서 부패되고 있었다 집안을 수색해보니 9월18일, 날짜로된편의점 영수증이 나왔다 영수증의 날짜와 시신의 부패를 대조해보니 약 19일이상 경과한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건 때 요시다 요코는 침대위에서 누군가 목을 졸라 살해를 당했고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집 안은 어질러져있지 않았고 방에 있던 현금 300만원이있었지만 그대로 있는걸로 보아 원한 관계로 인한 범행으로 추정했다


요시다 요코는 동인지로 유명한 아마추어 만화 작가였다 고등학교때부터 만화를 그렸고 동인지를 발행하는등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후 독립한 요시다 요코는 10년동안 혼자 생활하면서 꾸준히 만화를 그려왔다 

소질과 노력으로 인해 그녀는 20살에 이미 연수입이 1,000만엔을 벌만큼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부터가 유흥 업소에 근무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화를 그려서 충분히 돈을 벌면서 생활을 할수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유흥업소 일을 하면서 만화를 그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는 친정에 돌아와 부모와 동거 할 예정이였던 요시다 요코였다



시신은 19일되어서야 발견이 되어서 범인의 흔적과 단서를 찾을수 없어서 사건은 난항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아사히 TV 어떤 방송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을때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요시다 요코의 친구가 말하길 열성팬에게 스토커를 당하고 있었고, 읽지 않아도 되니 가지고 니가갖고있어 난중에 열어봐도대! 라는 얘기였다


편지에는 스토커 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고 그 팬이 나를 죽일것 같다는 내용이였다


하지만 이 편지와 증인내용은 가짜였다 필체로 거짓말이 들통난 요시다 요코의 친구는 처음엔 부정하다가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했다 왜 이런짓을 했냐고 물어봤더니 인기 작가인 그녀가 부러워 질투했다는 이유다


범인 몽타주


그리고 방송에서는 영국의 군사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스 로빈슨이 초능력으로 범인의 몽타주가 작성되었지만 범인의 몽타주로 사건을 해결하기에는 미흡했다


요시다 요코 생전 모습 사진


범인은 누구였을까? 열성팬? 요시다 요코의 친구? 청부살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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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6. 12:23

911테러 사건(September 11 attacks),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 다발적 항공기를 납치 하고 미국 뉴욕 맨해튼,세계무역센터,워싱턴 펜타곤 건물에 자폭 테러한 사건이다


미국 911테러 사건


911테러 사건으로 테러범 포함, 2,996명의 사망자와 6,261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 한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테러범은 모두 사망하였고 워싱턴 국방부에서는 실종된 사람이 125명, 세계무역센터 2,500명이상, 뉴욕 소방관,경찰관,경찰견,응급사등 412 순직하게 된다 미국 전역은 하루만에 동시다발적 테러사건으로 비상사태에 빠지게 된다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2001년 9월 11일, 오전 7시59분,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11명의 승무원과 76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모하메드 아타(Mohamed Atta) - 당시 33세, AA 11편의 납치 행동대장, 이집트 국적. 마르완 알 셰히의 사촌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Abdulaziz al-Omar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와일 알 셰리(Wail al-Shehri)[6] - 당시 28세, 사우디아라비아, 왈리드 알 셰리의 형

왈리드 알 셰리(Waleed al-Shehri) - 당시 23세, 사우디아라비아, 와일 알 셰리의 동생

사탐 알 수콰미(Satam al-Suqami) - 당시 25세, 사우디아라비아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8시14분,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9명의 승무원과 51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마르완 알 셰히(Marwan al-Shehhi) - 당시 23세, 아랍 에미리트 국적, UA 175편의 납치 행동대장. 모하메드 아타의 사촌

파예즈 바니하메드(Fayez Banihamed) - 당시 24세, 아랍 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중국적

모한드 알 셰리(Mohand al-Shehr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함자 알 감디(Hamza al- Ghamdi) - 당시 20세, 사우디아라비아아메드 알 감디의 동생

아메드 알 감디(Ahmed al-Ghamd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함자 알 감디의 형


아메리칸 항공 77편(aa77)



8시20분,아메리칸 항공 77편(aa77), 6명의 승무원과 53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하니 한주르(Hani Hanjour) - 당시 29세,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AA 77편의 납치 행동대장

칼리드 알 미드하르(Khalid al-Mihdhar) - 당시 26세, 사우디아라비아

마제드 모퀘드(Majed Moqed) - 당시 24세, 사우디아라비아

나와프 알 하즈미(Nawaf al-Hazmi) - 당시 25세,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살렘 알 하즈미의 형

살렘 알 하즈미(Salem al-Hazmi) - 당시 19세[9],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나와프 알 하즈미의 동생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8시42분,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7명의 승무원과 33명의 승객 = 4명의 테러범 탑승


지아드 자라(Ziad Samir Jarrah) - 당시 26세, 레바논 국적, UA 93편의 납치 행동대장.

아메드 알 나미(Ahmed al-Nami) - 당시 24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이드 알 감디(Saeed al Ghamdi) - 당시 21세, 사우디아라비아

아메드 알 하즈나위(Ahmed al-Haznawi) - 당시 20세, 사우디아라비아


첫번째 테러



보스턴 관제소에서는 이륙한지 15분이 지난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과 교신을 시도하지만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후 우리는 비행기들을 납치했다 가만히 있으면 무사할것이다 지금 공항으로 회항하고 있다는 교신을 듣게 된다

관제사는 곧바로 연방 항공국과 공군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납치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였고 큰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런데 aa11편의 사무장이었던 베티 옹이 기내 전화로 비행기의 납치 사실을 알리게 된다 잠시 후 aa11편은 뉴욕 상공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베티 웅의 전화도 끊기게 된다


8시46분, 11명의 승무원과 76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아메리칸 항공 11펀(aa11)이 시속 790km의 속도로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제1 세계 무역 센터)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고 항공기는 폭발되지 않은채 건물에 박혔다


이때 까지만해도 언론사와 사람들은 조종사의 조종 실수로 충돌한것으로 추측을 했었다...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 충돌 동영상 : 링크


두번째 테러



9시5분, 9명의 승무원과 51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이 잠시 동안 교신이 끊긴후 불규칙하게 비행하고 있는것을 뉴욕 관제소에서 포착을 하였고 항로를 벗어나 뉴욕 상공으로 들어와 금방이라도 추락할듯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시속 950km의 속도로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제2 세계 무역 센터) 77층과 85층 사이에 충돌하였다


2번째 테러가 일어난후 사람들은 비로소 단순 사고가 아닌 미국에 대한 테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남쪽 타워 중저층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건지 모르고 있었다 방송실에서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기 때문이다 잠시후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이 충돌된후 대피를 하라는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난중에 알고보니 비행기가 충돌한 곳이 방송실이였던 것이다

폭발 열기와 유독 가스로 인해 수백명의 사람들은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려 죽어가는 광경이 포착된다 9시59분, 약 56분만에 남쪽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같은 시간대 부시 대통령은 앤드류 키드 보좌관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고 보고를 들었지만 태평하게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7분이 지나고 초등학교 교실을 떠났다 사건 당시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바로 초등학교를 떠났다고 과장해서 논란을 빚어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 충돌 동영상 : 링크


세번째 테러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2번째 테러를 당한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테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미국 상공에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중에 납치된 항공기를 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교신이 안되는 비행기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비행기의 이륙을 금지시켰고 고층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다

만일을 대비한 공군은 전투기의 출격을 준비하였고 백안관,국회의사당,워싱턴DC와 뉴욕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다 2번째 테러이후 만만의 준비를 했지만 계획된 테러범들을 이길수 없었다  9시37분, 6명의 승무원과 53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아메리칸 항공 77편(aa77)이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하여 들어가 큰 화재가 발생했다


메리칸 항공 77편(aa77)국방부 건물 펜타곤 충돌 동영상: 링크


네번째 테러 실패


10시3분, 7명의 승무원과 33명의 승객 = 4명의 테러범 탑승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129km 떨어진 곳에 추락하였다

정황상 워싱턴 DC의 미국 구회의사당이나 백안관을 목표로 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이 추락한 이유는 조종석에서 항공납치범들과 승객들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저항으로 추가 테러를 막을수 있었지만 추락후 탑승객 전원은 사망 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추락 동영상:링크


테러후 모습



911 테러 세계무역센터 충돌 동영상:링크 / 링크2


2004년 10월, 오사마 빈라덴이 인터넷을 통해서 왜 911테러를 계획했는지 밝혔다 1982년도에 미국 제6함대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도와서 대규모로 공격을 했던 사건이 원인이라고 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각종 첨단장비와 5천달러의 현상금까지 걸고 오사마 빈 라덴을 잡으려고 아프가니스탄가서 전쟁을 했으나 오사마 빈라덴을 잡지 못했다

2011년 5월 2일,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의 위치를 확보했다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있던곳은 아보타바드 호화 주택가에 위치한 안전가옥이었다

2011년 5월 2일, 밤 01시00분 미국 특수부대 DEVGRU 25명은 헬리콥터 4대에 탑승한후 오사마 빈라덴의 안전 가옥을 기습 공격했다 오사마 빈라덴의 조직원들은 로켓탄과 소총으로 저항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일이라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모두 사살되었고 빈라덴은 침실에서 사살되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감행할수 있었던것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sm]의 도움이 컸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빈라덴과 모하메드는 미국에게 복수할 비장의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훈련된 조종사를 이용해 비행기를 납치하고 미국의 시설물들을 공격하자는 계획이였다


10대의 항공기 납치, 국방부,CIA,FBI,세계무역센터,주요 시설등에 자폭 테러[충돌], 마지막 비행기는 직접 조종해 적당한 곳에 착륙한뒤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난하는 발표하고 남자 승객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만 풀어준다



오사마 빈라덴은 4명의 테러리스트들을 독일로 보내 미국의 비행 학교 등록을 시켜 훈련을 시켰다 이후 2001년, LA에 도착을 한 테러리스트들은 계획대로 비행기를 납치를 해 911테러를 일으킨다


911테러 이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파키스탄에 잠적했다 CIA에게 체포된 테러리스트의 자백으로 그의 위치가 발각되어 2003년 3월1일 체포되었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미국 영공에 떠 있는 수만대의 비행기다 모든 비행기를 통제하고 감시했지만 철처히 계획된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를 막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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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9:53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1998년 4월6일,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서 살던 나카무라 미나코(中村三奈子,Megumi Yokota,당시 18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 학원을 등록하러 가던중 실종된 미제사건 이다


나카무라 미나코



가족들이 집에 와보니 미나코에게 대입 학원 등록비로 주기로 한 돈 50만엔중 3만엔을 빌려간다고 메모를 남겼지만 학원에 가지 않았고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수사중 미나코가 실종되기 9일 전인 3월25일 미나코의 이름으로 여권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급된 여권은 실종되기 4일전인 4월3일 발급 되었다

당시 가족들은 미나코의 여권 발급 사실조차 몰랐으며 여행을 갈려고 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한점은 집 근처 나가오카시에서도 여권발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미나코는 니가타시까지 가서 여권을 발급했다는점이다

사건 당일 미나코는 여행을 갈려는 옷차림도 아니었고 평상복을 입고 짐도 없이 집을 나섰고 자주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두고 간점을 빼고 이상한점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실종 다음날인 4월7일, 미나코는 니가타 공항을 통해 서울로 갔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다 미나코의 이름으로 나가오카 여행사 서울[김포]행 대한항공 티켓을 예매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여행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중년 나이 정도의 여성이 미나코의 이름을 사칭하고 서울행 항공티켓을 예매를 의뢰 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성은 일본에 자주 왔는지 익숙해 보였고 숙소 예약은 필요 없다며 왕복이 아닌 편도 항공권을 원했다

집을 나간 당시의 복장 (모자와 후드) 나카무라 미나코


또한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중년 여성이였다 하지만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의 당시 복장은 남색 후드 같은 감색 청바지, 파란색 체크 모자를 썼었다


항공티켓을 받은 중년의 여성은 사람을 찾고있는 모습이였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탑승구로 향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또 있었거나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에게 직접 항공티켓을 예매하라고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고할 염려가 있어 사칭까지 하면서 까지 항공티켓을 예매를 했던 것이다


4월7일, 서울로 출국해 도착했지만 중년 여성과 나카무라 미나코의 행방은 찿을수 없었다

가족들의 의하면 미나코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혼자서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자체가 말도 안된다며 증언을 했다


미나코의 실종은 제3자의 개입이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미나코에게 접근했고 왜 한국으로 데리고 가는지가 의문점이다


미나코 어머니 나카무라


현재 미나코 어머니 나카무라는 지금도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한국에 자주 온다고 한다

39세의 나카무라 미나코


한국 경찰이 과거의 얼굴 사진 등을 합성 하고 39 세가 된 현재의 얼굴의 이미지를 제작 한 것으로 22 일 확인됐다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는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충동적으로 가출을 한것일까? 아니면 협박과 위협으로 인해 어디로 강제로 끌려간것일까? 나카무라 미나코의 실종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의문점을 많이 남게한 사건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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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살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6:04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사건,울산광역시 김용민(당시 12세)는 살충제가 들은 요구르트 먹고 22일 새벽 혼수상태에 빠진후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발생 1998년7월19일, 뱃일을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 김영세(당시 49세)는 햄버거를 사 달라는 아들 김용민(당시 12세)를 위해 백화점으로 가게 된다


김용민은 6살때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를 절둑거리게 되어 걸어서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2km되는 먼 거리를 걸어 백화점에 도착해 음료수 코너에서 딸기맛 요구르트 3개를 사서 스낵 코너로 갔다

샌드위치를 산뒤 요구르트와 먹던 김용민은 요구르트 맛이 이상하다며 말한뒤 이상 증세를 보였다 곧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고 7월 22일 새벽 1시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울산 지역은 언제 어디서 다시 나올지 모르는 독극물 요구르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에 경찰은 우유팩에 바늘 자국등 외부에서 주입된 흔적이 있나 찾아봤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요쿠르트 제조 과정에 다른 이물질을 넣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 최종적으로 요구르트를 아들에게 준 아버지 김영세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했다

하지만 김영세는 참고인 조사후 이미 잠적한 뒤라서 그를 조사할수 없었다



이후 김영세의 행적을 추적하던중 시골 아주 깊숙한 곳에 은둔해 살면서 도인 행세를 하고 있는것을 포착 했지만 잡질 못했다 



사건 당시 김영세는 아들의 사달라고해서 요구르트를 구매했다고 진술했으나 CCTV 확인결과 김영세(본인)이 직접 구매 한걸로 포착이 되었다

수 차례 동일 백화점에서 같은 요구르트를 구입했고 요구르트에 독극물이 들어있다고 백화점에 항의한것이 의문을 남겼다



그리고 김영세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김용민이 6살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보험금을 수령했지만 다리를 고쳐주지 않고 도박판에서 전부 탕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1년동안 뱃일을 하지 않았다 김영세가 탔던 배의 선장한테 물어보니 단 8일 동안만 일을 했고 뱃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며 그만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김영세에게 요쿠르트를 팔았던 백화점 직원들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된다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데도 백화점에 항의만 하고 있는것이 이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웃으면서 병원을 나왔다는점과 식품을 먹고 탈이 나면 보통 식중독을 먼저 의심하는데 독극물 타령을 하는 김영세를 보고 수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에 경찰은 김영세를 다시 조사하기 위해 장례식이 끝난후 경찰서로 출석할것은 요구했지만 아들 김용민의 발인날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면 장례식장을 나간뒤 사라졌다


김영세가 잠적후 잊혀져 버리나 했는데, 김영세가 행방불명된 후 2000년 공소 중지되었으나 2013년 6월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제조사에서 제조 과정에서 독극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공소시효를 하루 앞둔 2013년 7월 17일 재차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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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제사건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4:52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인천 부평구 십정동에서 집 주인 김씨(당시 56세),부인 임씨(당시 53세)가 피살된 채로 발견된다 두 사람 모두 칼로 전신을 난자당한채로 살해당했으며 적금 통장이 사라진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범인은 추적했지만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2006년 11월 16일, 오전 7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한 주택, 1층에 사는 세입자가 죽은 집주인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집주인 김씨는 8군데 자창이 발견되었고 아내 임씨는 37군데나 칼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시신 옆에는 피 묻은 비옷과 신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김씨 부부를 발견한 세입자는 그 날 새벽 2층에서 전화벨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상한 느낌에 아침에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김씨 부부가 숨져 있었다고 진술 했다

방안 서랍은 열려 있었고 누군가 뒤진 흔적이 있었지만 패물과 현금은 모두 그대로 있었고 없어진 것은 부엌 찬장에 있던 1억원의 적금 통장이였다


김씨는 건축업을 했었고 임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빚이 없었고 이웃과의 관계로 원만 했다 당시 범인은 현관문을 따고 들어오지 않았고 담을 넘지도 않은걸로 보아 김씨부부가 문을 열어준 상태에서 집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김씨와 범인은 평소 알던 사이나 무슨 일때문에 잠시 들렸다는 것이다 김씨 주변 인물을 조사했으나 용의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유력한 단서로 현장에 피 묻은 비옷이 있었다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 범인은 피 묻은 비옷을 버리고 간것일까?

사건 당일날은 비나 눈이 오지 않아 옷에 피가 튀는 걸 막기 위해 입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씨 부부는 당시 범인에게 칼로 공격을 당하면서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항을 했으면 다른 부위에 상처가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이에 경찰은 범인이 수십 차례 칼로 찌르는것으로 보아 원한 관계에 인한 살인으로 추측을 했다

 

범인은 현장에 머리카락,지문을 남겨놓지 않았는데 족적과 피 묻은 비옷을 남겨놓았다 왜 남기고 갔는지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였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가족들에 대한 수사도 벌였다 김씨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의대생,차남은 수의대생이였고 같이 살지 않았다 의심쩍어으나 가족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혐의를 벗었다


이후 경찰은 모든 계좌와 가입한 보험등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만 돈을 빼간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원한 관계로 결론을 지게 됬다


경찰은 김씨 부부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60여명의 형사를 투입해 1,500여명의 인원을 조사했지만 수사를 진행 했지만 추가적인 단서와 흔적을 못 찼은채 수사를 종결하게 되는 미제사건으로 남게된다



한편으로는 영화 공공의적 모방 범죄로 보고 있다 1억원의 통장을 가져갔지만 돈을 빼간 흔적도 없었고 두 아들과 1,500여명의 주변 인물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범인은 영화 공공의적를 보고난뒤 이유없이 묻지마 살인을 했을거라고 추측을 했지만 신빙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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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판타지 호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중 사라지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1:45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가 자신이 만든 박스에 풍선을 매달고 태평양 횡단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미제사건이다

1940년,도쿄도에서 피아노 조율사 일가에 태어나서 국립 음악 대학 부속 고등학교 를 졸업 후 야마하 계약 직원으로 도쿄도 고가네이시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을 한후 44 살 때 음악 교재 판매 회사 뮤직 앙상블을 창업하여 피아노를위한 마이너스 원 테이프 (오케스트라 에서 특정 악기를 분리하여 녹음 한 연습용 가라오케 음악 테이프)의 판매를 시작하지만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86년,긴자에서 음악 살롱앙상블을 개점에 실패후 마작 게임장과 커피살롱,펍 레스토랑등을 운영하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다 1990년 4억 ~ 5억엔의 빚을 지고 파산해 빚에 쫓기게 된다


풍선아저씨 '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


어느 날 그는 비닐 풍선 26 개를 붙인 곤돌라 ( 비행선 )을 만들어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해 빚을 갚겠다며 채권자들에게 말을 했다..


1989년 3월 25일,요코하마시에서 개최된 요코하마 박람회 세입자 출점을 해서 거액의 돈을 빚지고 판타지호를 출품하게 된다 하지만 회장 내 전시 위치도 좋지않았고 박람회 자체도 흥하지 않자 관광객 유치로 데즈카 오사무가 디자인한 요코하마 박람회의 마스코트 부루아짱 인형을 만들어 촬영,사인회를 실시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에 흥하지 않자 불만은 품은 스즈키는7월30일 새벽 4시부터 7시 동안 열주에 부루아 짱 인형을 입고 높이 30미터의 철탑을 기어올라 농성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박람회 관계자는 119에 신고를 했고 구조 대원이 사다리 차량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설득하지만 스즈키는 아니아니 포즈를 하는등 거부 한후 1시간 가까이 철탑 위를 배회했다


박람회 협회 측에서 1 일 10 만명의 관람객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3 만 ~ 4 만명으로 드러나고 흥하자 않자 스즈키는 10 월의 폐막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 요코하마 박람회 협회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거에 대해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4월 17일,에는 풍선으로 날아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후츄 경찰서 방범과의 경찰관 의 제지를 듣지 않고 도쿄도 후추시 의 타마가와 하천 부지 에서 치바현 의 구주 쿠리 바닷가 를 목표로하고 오후 12시 45 분에 헬륨 풍선으로 날아 올랐지만 자신이 앉은 의자에 5 미터와 2.5 미터의 풍선 각 2 개를 직접 묶어 달고 추 15kg의 모래 주머니 2 개가 밖에 급상승 약속 고도 400 미터 5600 미터 고도에 도달하자 라이터 불로 구워 5 미터의 풍선이 분리를 하게 된다

이 후 고도가 낮아져 오후 1시 40 분경에 출발 지점에서 24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도 오타구 大森西 일곱 쵸메의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했다. 


불시착으로 왼손에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사과한뒤 성공하면 다음은 하와이를 목표로 예정이며 재차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첫 비행 후, 스즈키는 NHK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을 하게 되었고 풍성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92 년 11 월 23 일 당시 52 세였던 스즈키는 헬륨 이 들어간 풍선 을 다수 붙인 곤돌라 " 판타지 호 "시험 비행을 비와코 호반에서 실시했다.

반년이 지난 1992년11월23일,도시샤대학 교수 미와 시게오(三輪茂雄)와 학생 7명,수많은 취재진들이 모인가운데 스즈키는 헬륨 풍성 여러개를 단 판타지 호의 시험 비행을 시작했다 


이날 명목은 어디 까지나 200 미터 또는 300 미터 상승 실험 것이었다 교통부 (현 국토 교통성 )는 안전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에 비행 허가 신청을 수리하지 않고, 어디 까지나 지상에 계류되어있는 시험 비행하는 조건으로 수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만약 태평양 횡단을 결행 한 후 언론이 호들갑 집으로 몰려 오는 것 같다"고 가족 호텔에 숙박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하고 있으며, 스즈키는 비밀리에 미국까지 비행을 강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시 20 분경 스즈키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뒤 주위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진채 로프를 풀고 비와호 호수에서 미국 네바다준 샌드 마운틴을 향해 출발했다

미와 교수는 어디로 가는 건지?라고 물어보자 미국이예요 제트 기류를 타면 40시간 내에 미국에 도착할거라는 대답을 남기고 떠났다


호텔에있는 가족에게 밤10시부터 휴대 전화로 1시간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해가 아름답다,괜찮다등을 연락을 한후 다음날 아침 6시 아내에게 '갈 곳까지 갈테니 갈까 걱정하지 네!"마지막 전화되었다. 이후 휴대 전화는 불통되었다



24일 자정부터 SOS 신호가 발신되고, 25 일 8시 30 분 해상 수색기가 출동해 미야기 현 긴카 산 앞바다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해상에 "판타지 호"를 발견하게 된다 스즈키는 수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괜찮다면서 SOS신호를 중지했다 이후 3시간동안 2,500m ~ 4,000m 상공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판타지 호가 구름속으로 사라지게되자 수색기는 스즈키의 추적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판타지 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였다...


이케다 마나부는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에서 "생존은 어려울 것"라고 대답하고있다 판타지 호의 비닐 풍선의 소재가 염화 비닐 라면 하루에 약 10 %의 비율로 가스가 공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래 못버티고 바다에 빠져 사망했을거라는 예상했다


마지막으로 판타지 호가 목격 된 때 판타지 호는 긴카 산 앞바다 800km로 고도 2500m 시속 70km에서 북동쪽으로 향하고있어 기상청 간부도 항공 평론가 아오키謙知 도 함께 러시아 캄차카 반도 근처까지 도달 한 이 아닐까 추측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1994년까지는 호적상에는 살아있는것으로 되었으나 일본 민법상 실종 후 7년이 경과되면 자동으로 사망처리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사망한 상태다



남겨진 아내는 회사의 동업자이며 집이 저당에 들어 있고 빚은 남겨진 아내가 계속 지불하고있었다 (2006 년)이후 아내는 이혼 절차를 혼자한뒤 2016년에 재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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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20:25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 일본 도쿄의 도쿄역에서 신원을 알수 없는 70대 여성의 변사체가 노란 여행가방에 담겨 물품보관함에서 발견된 사건으로 범인은 커녕 시체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못한 미제사건이다


2015년4월26일, 오전 9시40분경 일본 도쿄역 물품보관함을 관리하는 직원이 물품보관함에서 노란 여행가방을 발견하고는 분신물로 간주해 역무실에 맡기게 된다

전날인 4월25일, 오전 9시경 보관함을 점검했을때 문제의 여행가방은 없었다고 한다




사건발생 한달후 2015년 5월31일, 일본 도쿄의 도쿄역, 보관기간이 지났는데 찾아가지 않자 직원은 역무원 입회 하에 노란 가방을 발견 하고선 열었는데 안에는 70대 여성의 시체가 담겨져 있었다

변사체의 여성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외상은 없었다 변사체는 반으로 나눠져 있었고 부패가 진행중이였다


역에는 다수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에 범인을 찾을거라 기대했지만 1개월이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기능때문에 범인을 찾을수 없었다


부검을 하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여러 사실을 알아낼수 있었다



나이는 70세 이상,키 140cm, 마른체형에 굽은 허리를 했고 이마에 5mm 돌출, 치아는 없어서 틀니를 착용했다 머리카락은 백발,손가락은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인상착의는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었다 


일본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할수 없어 난항을 겪었다


사건은 2017년까지 이어졌고 일본 경찰은 도쿄역 일대에 시민들을 상대로 변사체의 몽타주 전단지를 돌렸지만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일각에서는 장례비가 없거나 노령 연금을 받을 목적으로 부모가 죽은뒤 시신을 방치하거나 암매장 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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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7:09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北関東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1979년 일본 이래 토치기현과 군마현을 줌심으로 벌어진 의문의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 사건이다 1979년 토치기현과 군마현 일대 두 현의 경계에 해당되는 반경 20km 일대에서 4명의 여자 어린이가 살해되고 1명은 실종되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첫번째 사건-1979년 8월3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살던 5살 여자 어린이가 자신의 집 근처 야쿠모 신사의 경내에서 놀다가 실종된후 8월9일 등산가방에 담기 전라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담았던 등산 가방은 특수 사양의 한정 판매된 물건이라 범인을 잡을거라 생각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두번째 사건-1984년 11월17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의 5살 여자 어린이가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되고 2년후인 1986년3월8일 집에서 1.7km 떨어진 장소에서 백골이 된채로 발견되었다


세번째 사건-1987년9월15일,군마현 닛타군 오지마마치의 초등학교 2학년 여자어린이(당시8살)가 새끼 고양이를 안고 집 근처 오지마 공원에 놀러 나갔다가 실종되고 1년후인 1988년11월27일, 토네가와 하천부지에서 백골이된 사체 일부는 발견하게 된다


네번째 사건-1992년5월12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살던 4살 여자 어린이가 파칭코 가게 근처에서 실종된후 5월13일 와타라세강 근처에서 등산가방에 담긴 전라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DNA 조사로 스가야 토시카즈가 범인으로 체포되지만 경찰의 판단착오로 인한 누명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누명을 벗을수 있던 이유는 니혼 TV의 시미즈 키요시의 보도 에 하천부지에서 피해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 걷고 있던 다른 범인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다섯번째 사건-1996년7월7일, 군마현 오타시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4살 여자 어린이가 실종되었다 2,4번째 사건처럼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되었다 

동일범으로 추측한 경찰은 파칭코 가게의 CCTV를 확인한 결과 아시카가 사건에서 목격된 범인과 용모가 흡사한 남자가 찍혔다고 한다


납치 살해된 여자 어린이들의 나이는 4~8세,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 하천부지에 시체를 유기, 주말에 사건이 발생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동일범으로 추정을 했다


범인은 소아성도착증 혹은 아동성도착증[성도착증] 성향을 가지 남성으로 군마현 오타시와 토치기현 아시카가시 일대에서 휴일날 범행을 저지른것으로 보아 그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일 가능성을 제기 했다


용의자 사진


CCTV에서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의 몽타주가 나왔지만 희미하게 보여 범인을 찾기에는 무리였다 

유일한 범인의 단서였지만 끝내 범인은 못잡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cctv에 찍힌 범인 동영상: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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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6:21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嵐真由美さん失踪事件)은 1994년 9월2일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갔던 아리시 마유미(嵐真由美, 당시 27세)는 친구를 만나겠다며 외출을 한뒤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라시 마유미


3개월된 딸을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진 마유미의 실종...


언니 요코


[언니 인 요코 씨의 증언]


실종 당일 마유미는 이해할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다 친구와 만난다고 언니에게 말하고 나갔다 실종 다음날 마유미의 언니 요코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니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외출전 마유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실종 당일날밤 지인 남성에게 수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언니의 옷장에서 지인남성과 사귀고 싶었지만 배신했다 미안이라는 마유미의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언니는 지인 남성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실종된 당일 오전에 마뮤미와 만났고 내가 마유미를 죽였다면 감옥에서 속죄해야죠?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수상하게 여긴 언니는 심부름 센터에 가서 지인남성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의뢰를 하게 된다 조사 결과 지인남성은 사건이 일어난 1년후인 1995년3월9일 캔 주스 2개를 들고 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게되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이후 경찰이 산속을 수색했지만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2011년10월13일 TV 아사히의 "슈퍼 J채널 추적! 진실의 행방에서 마유미 실종사건을 다루게 된다 마유미 실종 당시 언니는 자신의 옷장에서 여동생의 메모를 발견했고 메모에는 마유미와 지인남성과 불륜을 하고 있었고 지인남성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는 인터뷰를 하게 된다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요코의 인터뷰가 끝나고 바로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코의 이야기는 믿지 말아라

메모를 걸어두었다 말로 하면은 딸 요코가 들을까봐 메모로 적어둔것 같다..


마유미 실종 당시 아버지는 요코가 증언한 얘기가 거짓말이라는것을 알고 있었고 마유미가 왜 실종되는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동안 아버지는 왜 묵인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은 아버지와 언니 요코의 진실로 풀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둘은 먼가 있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실종된 마유미는 어디로 간것일까? 납치? 아니면 살해를 당했던것일까.....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못차고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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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5:14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佐久間奈々さん誘拐事件)은 일본 치바시 와카바구 타베타쵸 도로에서 중학생 1학년 여학생 사쿠마 나나가 실종된 사건이다

사건 발생 1991년 10월 27일, 12시경 사쿠마 나나는 당일 자정 무렵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약 4KM 떨어진 편의점으로 야식을 사러 나왔다

오전 1시경, 이것저것 물건을 산뒤 돌아가는 길이였다 126번 국도를 건너 타베타쵸 근처에 왔는데 태풍으로 인해 도로에 쓰러져있던 나무를 못 피하고 자전거를 부딪히게 된다

이때 뒤에서 갑자기 낯선 남자가 잠깐 멈춰라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물으면 다가왔다고 한다 155cm키에 나이는 4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로 청소년 생활 지도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한다


아이들 앞에 다가온 청소년 생활 지도원 남자는 4명의 학생에게 잔소리를 하게된다


사쿠마 나나



16세 미만의 청소년이 밤 11시 넘었는데 돌아다니는건 위법이다 경찰에 넘기고 싶지만 너희들은 불량 청소년이 아닌것 같으니 대표로 한명만 나와 같이 얘기좀 하자! 라고 말한뒤 사쿠마 나나를 지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나의 친구 3명에게 너희들은 돌아가 있어 몇분만 이야기하고 돌려보내마라는 말을 남기고 나나는 그 남자와 함께 국도 옆 작은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그남자의 말대로 친구 3명은 나나의 집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을 하고 있던중 이상하다 들어 나나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급히 연락을 받고온 부모는 나나의 친구들과 같이 나나를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새벽 4시20분, 히가시치바 경찰서에 신고하게 된다


사쿠마 나나를 납치한 범인 몽타주


그런데 경찰의 조사결과 126번 국도에 청소년 생활 지도원 근무가 없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청소년 생활 지도원을 사칭해 나나를 납치한것이다


몇일 후 나나가 납치된 당일 오전 1시 20.30분 경 차를 몰고 이동중 현장 근처 교차점에서 나나와 그 남자가 걷고 있는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오전 4시 주택가 치시로다이쪽을 걷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뚜렷한 단서.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2012년12월 치바시 국도 주변이 일본 내 북한 공작원들의 비밀루트로 밝혀져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수사의 진척의 도움이 되지 않고 사쿠마 나나의 실종사건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27년이 흐른 지금 사쿠마 나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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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제사건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1:50

일본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増山ひとみさん失踪事件)은 사건 발생 1994년 2월19일, 결혼을 앞두고 있던 마스야마 히토미(당시 21세)는 퇴사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던중 길에서 실종된다 히토미는 치과에 근무하고 있었고 3주 뒤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실종 당일이 마지막 근무였다



실종된후 히토미의 동료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실종되기 수일전부터 히트미의 집으로 아무 말없이 끊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실종 당일에도 직장에 전화가 걸려왔고 마스야마 히토미씨 계십니까?라는 전화를 동료가 받았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히토미와 결혼하는 남자의 전 여자친구였고 몇번이고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히토미는 시계를 보며 만날 약속을 하는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 전화를 받고 난뒤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귀가하던 모습이 마지막였다고 한다


히토미의 행방이 모연하던중 근무지로부터 500M 떨어진 공터에서 히토미의 차를 발견하게 된다 차는 그대로 있었고 동료들에게 받은 선물과 꽃다발,소지품,결혼반지가 차안에 있었다 




그리고 차 겉에는 바보,못난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1년후인 1995년 1월,한 중년 여성이 히트모의 집의 전화를 걸게 된다


히토미 동생:마스야마 입니다

여자:여보세요?

히토미 동생:네?

여자:언니야!

히토미 동생:네?

여자:언니야!

히토미 동생:누구세요?

여자:언니라고!~

히토미 동생:도대체 누구신가요?

여자:히토미예요~

히토미 동생:네?


이후 중년여성은 갑자기 전화를 뚝 끊는다.... 실제전화통화내용:듣기


히토미라고 했던 중년 여성은 누구였을까? 전화를 추적할 결과 공중전화로 걸어왔다고 밝혀졌지만 신원을 파악 하지못했다

추측으로는 히토미와 결혼하는 남자의 전 여자친구일 가능성이 있다 알리바이로 체포되지 않았지만 야쿠자의 딸이였고 히토미가 실종전 계속전화를 걸어왔었고

실종 당일에도 전화를 했던 인물이 전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히트미 애인이 실종 후 인터뷰에서 찾을수 없을겁니다 라고 발언한것이 히토미 실종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점이다 또 다른 증거는 히토미가 실종이 된후 히토미와 결혼을 하기로한 남자가 전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전 여자친구일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고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히토미 실종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미 경찰은 알고있더라도 야쿠자의 딸이라서 섣불리 수사진행을 못했을 것이다 일본 야쿠자는 세계 3대 세력으로 기업,경찰,검사,정치권,연예인,언론등 모두 관여하고 있다 즉 일본 전역에 이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곳이 없기 때문에 건드리면 안되기 때문에 모르척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추측


1995년 1월 중년 여성이 히토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히토미라고 했던것으로 보아 히토미는 생존해 있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 뚝 끊어질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도망치다 잡혀거나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것다  


이후 히토미는 감금을 당한후 강제로 성매매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확률은 극히 적다 히토미가 살아있었으면 히토미와 결혼하기로 한 남자와 전 여자친구와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 여자친구는 마음이 돌아선 남자친구를 다시 붙잡을려고 히토미를 살해해 다시 돌아서게 한것으로 판단이 된다


만약에 살아있지 않다면 1995년 1월에 걸려온 전화가 히토미의 마지막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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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제사건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 1년동안 실행된 범인의 연쇄 협박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0:00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グリコ・森永事件)은 1984 ~ 1985년 사이에 일본 교툐와 한신 지역을 중심으로 메이저 제과기업,식품 기업들에게 일어난 연쇄 협박 사건으로 범인을 못 잡은 미제사건이다


글리코 사장


사건발생 1984년 3월 18일 오후 9시,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일본 굴지의 제과회사 에자키 글리코 사장 자택에 총을 무장한 정체불명의 남성 3명이 침입했다 에자키 사장의 부인과 딸을 화장실에 묶어 가둔 다음 욕실에서 목욕하고 있던 에자키 사장을 납치해 달아났다 에자키 사장의 부인은 간신히 줄을 풀고 화장실에서 나온뒤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다음날 3월19일 새벽 1시, 오사카부 타카즈키시에 위치한 글리코사 이사의 집으로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전화가 걸러온다 범인은 이사로 하여금 지정한 장소로 현금 10억엔과 금괴 100kg을 들고 오라고 요구 한다

이사는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오사카부 경찰은 효고현 경찰과 합동으로 수사를 시작 하게 된다 이후 범인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지정한 장소와 몸값을 가져오라고 요구하게 된다 글리코사에서 범인들의 요구대로 몸값을 마련해 그 장소로 가서 경찰이 잠복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범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범인들이 몸값을 받아낼 생각이 있는지 의심을 품었다 현금 10억엔,금괴 100개의 무게만 무려 230kg 이였다 몇초라도 빨리 몸값을 받아서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였다 또한 에자키 사장의 어머니와 부인과의 통화에서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다고 말하자 범인은 돈은 필요없다고라고 대답한것이 이상했다 몸값이 목적이 아니라면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이였을까요?


사건발생 3일후 3월21일 오후 2시30분, 일본 국철 직원이 오사카부 이바라키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에자키 사장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경찰은 급히 출동해 에자키 사장의 신변을 확보하고 자택에 귀가 시켰다

에자키 사장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들은 오사카부 셋츠시 토카이도 신칸센 차량기지 근처에 데려와서 아이가와천의 치수조합 작업 오두막에 가두었고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했다고 한다


에자키 사장 납치 사건이 잊혀질 무렵 4월2일, 에자키 사장의 자택에 염산이 들어있는 안약 케이스와 협박장이 도착했다 4월8일까지 자신이 지정한 장소로 현금 6천만엔을 가져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경찰은 다시 지정한 장소에 가서 잠복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4월8일, 마이니치 신문과 산케이 신문의 오사카 지국 앞으로 자신들이 에자키 사장의 납치범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편지가 도착했다이를 도전장이라고했다 내용은 도전장을 세상에 공개하라고 요구였다 편지에는 서명이 없었고 발신인 에자키 사장의 명의였다 


4월10일 오후 10시 50분경, 오사카시에 위치한 글리코사 본사에 화재사건이 발생한다 이 불로 사무실 150평방미터 가량을 태웠고 글리코사 영양식품 저장고에 세워진 소형차가 불에타지만 금방 진화되었다

당시 모자를 쓴 의문의 남자가 도망치는것을 본 주민이 목격했고 곧바로 범인을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4월23일, 에지카 글리코사 앞으로 1억 2천만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하고 다음날인 4월24일 범인은 레스토랑,고속도로 서비스 에이리어,공중전화박스로 계속 장소를 변경하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날 오사카의 각 메스컴들 앞으로 범인들의 두 번째 도전장이 도착했다 자신들을 괴익 21면상이라고 자칭했다


5월31일, 에지카 글리코사에 도 다시 3억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을 했고 6월2일 셋츠 시내의 한 레스토랑 주차장에 3억엔을 넣은 차를 세워둘것을 지시한다

6월2일 당일, 오사카부 경찰본부 특수수사과 1과 직원 30명이 출동해 차량의 엔진을 고장나게 만든후 잠복하여 범인을 기다렸다 오후 8시45분 어떤 한남자가 3억엔을 넣은 코롤라 차량을 타고 출발했다 얼마가지 못해 차는 멈췄고 잠복한 경찰들에 의해 남자는 잡히게 된다

근데 이 남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협박을 받아 이 차를 몰고 지정한 장소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뿐이라는 진술을 했다 경찰은 곧바로 범인이 지정한 장소로 출동해 의문스러운 차량 한대를 발견하고 추격했지만 국도 1호선의 교차로에서 놓치고 만다

6월25일, 범인들은 편지로 에자키 글리코사를 용서하겠다 오늘로 글리코사 협박을 멈추겠다는 선언을 한다



일본 마루다이 식품회사


이후 글리코사에 대한 협박은 없었지만 6월22일, 마루다이 식품 앞으로 협박장을 보냈다 글리코랑 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면 5천만엔을 준비하라! 제안을 받아들이다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직원모집 광고를 내라는 내용이였다

같은 날 마루다이 식품 상무의 집에 현금을 담은 가방을 준비하라는 협박문이 날아왔다 마루다이 식품은 바로 경찰에 신고 한다 


6월28일 오후 8시3분,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데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된 테이프를 튼 것 같은 전화에서 범인은 자신이 지시한곳으로 오라고 말한뒤 전화를 끊었다 오사카부 경찰본부 특수수사계 형사 7명은 마루다이 식품 직원으로 위장해서 지시한 장소로 가보니 지시문이 놓여 있었다

지시문에는 타카즈키역에서 교토로 가는 전철을 타고 좌측 창문을 보다가 흰 깃발이 보이면 창밖으로 5천만엔이든 가방을 던지라는 내용이였다 가방을 가지고 간 경찰은 그대로 전철에 탑승했으나 범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종점 교토까지 갔다


그런데 전철 안에 잠복해있던 형사 한명이 의심스러운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여우눈을 한 남자였다 이 남자는 마루다이 식품 직원으로 위장한 형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5천만엔을 들고 있던 형사를 계속 따라 다니고 있었다 범인으로 추정해 체포할려고 했지만 범인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지시를 하면 체포하라는 말에 범인을 눈앞에 두고선 멍을 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멍을 타고 있을 무렵 타카즈키시에 도착을 했고 플랫폼의 혼잡함 가운데 범인을 놓치게 된다


1984년7월, 마루다이 식품 이사의 집에 현금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을 했고 7월6일 오후8시7분 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가 걸려와 지정된 장소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범인은 4번에 걸쳐 장소를 변경한 끝에 최종 장소에 현금을 가져오게 했으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루다이 식품은 초반 범인의 협박을 비밀리에 부쳤으나 매스컴을 통해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후 마루다이 식품에 대한 협박은 끝나게 된다


일본 모리나가 제과 회사


1984년 9월12일, 오사카부 오사카시에 위치한 모리나가 제과의 칸사이 판매 본부에 협박장이 배달된다 글리코랑 똑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면 1억엔을 준비하라 그렇지 않으면 청산소다를 제품에 넣고 매장에 놓아두겠다는 내용이였다

9월18일 범인은 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를 모리나가 제과의 칸사이 지사로 걸어왔고 같은 내용을 다섯 번 반복해 강조를 했다 범인은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모리나가 제과 협박은 마무리 됬다


범인의 협박장과 청산소다가 들은 제품


하지만 범인은 처음 보냈던 협박장에 말대로 행동을 했다 10월7일 ~ 10월13일 사이에  오사카부와 교토부, 효고현과 아이치현의등 여러 슈퍼마켓에서 의문스런 모리나가 제품이 발견되었다

제품 겉에는 물러나는게 좋을거다,위험, 먹으면 죽는다..괴인21면상이라는 내용의 종이가 붙어있었고 제품안에는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


10월8일, 오사카의 한큐 백화점으로 협박장을 보냈다 한큐 백화점 매장에서 모든 모리나가 제품을 철거하라, 모리나가는 우리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쳐부수겠다는 내용이였다


10월15일, NHK 오사카 방송국 앞으로 정제된 청산소다가 배달되고 각 신문사에는 도전장이 보내졌다 이 청산소다로 몇명을 죽일수 있을까?라는 내용이였다

퀴즈의 상품은 청산소다가 들어간 모리나가 제품이고 퀴즈 정답을 보낼곳은 경시청 총무부 기획과장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일본 하우스 식품 회사


모리나가 제과에 대한 협박과 꼬장이 끝날 무렵 1984년 11월7일 하우스 식품 총무부장의 집에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11월14일 교토 후시미구의 레스토랑에 현금 1억엔을 들고 오라는 협박장과 청산소다가 들어간 하우스 스튜가 동봉되어 왔었다

11월14일, 오후 8시 20분 범인으로부터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테이프가 현금을 전달한 장소를 지정했다 교토부 경찰 본부와 오사카부 경찰 본부에 합동수사본부는 오사카와 교토에 다수의 경찰을 배치했다 역시나 지정 장소에는 지시문이 있었다 지시문대로 이동했고 총 4번의 반복끝에 최종 장소가 지정되었다

메이신 고속도로의 남교토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대기 중이던 교토부 형사가 여우눈을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저번에 놓쳐던 유력한 용의자였던 것이다 형사는 곧바로 보고 하였고 여우 눈을 한 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세번에 걸쳐서 다른 경찰들에게 목격이 되었다 범인은 현금을 실은 차를 오츠 서비스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오즈 서비스 구역에 형사 2명을 배치했다 그런데 여우 눈을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남자는 미행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벤치에 뭔가를 붙이는 등 수상한 행동을 했지만 형사 2명은 감시만 하라는 지시에 또 다시 놓지케 된다


이후 오츠 서비스 구역에 오사카부 경찰 본부의 특수수사계 형사들이 도착해서 현금 수송차를 살피는 있는 여우 눈을 한 남자를 보게되지만 체포 지시가 없어서 또 다시 놓치고 만다 그사이 여우 눈을 한 남자는 일반 도로로 빠져나갔다

다시 범인은 차량을 쿠사츠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게 했고 나고야 방면으로 가다가 흰 천이 보이면 그 천 밑에 있는 깡통에 넣은 지시서를 보아라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무선통신이 되지 않았고 그곳으로 가보니 지시와는 달리 깡통은 보이지 않게되자 10시20분 합동수사본부는 수사를 중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우스 식품에 대한 협박 사건 수사의 상황을 전혀 모르던 시가현 경찰 본부 관할 경찰서의 외근직원이 순찰중 천이 붙어있는곳 근처에서 밤인데도 전조등을 켜지않고 있는 소형 자동차가 정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검문을 할려고 소형차로 다가가자 급발진해 도망을 친것이다 이에 외근 직원은 차에 타 소형 자동차를 추격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9시25분 경찰차가 소형 자동차를 발견했지만 운전자는 도망친 뒤였다 차량은 11월12일에 도난된 차량으로 밝혀졌으며 사건의 범인이나 관련자가 탔을거라는 추측을 했다 이 사건으로 외근 직원은 소형차의 운전자를 잡지 못한 책임으로 사직을 해야만 했다

11월9일 하우스 식품의 부장 앞으로 협박장이 날아왔다 11월14일의 있었던 일을 언급을 했으며 지금은 모리나가를 상대하느라 바쁘니 너희들은 나중에 상대해주마라는 내용이였다 이 협박장을 끝으로 하우스 식품에 대한 협박은 중단되었다


실제 범인 협박장


1984년12월7일, 후지야의 노무부장 앞으로 협박장이 도착했다 테이프와 청산소다가 동봉되어 있었다 며칠 뒤 12월15일 노무부장 에게 다시 협박장이 도착했다

내용은 12월24일 오사카 우메다 백화점 옥상에서 2천만엔을 뿌리라는 내용이였고 후지야 노무부장은 이를 거부했다


12월26일, 도쿄의 슈퍼 사장 앞으로 협박장이 도착했다 1월5일 이케부쿠로의 빌딩 옥상에서 2천만엔을 뿌리라는 내용이였고 이를 거부 한다


12월 4일, 아마추어 무선통신인이 수신 대역에서 이상한 내용의 무선이 잡아낸것이다 21면상과 타마사부로가 주고 받는 대화였다


타마사부로(玉三郎): 21면상, 여기는 타마사부로...

21면상: 약은 준비할 수 있는가?

타마사부로: 사람(ひと), 뚜껑(ふた), 사람(ひと), 여섯(ろく)[4] 항공권이 왕복으로 확실히 잡혀 R6[5]에 가는 경우에는 당일치기로 반드시 갈대가 붙지 않도록 돌아오라.

21면상: 후지야는 돈을 낼 것 같지 않다.

타마사부로: 후지야는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마추어 무선통신인은 이를 녹음해 경찰에 신고를 했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고 후지야의 협박은 중단된다


1985년2월13일, 언론들에게 발렌타인 데이 폐지를 주장하는 도전장이 도착했고 같은날 도쿄와 아이치현에는 물러나는게 좋아 위험이라고 적힌 초콜릿들이 잇달아 발견 되었고 초콜릿에는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 메이지와 롯데의 제품에도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2월24일, 범인들은 언론에 모리나가에 대한 협박 종료를 선언하는 휴전장을 보냈지만 3월6일 와카야마현에 위치한 전통 일본식 과자를 만드는 회사 스루가야에 5천만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8일, 스루가야에게 현금 받는 걸 연기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했고 스루가야에 대한 협박이 중단됬다


1984년8월7일, 시가현 경찰본부의 본부장이 퇴직하는 날 자기 관사 마당에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본부장은 하우스  식품 협박 사건때 수상한 차를 놓친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직하는 상황이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이 사건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8월12일, 범인으로부터 선언문이 보내졌다 이제 회사들 협박하는 걸 그만두어도 할일은 많다 악당 인생 참 재미있지라는 내용이였다 사건종료를 선언하는것과 분신자살한 시가현 경찰 본부 본부장에 대한 조의 대신이라고 밝혔다

범인이 사건종결을 선언한후 하우스 식품의 우라카미 이쿠오 사장은 아버지 우라카미 야스시게의 성묘를 찾아가서 이 사건의 종료를 알리려고 비행기를 탔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이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다


실제 협박 테이프


더 놀라운 사실은 사건 발생 6년전 1978년 8월17일, 글리코의 상무 앞으로 돈을 요구하는 1시간짜리의 협박 테이프가 배달되었다 중년의 남성의 목소리로 자신을 부라쿠민 해방동맹 간부라고 자칭을 했다

글리코 사장 납치,글리코사 방화,청산살포과장의 유포등이 발생할것이며 이 일을 막고 싶으면 3억엔을 내놓으라는 내용이였다 6년뒤 테이프 내용대로 사건은 발생했다

여우눈을 한 남자 몽타주


사건은 1년만에 종결이 되었고 범인들은 많은 증거물들을 남겼지만 신상을 찾을 만한 단서가 없던 탓에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되는 여우눈을 한 남자를 몇번이나 목격했지만 윗대가리의 지시로 인해 멍을 타고 있어야 했으며 끝내 놓치고 말았다 몇번이나 지시할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에 여우눈을 한 남자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경찰에 내부 스파이가 있었던게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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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 2년동안 사육 당하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 20:06

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은 2014년 명문대 졸업생이였던 테라우치 카부(寺内樺風, 당시 23세)가 중학교1학년 사이토 살구(당시 13세)을 납치한뒤 2년간 감금하다가 소녀가 탈출해서 경찰에 신고해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건 당일 2014년3월10일 오후 4시경 여중생은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에서 하교를 하던중 어떤 남성이 차를 타고 나타나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게 되었다 변호사가 보호해줄테니 차에 타라는 말과 함께 억지로 차에 실려 눈에 안대를 한채 범인의 자택 맨션에 감금 된다

납치 당시 한 남성과 대화하는 것을 근처 주민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이후 휴대폰과 지갑도 소지하지 않은 채 2년간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사이토 살구가 적은 메모


실종 당일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피해자의 어머니는 집도 학교도 당분간 쉬고싶어 친구네 집에 있을테니 찾지마세요라는 딸의 메모를 발견하게 되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아 곧바로 부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사이토 살구


딸 정보가 있는 전단지를 돌리지만 2년동안 행방을 못찾게 된다


테라우치 카부에게 납치된 여중생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고 테라우치 카부 외출할때엔 잠금장치로 방에 감금되었다 전화도 사용할수 없었고 실종 직후 집에 보낸 편지는 협박에 의해 강제로 쓰여졌다고 한다

2년간 방 안에서만 감금된 것은 아니며 함께 외출을 할때도 있었고 도망칠려고 생각을 했지만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2016년 3월 27일 휴대폰을 사러간 아키하바라을 보고 늦게 돌아올것 같아서 두려웠지만 용기내어 도망쳐 나왔고 공중전화로 가서 모친에서 전화를 걸었다


모친:어디에 있어?누구랑 있어?

여중생:혼자 있어

모친:당장 경찰에 신고해


전화통화가 끝나고 여중생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보호 조치되었다


감금당할동안 여중생은 범인에게 세뇌를 당했었다고 한다 아무도 널 찾지 않는다는 말로 세뇌에 빠져나올 의지를 상실한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넌 버러졌다는 말에 여중생은 처음엔 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 했다


탈출 2일전 인터넷 검색으로 자신의 이름을 쳐보다 재학중이던 중학교의 졸업식 소식과 함께 가족들도 줄곧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후 도망쳐야겠다는 결심을 세운 여중생은 집 안을 청소하던중 우연찮게 현금 500엔을 발견하고선 탈출할때 쓰기위해 몰래 숨겨두었다고 한다


2년만에 가족들은 딸을 눈물로 맞으며 다시 가족의품에 돌아온것에 기쁨을 나타냈고 보도(대중 전달매체) 덕분이며 감사한다고 답했다


한편 신고를 받은 경찰은 용의자인 테라우치 카부를 지명수배하였고 28일 새벽 시즈오카현 이토시내에서 피투성이의 남성이 걸어가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 용의자를 체포하게 된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이유는 자살한 생각을 가진 용의자는 대형 커터칼로 목을 그었으나 죽지 않았고 중상을 입어 신변 확보 후 병원에 입원되었다


31일 오전 경찰은 미성년자 유괴혐의로 시즈오카의 병원에 입원해 회복중인 용의자를 체포를 했다 테라우치 카부에게 혐의에 대해 물어보자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변명할 말을 없네요라고 인정했다


용의자는 도쿄 고등 법원에서 1 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2 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이다...


테라우치 카부(寺内樺風, 당시 23세)



여중생을 납치하고 2년간 감금한 테라우치 카부는 누구인가?


학창 시절은 건실하고 똑똑했고 보통 사람같은 평범한 존재였다고 한다 고교시절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열광하는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다고 한다


대학시절엔 항공에 관심이 많아 파일럿이란 별명을 들었고 미국의 파일럿 양성 학교에서 세스나 조종 면허를 취득했다 부친은 용품 회사의 사장이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았다


명문대 치바대학을 2016년도에 졸업하고 4월에 신주쿠에 있는 소방 설비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거주중인 맨션은 대학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맨션에서 2년간 여중생을 감금을 했고 2월까지 치바에서 살다 나카노의 아파트로 이사 했다

이사가기전 맨션은 1985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방음 시설이 안되있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들에 의하면 여중생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용의자는 중학생 시절부터 여자아이를 납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납치전 인터넷으로 소녀를 유괴 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던중 아사카시 장소를 정하고 혼자 집으로 가는 소녀를 유괴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중생에 증언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점이 제기 되었다 전화는 안되지만 인터넷은 가능했었고 부모가 자신을 찾는걸 알고있었다는것이다 또한 범인의 집에 택배 기사가 방문했을때 여중생은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달았다는 말과 다르게 방 외부에선 잠금 장치를 건 흔적이 없었다는점과 새로 이사한 나카노의 아파트는 안에서 금방 열수 있는 오토록이 달려있었다 또 다른 의문점은 2년만에 부모님과 재회한 여중생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가족들을 맞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은 억지.흔한 망상이지만 피해자의 태도가 납치와 감금을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지만 범인에게 세뇌를 당하고 호의적으로 생각했다면 여중생은 범인에게 길들여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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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일본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 13:48

일본 731 부대 마루타 생체실험(ななさんいちぶた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으로 생화학무기 개발등의 목표로 만들어진 육군 부대다 원래 목적은 중국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만주지역에 풍토병(콜레라, 장티푸스 등)이 창궐해서 물을 정제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방역급수부대로 창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군에 밀리던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이시이 시로 박사를 의무대 사령관으로 취임시키고 화학.세균전등 생화학무기 개발을 목적을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하게 된다

이시이 시로 (Shirō Ishii, 石井四郎)

 

731부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인,중국인,소련인,러시아인,몽골인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오거나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감행했다 이들은 생체실험 수용자들을 마루타라고 불렀다 마루타의 뜻은 수용자들을 가리키던 단어로 고통을 못느끼는 통나무로 불린다 민간인을 포함한 군인등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으로 죽었던 것이다 

이들은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지역 주민을 모두 추방시켰으며 심지어 인근 지역 주민(자국민)을 데려와 생체실험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할려면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했으며 몰래 내다보는 승객이 보이면 체포를 해서 심문을 하거나 강제로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했다

일본 731부대

 

일본 731부대가 성인 남녀노소불문하고 임산부,아동들까지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해부와 실험이 마춰없이 이루어졌다 이 실험으로 수 만명이상의 사람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실험기록 내용

 

- 성인남녀,아동,영아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생체 해부 대상이 되었다 실험의 유효성을 위해 마취없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질병에 감염을 시킨후 외과수술로 해부하였고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출혈의 연구를 위해 팔다리를 절단하였고 절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

-팔이나 다리르 얼려 절단하거나 다시 녹인후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

-위를 외과적으로 절제한뒤 식도와 장을 연결,뇌,폐,간등의 절제 실험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강제로 매독,임질을 감염을 시켜 연구를 했으며 일부는 간수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질식할때까지의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목을 매달아 연구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동맥,심장에 공기 주입

-신장에 말의 소변 주입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물과 음식을 주지 않음

-사망할때까지 저기앞의 방에 넣음

-극저온 방에 넣어 동상이 걸리게 한뒤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와 얼마나 생존하는지 연구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고 한다

-사람을 통채로 원심분리기에 넣어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연구

-몸의 일부만 얼리고 실험,임산부도 포함

-총기 관통력 테스트를 위해 총을 쏘았다

-영하 50도에서 몇분이 지나면 죽는지 실험

-방안에 독가스를 터트려 몇분후에 죽는지 실험

-몸에 전기코드를 연결한 다음 독가스를 터트려 몸의 변화 관찰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해 생체실험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피부를 산채로 벗겨냄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한뒤 성전환 수술 실험

-수용자를 세워두고 수류탄을 던저 거리 측정

-수용자에게 화염방사기 시험

-말뚝에 묶은뒤 세균방출폭탄,화학무기,폭발성 폭탄 시험

-벼륙을 감염시켜 세균전의 유용성 연구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만두에 넣어 먹임

-동물의 혈액을 수용자에게 주입해서 효과 연구

-바닷물을 수용자에게 주입하여 생리식염수 대치 실험

-방안에 불을 지핀뒤 엄마와 아이를 가두고 모성애 테스트 실험

-살아있는 수용자를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동물의 내장과 교체해 실험

-대량 학살을 위해 저진공에 사람을 넣어 죽이는 실험

 

 

이 실험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은 원판에 묶어 돌린뒤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심지어 수용자의 신체부위에 돈을 걸고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하는 도박게임도 즐겼다 때때로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을 했으며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가장 병약하거나 반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전에 육모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했다

 

일본 731부대의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조선인,중국인,몰골인,러시아,유럽,흑인,미국인등 군인과 일반인,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린이를 포함해 1만명이상의 사람들이 생화학무기 개발의 실험 재료로 살해되었다

 

이 실험으로 731부대는 성공을 거두었고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중국 도시에 투하를 하게 된다 중국은 이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이유도 없이 학살된다

2005년 8월2일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땅속에서 발견해 공개했다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당한 한국인 독립운동가 40여명이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패전후 731부대는 모든 시설을 파괴했고 남아있던 생체실험 수용자 400여명을 모두 죽이고 소각 했다이 과정은 3일동안 계속되으며 그들은 이를 청소라고 표현했다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수용자를 포함 모든 부대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731 부대원들은 그 누구도 처벌되지 않았고 일본 의료계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때 일본의 생체실험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생체실험 관련자료들을 제공하고 러시아에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731부대의 처벌을 막았고 묵인했던것이 미국이라고 할수 있다

 

국립 문서 보관소가 공개 한 관동군 방역 급수 부 (통칭 731 부대) 대원들의 실명이 기재된 유수 명부

 

일본군 '731 부대'대원들이 3607 명의 실명이 적힌 명단이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공개 되었다 공개 된 것은 731 부대를 중심으로하는 '관동군 방역 급수 부 "의"부재중 명단 " 1945 년 1 월 1 일자로 작성된 군의관 52 명, 기술자 49 명, 간호사 38 명, 위생병 1117 명 등의 실명이나 계급,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다고한다

출처 : 명단 링크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여기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을 하고있다  2002년 8월 도쿄의 지방 법원은 처음으로 제731부대의 존재와 범죄 사실 일부를 인정 했지만 그 당시 있었던 일본의 만행은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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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에 해결된 일본 여고생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 11:15

2004년 여고생 살인사건후 14년동안 범인을 못찼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지만 14년2개월 사토미를 죽인 범인이 어떤 한 사건으로 경찰에 불구속되어 해결된 일본 살인사건 입니다


사토미양과 범행현장


2004년 10월5일 오후 3시 시험기간이라 평소보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고등학생 2학년 키타쿠치 사토미(北口聡美)(당시 17세)는 자기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있었는데 비명소리와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할머니와 여동생(초등학생 6학년)은 현관 부근에서 로 가슴과 복부를 찔려 쓰러져있는 사토미를 보게 됩니다

곁에는 어떤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고 여동생은 맨발로 집에서 도망쳐 나와 30m를 달려 원예점에 도움을 요청을 했고 범인은 현장에서 할머니마저 로 10군데 이상을 찌른 후 도주를 하게 됩니다

에 찔려 의식이 없던 할머니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범인이 다시 올지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잠그고난뒤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됩니다

할머니와 사토미는 병원에 이송이 됩니다 할머니는 중상을 입어 위태로워지만 다행히 회복되어 무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은 사토미는 끝내 사망하게 됩니다


사건 발생 당시 범인의 초상화


나이는 20 세 / 신장 1 미터 65 센티미터 / 체형 머리는 약간 갈색으로 짧고 눈이 가늘고 뺨에 여드름 같은 흔적이있는 것이 특징


현장에서 범인의 얼굴을 목격한 할머니와 여동생의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게 되고 사토미양의 손톱에서 범인의 DNA를 채취하지만 범인을 잡는데는 실패 했다고 합니다


사토미 살인사건 범인 몽타주 전단지 현상금


몇년간 범인이 잡히지 않자 사토미 아버지는 2005년12월 블로그를 만들고 정보 제공을 해달라는 호소, 2007년 3월 딸의 대학 진학을 위해 모아둔 돈 300만엔(우리나라돈 3000만원정도)을 현상금으로 걸었으며 범인을 잡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범인몽타주 전단지를 돌리고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의 모임에 가입해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범인을 잡지 못했고 14년동안 해결못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카시마 마나부(鹿嶋学) 체포, 당시 35세


그런데 사건 발생 14년2개월만인 지난달 우연에 일치로 범인을 검거하게 됩니다 범인은 카시마 마나부(鹿嶋学) 35세로 야마구치 현 우베시로 거주하고 있었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였다고 합니다


직장내 폭행사건으로 불구속 된 카시마 마나부는 수사과정중 지문하고 DNA가 14년전 사토미 여고생 살인사건 범인의 DNA와 일치를 했고 자백을 받아내 마침내 용의자를 체포하게되었다고 합니다


14년전 범인은 21세였으며 자전거를 타고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히로시마현 하츠카이시까지 가다가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여고생 사토미를 보게 되었고 성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따라가 집으로 들어갔고 2층에서 성폭행을 시도를 했지만 심한 저항을 했고 계단을 내려가 도망치는 사토미를 쫓아 칼로 찔러 살인을 했다는 증언을 받게 됩니다


당시 경찰에 의하면 범인 카시마 마나부는 우연히 길에서 보고 미행후 성폭행을 할려고 했지만 저항하자 칼로 살해했다고 했지만 범인은 애초에 칼을 소지하고 있었고 사토미양을 찌를때 한번에 그치지 않고 수십 군데 찌른거에 대해서 의문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에 경찰은 의도적인 목적으로 가족에 대한 원한에 의한 범행 가능성이 있다고 의혹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진술이 나오지 않자 경찰은 정신병,정신질환으로 판단을 하고 사건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건을 해결하지 위해 30만명의 조사원이 투입되었으며 시민제보 5900건이 있었지만 범인의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4년이 지난후 뜻하지 않게 범인을 찾게 됩니다


근데 매우 충격적인 사실은 범인 카시마 마나부는 성실하게 출근하던 모법 직원이였는데 아직도 그가 살인마라는 믿기지 않다는 가족들과 회사 직장 동료들의 증언 입니다


14년2개월만에 잡힌 범인 카시마 마나부 억울하게 죽은 키타쿠치 사토미의 복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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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일본 히로시마 일가족 실종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 19:41

히로시마 일가족 실종 사건(広島一家失踪事件)은 2001년 일본 일가족이 실종된 미스테리 사건이다 전날인 6월3일 오후9시경 야마가미가의 딸 치에(당시26세)가 직장 동료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화장품을 가지러 집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다음날 히로시마현 세라쵸 야마가미가(山上家)의 야마가미 준코당시 51세)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중국으로 사원여행을 가기로 당일인데 준코는 나타나지 않자 걱정된 직장동료는 그녀의 집으로 갔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수상하게 여겨 친척에게 알리고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마사히로,준코,미에,치에


수사 결과 야마가미 마사히로(58세), 아내 준코(51세),할머니 미에(79세), 딸 치에(26세),애완견 1마리(레오)등 일가족이 모두 홀연히 사라진것이다 현 경찰은 헬리콥터를 동원해 지역의 산길이나 저수지등 샅샅이 조사해 수색을 했지만 행방을 찾을수 없었다


마사히로의 자동차


마사히로는 2000만엔의 저금도 있었기 때문에 가족은 금전적으로 여유가있었고 딸 치에는 결혼을 약속 한 연인도 있었다고한다

또한 가족들이 싸운 흔적도 없었다..


집안에는 준코의 가방에 여행 대금 15 만엔, 휴대 전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아침 식사 준비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옷이 눈에 띄지 않고 이불도 깔려져 있는걸로보아 잠옷을 입은채 가족들이 차를 타고 어딘가로 나간 것이다 


6월3일 오후 10시50분경 이웃 주민이 차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과 6월4일 새벽 4시 야마가미가에 신문 배달을 하러 온 신문배달원도 인기척을 전혀 못느꼈다는 증언을 했다 

그렇다면 가족의 실종시간은 6월 3일 밤 10시 50분 ~ 6월 4일 오전 4시 사이였던 것이다


쿄마루(京丸)댐의 호수


행방불명이 되고 1년이 지난 2002년 9월7일 강수량이 적어서 가뭄으로 인해 세라쵸에 있는 쿄마루(京丸)댐의 호수바닥이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쪽을 지나가던 행인이 무심코 호수를 바라보다가 차가 호수바닥에 뒤집혀있는걸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차량번호를 조회한 결과 1년전에 실종된 야마가미 일가의 마사히로의 차로 밝혀지게 된다 차 안에는 일가족 4명과 강아지 1마리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전부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으며 차 키가 그대로 꽂혀있었다는 증거로 동반자살이라고 판단 했다


동반자살로 결론을 지었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야마가미 일가는 평범한 가족으로 알려졌고 주변 사람들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 금전적인 문제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 준코와 딸 치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동료들과 전혀 트러블이 없었다 게다가 치에는 약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반자살을 합의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마사히로와 할머니 미에에게 문제가 있었던것일까?

할머니 미에는 특별히 문제가 없었을것이고 추측으로는 마사히로가 강제로 동반자살을 한것으로 보인다 마사히로는 가족들에게 바람좀 쌔자면 가족들과 강아지를 태운뒤 쿄마루댐의 도착을 해 차를 몰고 그대로 호수로 돌진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의 동의 없이 단독적으로 저지른일로 가능성이 크다


미스테리로 남은 히로시마 일가족 실종 사건..동반자살한걸까? 아니면 타인에 의해 살해당했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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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결 미제사건 나고야 임산부 엽기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 16:00

미해결 미제사건 나고야 임산부 살해사건(名古屋妊婦切り裂き殺人事件)은 일본 나고야시에서 일어난 범인을 잡지 못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다


1988년 3월18일 저녁 7시경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가와구에 있는 아파트로 귀가한 31세의 회사원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했다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었던 13일이 지났는데도 출산의 기미가 없어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오전까지만해도 아내와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오후가 되자 전화를 받지 않았던 이유로 급히 집으로 왔던것이다

사건 현장


집에 와보니 대문이 열려있었고 집안의 모든 불이 꺼져있던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려와 거실로 가보니 만삭의 잔혹하게 살해 당한 아내를 발견하게 된다


누가 들어왔는지 만삭의 아내는 양손이 단단히 묶여 있었고 목에는 전깃줄이 감겨 있었다 심지어 아내의 배가 예리한 칼로 잘려 있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발 밑을 보니 태아는 탯줄이 잘린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울고 있었던것이다... 아내를 죽인 범인은 목을 졸라 살해를 한뒤 시체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뱃속에 휴대폰과 열쇠고리를 넣어두고 지갑을 가지고 사라진것이다


태아는 무릎 뒤쪽, 허벅지 뒤쪽 고환에 칼 상처가 있었지만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4월 2일날 퇴원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태아의 생명은 위험했다


시신은 명치에서 하복부까지 길이 38 cm, 깊이 2.8 센티미터에 걸쳐 세로 일직선으로 정교하게 잘라 의료일에 종사하는 사람의짓이라고 판단을 했지만 산부인과 의사에 말을 들어본 결과 당시 살인 사건의 절개는 산부인과에서 하는 제왕절개법이 아니라는것이다


이후 경찰은 잔혹하고 엽기적인 사건에 남편을 용의선상에 올려두었다 그 이유는 집에 도착했을때 문은 열려있었고 집이 어두컴컴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부터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는점이다

그러나 부검결과 아내의 사망시간은 오후 3시였고 남편은 회사에 있었던것이 확인되어 용의선상에 제외가 된다..


죽기전 아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암웨이 통신판매에 참여하던 여성으로 확인되어 조사한결과 이 여성은 딸기를 사들고 아내의 집에 방문을 했고 두사람은 딸기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후 암웨이 제품을 주고 대금을 받았던것이다

거래가 끝난후 둘은 아파트 밑의 주차장까지 같이 내려갔으며 아내가 집의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증언을 한다 범인은 열려진 대문으로 집 안으로 들어와 살해한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피해 여성은 부업으로 암웨이 제품 판매를 담당하고 있었고 그 거래형태는 다단계 마케팅,다단계 사기[피라미드] 였으며 부업 관련 원한을 샀던 사람이나 다단계회사에서 벌린 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빨간색 화살표의 방향으로 아파트나 맨션을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배회하면서 걷고 있었다고 한다


몇일뒤 경찰은 제보를 한통 받게 된다 아내가 살고 있던 집 바로 아래층에 살던 사람 남자가 오후 3시부터 20분쯤 사이 아파트를 배회하는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였다

목격자에 의하면 누군가 대문 문고리를 잡고 찰칵찰칵 하는 소리를 들리고 난뒤 벨이 울려 나가보니 165cm 키에 양복을 입은 30대 정도의 남자가 나카무라씨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봤다는것이다

집주인은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하자 남자는 가버렸다고 한다 이상한점은 벨을 눌러서 물어보면 될일인데 굳이 대문이 열렸는지,잠겼는지 문고리를 돌려봤다는게 수상했다...


경찰은 이 남성인 범인일 가능성을 보고 당일 현장 부근을 통행하는 400 명 이상의 탐문하는 등 남자의 행방을 쫓고 있었지만, 그 발걸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다며 사이트를 만들었다 사건으로부터 2년 후인 1990년2월 어떤 남성이 자신의 집에 침입하려고 하자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자신의 신고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거주지는 임산부가 살던 집 근처로 한겨울에 재킷도 없이 니트만 입은 남자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려고 했다는점이다 이에 그녀는 아이치 현 경찰은 이미 사건의 범인을 이미 알고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잡지 못해서 자신의 집을 도청하고 범인이 살해하려 들때 바로 체포를 해서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것이라고 주장을 하게 된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쓴다는 생각에 이 사실을 폭로하고자 사이트를 만든것이다 사이트주소 <<링크




잔혹하고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잡을 만한 단서나 증거가 없어서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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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 사건 일본 사가현 여성 연쇄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 13:08

사가현 부녀자 연쇄살인사건(佐賀女性7人連続殺人事件)은 1975년 ~ 1989년 일본 사가현 일대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인 사건으로 한결같이 모두 여성들이 실종후 살해당해서 시신으로 발견된 미제 사건으로 보면 된다..


일본 사가현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미제사건


첫번재 피해자 야마자키 토미코(山崎十三子)


1975년 8월27일 수요일 키타가타마치(北方町)에서 여자 중학생 1학년이였던 야마자키 토미코(山崎十三子, 당시 12세)가 혼자서 집을 보고 있던중 실종이 된후 1980년 6월 27일 시로이시쵸의 스코 초등학교(白石町立須古小学校)의 수영장 옆 화장실 정화조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 된다

이상한점은 피해자가 집안에서 실종됬는데 반항 흔적이 없었다는점에서 경찰은 단순 가출로 보고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두번째 피해자 하쿠타케 리츠코(百武律子)


1980년4월12일 토요일 시로이시쵸(白石町)에 살던 여성 하쿠타케 리츠코(百武律子, 당시 20세) 여성은 혼자서 집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실종이

된다 2개월후인 6월24일 스코 초등학교(須古小学校)의 교사 화장실 정화조에서 시신으로 발견하게 된다


세번째 피해자 이케가미 치즈코(池上千鶴子)


1981년10월7일 수요일 시로이시쵸(白石町)인근 공장에서 일하고 집으로 가던 여성 이케가미 치즈코(池上千鶴子, 당시 27세)가 실종이 되고 1981년10월21일 나카바루쵸(中原町)의 공터에서 시신으로 발견이 된다


네번재 피해자 니시야마 쿠미(西山久美)


1982년2월17일 수요일 키타시게야스쵸(北茂安町)의 초등학교 5학년이였던 학생 시야마 쿠미(西山久美,당시 11세)는 하교중 실종이 된다 실종후 2월28일 인근 귤발에서 교살된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번째 피해자 후지세 스미코(藤瀬澄子)


1987년 7월8일 수요일 타케오시(武雄市)의 음식점 종업원 후지세 스미코(藤瀬澄子,당시 48세) 여성은 귀가 도중 실종


여섯번째 피해자 나카지마 키요미(中島清美)


1988년12월7일 수요일 키타가타마치(北方町)의 주부 나카지마 키요미(中島清美,당시50세) 실종



일곱번째 피해자 요시노 타츠요(吉野タツ代)


1989년1월25일 수요일 회사원 이였던 요시노 타츠요(吉野タツ代, 당시 37세) 여성 실종




두번째 실종자가 나온 직후 4월16일 피해자 부모 앞으로 한통의 편지와 여러번의 전화가 걸려오게 된다 앞으로 딸은 돌아오지 않은 것이고 너도 고통을 맛봐라라는발송인 불명의 편지가 도착하고 정체모르는 남자가 실종자 찾기 프로그램에 나오지 말고 리츠코의 사진을 띄우지 마라는 수상한 전화가 수차례 걸려왔다...


그후 여섯번째 실종자가 나오고 일주일이 지난 무렵 피해자의 집으로 괴기한 전화가 한통이 걸려오고 미리 설치한 녹음 시설로 남편과 조사원과 함께 전화를 받게 된다


남편:여보세요?누구시죠 저는 나카지마 입니다

남자:부인을 찾으신것 같습니다

남편:네?

남자:다행이네요..

남편 대체 어디서 찾았다는 거죠?

남자 햅쌀이 있는 장소 입니다

남편:당신 누구시죠?

남자:당신이 아는 인간이다...


그렇게 남자는 전화를 끊었고 조사를 했지만 범인의 단서는 못찾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1989년 1월27일 중년 부부가 자가용을 몰고 귀가 도중에 키타가타쵸 산 옆 도로에 이르렀을대 부인이 들꽃을 발견하고 부모의 불단에 올리기 좋은 꽃이라고 생각한 부인은 남편에게 잠시 차를 세워줄것을 부탁한다

차에 내린후 꽃을 꺽을려고 수풀에 들어갔는데 썩어 뭉그러진 3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된 시신은 실종되었던 후지세 스미코,나카지마 키요미,요시노 타츠요 시신이 유기되어 있던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범인이 만든 표지판 같은 표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점으로 경찰은 연쇄 살인사건임음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1989년 11월 다른 범죄로 구속되어 있던 당시 26세 남성이 살해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유도로 작성된 증인이라 무죄를 선고 받았다 범인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할뻔했지만 다행히 무죄를 받아 풀러났으며 보상금으로 580만엔을 받았다고 한다


범인의 몽타주


일본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여러가지 흡사한 점이 많았고 7명이나 살해 당했음에도 흐지부지하게 수사한 경찰의 수사로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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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사건 일본 하치오지 슈퍼 강도살인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 11:43

일본 하치오지 슈퍼 강도살인 사건(八王子スーパー 強盗殺人事件:하치 오지 슈퍼 난뻬이 사건)은 1995년 일본 한 슈퍼에서 범인이 총기로 아르바이트생 여성 3명을죽인 사건이며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이다


하치오지 슈퍼[八王子スーパー 強盗殺人事件 ]


1995년7월30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의 슈퍼마켓 난페이 오오와다점,파트타임 근무자 이나가키 노리코(稲垣則子, 당시 47세)와 여고생 야부키 메구미(矢吹恵, 당시17세),여고생 마에다 히로미(前田寛美, 당시 16세) 여자 3명만 근무를 했었다 이 시간에 남자 근무자는 퇴근한터라 슈퍼에는 여자들만 있었고 인근 100m 떨어진 공원에서는 현지 자치회가 주최하는 오본춤 대회가 열렸던터라 가게 주변은 오본춤 행렬 때문에 매우 시끄러웠다고 한다


여자 3명은 정상적인 근무를 하고 있었고 오후 8시가 되자 1시간 일찍 퇴근을 할려고 이나가키 노리코는 일찍 계산대를 닫고 정산을 위해 매상을 가지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가게 된다

계산대에는 야부키 메구미마에다 히로미만 남아있었다 이 때 아까부터 슈퍼 주위를 배회하던 40~50대정도되보이는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물건도 사지 않고 어슬렁 걸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본춤 행렬이 탄고부시[탄갱절]을 부르면서 절정에 달했고 퇴근시간이 되자 야부키 메구미는 계산대에 있는 매상금[돈]을 들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나가키 노리코는 돈을 받아 금고에 넣은뒤 가게 불을 끄고 문을 닫게 된다


오후 9시 7분이 되자 오본춤 행렬이 끝나고 주위를 조용해지고 이나가키 노리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말을 하고 슈퍼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9시 20분 이나가키 노리코의 지인은 슈퍼에 도착해 주차장에 정차를 하고 이나가키 노리코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2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먼저 음식점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음식점으로 차를 돌려 확인했지만 이나가키 노리코는 음식점에 없었다고 한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주인과 동행하여 다시 슈퍼로 가게 된다


10시에 도착한 여주인은 사무실로 갔는데 이미 문이 열려있었고 문 안족을 둘러볼려고 했지만 키가 작은터라 들여다 볼수 없었고 문이 열려있던지라 무서워서 혼자 들어가지 못했고 이나가키 노리코의 지인을 불러서 같이 사무실로 들어가 안을 확인하는데 총에 맞아 죽은 3명의 여자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이나가키 노리코와 야부키 메구미는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은후였기 때문에 범인은 이들이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에 침입 한듯 보였고 이나가키 노리코는 사무실 금고 옆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머리에 총알 두 발을 맞은채 있었으며 가까운 거리에서 총알을 맞았다고 한다

야부키 메구미와 마에다 히로미는 사무실 한가운데 금고 앞에서 접착테이프로 손이 묶인 채로 각각 머리에 한발씩 총을 맞아죽었있었다 범인은 먼저 이나가키 노리코를 죽인 다음에 야부키 메구미와 마에다 히로미를 위협하고 총을 쏜든한데 이 모든 상황들이 불과 몇 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게 기묘한일이라고 한다


여자 3명을 죽인 범인은 총 알 한발을 금고에 쏘았지만 금고를 열거나 사무실을 뒤지지 않은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을 노렸다면 총으로 여자들을 협박해서 금고를 열게 했어야 했지만 여자 3명만 죽이고 도망쳤다는점이다

범인의 목적은 처음부터 살인이였고 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금고 안에는 매상금 5백만엔[한국돈 5천만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무실안에서 발자국 10개가 채취되었는데 모두 같은 족흔이였고 단독범으로 추청을 하였다 발자국에는 미세한 철분과 점토,이끼가 발견되었는데 철분은 용접 작업중에 나온것으로 철공소에서 일했을 가능성을 비추어보았다


하지만 범인은 총기 사용에 매우 능숙했다 세 사람 모두 뇌의 중추를 정확하게 겨냥해 명중을 했고 사용한 총기는 필리핀제 권총으로 명중률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오후 5시30분 하얀 셔츠에 회색 바리 차림을 한 40~50대 남자가 슈퍼 근처를 배회를 하는걸 슈퍼마켓 고객이 목격을 했었고 동네 주민이 슈퍼 옆 골목에 남자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목격을했지만 차의 라이트 불빛 때문에 얼굴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총에 맞아 죽은 피해자들


몇몇의 용의자들은 추측해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었고 당시 슈퍼마켓의 범인을 얼굴을 자세히 목격한 목격자가 없어서 사건은 종결되고 미제로 남게 된다...

돈이 필요없었던 범인은 청부살인? 원한살인 이였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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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주쿠 러브호텔 연쇄살인 사건 미제로 남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2. 09:29

신주쿠 러브호텔 연쇄살인 사건(新宿ラブホテル殺人)은 1981년3월부터 6월까지 3개월에 동안 일본 신주쿠 러브(가부키쵸)호텔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난 미해결 미제사건 이다


첫번째 살인 사건은 1981년3월30일 오전 10시경 A호텔에 남녀가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남자가 먼저 나오고 체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자가 나오자 않자 안내 데스크에서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하다 느낀 직원을 그 방을 찾아가서 확인하는데 중년 여성의 목이졸라있는 시체를 발견 한다


방에 있는 명찰로 신원 확인 결과 가부키쵸 카바레이 일하던 33세의 호스티스라고 판단을 했지만 아파트를 조사한 결과 45세의 연령으로 가명을 쓰고 있었다

이 여성은 몸이 안좋은 남편과 자식이 있었지만 6년전 가출을 하였고 가출한 사람찾기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녀를 찾았으나 사망하게되고 남겨진 아이도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친정에 돌아온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되고 그후로 집을 나와 가부키쵸의 카바레에 근무를 하게된다


아파트를 조사하던중 메모장에 남편과 아이의 기일이 적혀 있는것을 보았고 금고에는 아이의 사진과 남편의 넥타이핀이 보관되있었으며 천만엔의 정기예금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이의 수술비를 위한 통장이였을거다


이 여성과 같이 방에 들어갔던 남성은 카바레의 손님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단서도 없어서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된다



두번째 살인 사건은 1981년 4월25일 오전 9시경 b호텔에 남녀가 함께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간후 1시간뒤 남성은 요금을 내지 않고 먼저 나간것을 

보게된 직원은 수상하게 여겨 방에 들어갔고 확인을 하는데 20세 전후의 여성이 팬티 스타킹으로 목이졸라있는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범인의 단서도 못찾은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목욕 가운하나를 입고있었고 귀걸이,샌달,담배,라이터밖에 없었으며 신분을 확인할수 있는 면허증이나 신분증이 없었다


이 여성의 특징은 폐가 깨끗했으며 겨드랑이에 액취중 수술 흔적이 있었고 치아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국적은 대만인으로 판단했지만 이 또한 추측일뿐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다





세번째 살인 사건은 1981년6월14일 오전 6시30분 c호텔에 남녀가 함께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간뒤 오전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남자가 먼저나간것을 본 직원은 7시 40분쯤 방으로 들어가 확인을 하는데 젊은 여성이 팬티스타킹에 목이 감긴채 옆으로 쓰러져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당시 가사상태였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가지못하고 사망했다


신원조회 결과 사이타마 카와구치시에 거주하는 17세 학생이였고 부검 결과 시체에서 커피가 검출되어서 가부키쵸의 어느 까페에서 범인과 만난후 같이 호텔로 들어간것으로 판단을 하고 조사를 하지만 단서 하나 못찾은채 사건은 마무리 된다





네번째 살인 사건은 1981년6월25일 오후 11시 D호텔에서 한 여성의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남성과 함께 방에 들어온후 남자에게

목이 졸렸으나 격하게 저항을 했고 남자는 현금을 갈취하고 이용요금도 내지 않고 도망 쳤다고 한다


이 여성은 게임 센터에 이 남성이 말을 걸어와 어떻게 하다가 호텔에 같이 오게 되었다는 증언만 있을뿐 범인의 단서는 없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연쇄살인 사건으로 판단했지만 동일범인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개인사생활침해로 CCTV가 호텔내에 설치되지 않았고 직원들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기 때문에 잘 기억이 안난다면 말을 했기 때문에 범인의 몽타주는 작성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의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한다 살해된 세명의 피해자에게 각성제가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주사의 흔적이 없었으나 입이나 코로 들이 마셨다는것이 밝혀지게 된다

또한 범인의 살해 방법이 비슷했다 팬티스타킹으로 살해당했고 목을 졸라 살해를 시도했다는 점과 여성들은 매춘부였거나 급만남을 해서 호텔에 같이갔다는점이 있었고 범인은 젊었으며 샐러리맨풍의 남성,신장은 160cm로 전부 똑같다는점이다


사건현장에 범인의 흔적을 찾을수 없었고 얼굴을 아는 목격자도 없었기 때문에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게되고 사건은 마무리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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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카타 소녀 감금 사건 납치후 무려 9년5개월동안 감금한 범인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 10:56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 : 新潟少女監禁事件(にいがたしょうじょかんきんじけん)은 정신병이 있는 아들의 폭력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가서 신고를 한뒤 직원들이 집에 방문하던중 우연히 2층에 있던 방에 들어가 감금된 소녀를 발견하여 신고하면서 알려진 사건 입니다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 新潟少女監禁事件


1990년 11월13일 오후 5시경 니가타 현 산조시에서 범인 사토 노부유키(당시 28세)는 차를 타고 이동을 하던중 하교를 하던 소녀를 보게 됩니다 

소녀 앞에서 차를 정차한 사토 노부유키는 칼을 소녀의 가슴 부근에 들이대면서 떠들면 죽여버린다는 협박을 합니다 차 뒷쪽으로 유인한뒤 소녀에게 차 트렁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를 하지만 말을 듣지 않자 강제로 몸을 안고 올려서 드렁크에 넣고 차를 출발시킵니다 당시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집이 있는 가시와 자키시 방면으로 향하던중 소녀가 소리를 지르는바람에 급히 차를 정차시키 그는 뒷좌석에 있던 테이프를 사용하여 소녀의 두 손목,무릎,눈을 가리고 입을막은뒤 다시 집으로 출발을 합니다



집에 도착한 사토 노부유키는 같이 살고 있던 어머니가 소녀를 보지 못하도록 후문 현관 앞에 차를 잠시 정차후 트렁크에 있던 소녀를 안고 자기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 갑니다 자기 방 남쪽 창틀에 둔 후 다시 정문 앞에 차를 돌려 보통 귀가한것처럼 가장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방으로 들어가 창틀에 있던 소녀의 결박을 풀고선 이 방에서 나갈수 없어 나랑 여기서 계속 사는거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 따위 필요 없게된다 산에 묻거나 바다에 버릴거라는 위협적인 말을 퍼부고 난뒤 지속적인 감금을 시작 합니다


소녀가 납치된후 당일 13일 19시45분경 소녀의 어머니는 딸이 돌아 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고 주재소에 있던 수색원과 니가타 현 경찰,학교 관계자를 포함해 100여명이 수색을 했고 14일 다음 날 200여명 이상이 수색을 했지만 뚜렷한 단서도 찾지 못한채 멍을 타게 됩니다

15일 경찰 기동 군단 수사대 107명으로 구성된 여자 초등학생 찾기 사안 대책 본부가 설치되었고 수색 범위를 주변 시청촌에 확대되어 헬리콥터를 동원해 하늘에서 빈집이나 컨테이너 박스를 검색했으며 내부 압수 숙새 야간 검문을 하는 대대적인 수사를 하게 됩니다


니가타 현 경찰은 소녀의 특징을 담은 배서 2만장을 작성하여 현내 전역에 배포를 했지만 뚜렷한 단서와 목격자를 찾지 못합니다 11월19일 수색 인원은 80명으로 축소되었고 12월25일에는 모든 수색이 중단되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이후 매년 11월13일 산조 서원이 학교나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활동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딸을 찾고 있을동안 범인은 소녀에게 위협적인 말을 반복하면서 을 들이대거나 주먹으로 안면으로 수십 차례 구타를 했으며 2 ~ 3개월 동안은 외출이나 취침시 소녀의 손과 발을 결박을 시켜 못 도망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3개월이 지난후 소녀의 손의 결박은 해제되고 다리의 결박은 1년 정도가 지나서야 풀어줬다고 합니다 1년만의 손과 발의 결박을 풀어줬던 범인은 소녀에게 큰 소리를 내지 말것,내가 방에 들어올때 얼굴을 숨기지말것,침대에 올라가지 말것,뛰지 말라고 복종 하게 만듭니다 이를 어기면 폭행에 전기총을 사용했으며 감금기간동안 상습적으로 폭행을 일삼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식사는 어머니가 준비해왔지만 고령이었던 어머니의 부담을 고려하여 편의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도시락 대처를 했다고 합니다 몇년이 지난 1996년경에는 소녀의 다리에 멍을 보고선 당뇨병으로 진행되는것을 우려해 1일 3식을 1일 1식으로 줄이게 됩니다 그 휴유증으로 소녀의 체중이 감소하고 실신까지 가는 상황까지 오게되자 바닥에서 제자리 걸음 운동을 시켰으며 아래층에 어머니가 있는 경우에는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범인 사토 노부유키는 9년 5개월동안 자기 방에 소녀를 감금해두어 자기 만족을 하면서 지내왔다고 합니다



1999년 범인은 정신병이 더 악화가 되자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폭행과 전기 총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같은해 12월 다시 정신 병원을 찾은 어머니는 아들의 가정 폭력이 심화되고 있음을 호소 합니다


담당 의사는 의료 보호 입원을 제안하고 어머니는 동의를 하게 됩니다 2000년 1월19일 정신병원에 입원해도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보건소 직원들이 자택을 방문했지만 아들이 방에 틀어 박혀 면회할수 없었던 터라 나중에 정신 병원.보건소.시청등의 협의후 강제입원시키로 결정을 합니다



2000년 1월28일 의료 보호 입원 조치를 위해 의료 관계자,보건소 직원등 7명이 자택을 찾아 갑니다 집 앞에 2명을 대기시키고 5명이 사토 노부유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사토 노부유키는 왜 온거야라면 항의를 합니다



지정 의사는 법을 설명하고 당신은 입원이 확정되었다며 데리고 나가는 순간 사토 노부유키는 격렬하게 날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의사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3명의 경찰관이 제압했지만 강렬하게 저항한 사토 노부유키때문에 애를 먹게 됩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의사는 진정제 주사를 넣어 잠들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순간 이불이 움직이고 있는것을 본 직원은 이불을 걷자 초췌한 모습의 소녀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녀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은? 어디에서 왔냐는등 물어봤지만 소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사는 아래층에 있던 사토 노부유키의 어머니를 불러서 이 여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고 어머니는 모르겠어여 얼굴을 본적도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게 소녀를 데리고 같이 근교의 병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집에 남아있던 직원은 신원 불명의 여성때문에 경찰에 전화를 하지만 인원의 사정으로 순찰나간 상태라 연락이 되지 않아 병원으로 향하는 차안에 직원이 소녀에게 이름을 묻자 자신의 이름과 주소,생년월일,부모의 이름을 말해줬다고 합니다

병원에 도착을 한뒤 다시 경찰서에 연락을 해 소녀의 이름을 알수 있었으며 실종 된 소녀라는게 밝혀집니다 경찰서로 온 소녀는 지문을 확인해서 산조시에서 실종된 소녀와 동일 인물로 확인이 됩니다 이날 밤 집에 있던 소녀의 어머니느느 경찰서로와 9년 5개월만의 딸과 재회를 하게 됩니다


한편 경찰은 범인 사토 노부유키 송환을 요구했지만 환자의 안정이 중요하다면 10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10일후인 2000년 2월11일 오후 2시52분 사토 노부유키는 마침내 체포가 됩니다





체포후 범인에게 납치한 이유를 물어보자 여자가 귀여웠고 옆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납치하기로 마음먹어었고 그녀를 성인될때까지 키워서 결혼을 할려고 했다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싸이코패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녀를 감금후 저항이 약해지자 어머니가 없는날에는 샤워하게 하게 해주거나 티비를 보게해주었고 머리를 직접 잘라준만큼 소녀의 대한 집착이 강했다고 합니다


범인 사토 노부유키의 고등학교시절은 폐쇄적인 성격탓에 친구가 없었고 왕따를 당하면 학교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된후 어머니의 권유로 기계부품 제조회사에 취직했지만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않는 이유로 3개월만에 퇴직을 하게 됩니다

회사에 퇴직후 그는 더이상 일자리를 찾지 않았고 히키코모리 (引き籠もり)상태에 있게 됩니다 히키코모리는 집 에 틀어 박혀 가족 이외 거의 교류가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자립을 위해 집에 별도의거주 공간을 만들어주기로 합니다 아들은 요구에 응했으나 결벽증,강박 장애라는 지병의 증상을 악화시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며 목수 출입을 금지시켰고 공사를 중지시킨뒤 변함없는 생활을 합니다


출처 일본 위키백과


총 11번의 공판끝에 범인은 2005년 1월1일 징역 15년이 확정되어서 수감됐으나 의료적 치료가 필요하다며 의료 감옥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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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츠보노 온천장으로 흉가체험하러간 여성2명 실종 미제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2. 28. 14:44

1996년5월5일 21시경 일본 토야마현 히미시에 사는 19세 소녀 두명은 가족에 담력 시험하러 간다며 차를 끌고선 오즈시에있는 츠보노 온천장으로 간후 실종된 사건입니다

온천장 여성2명 실종(坪野鉱泉肝試し失踪事件)


두 소녀는 가는도중 해양 파크에 들러서 친구를 만난것이 확인 되었고 밤 10시경 도야마시와 나메리카와시를 거치는 국도 8호선우오츠 방면으로 달리는 그들의 차량의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삐삐로 지금 우오즈시에 있다고 연락한것이 마지막이였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두 여성이 돌아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은 두 여성의 행방을 추적 합니다 대규모 수색이 이루어졌지만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고 10개월이 경과한 1997년3월 전단지를 돌려 공개 수사에 나섰지만 두 여성의 행방은 물론 타고갔던 자동차도 발견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온천장에 심령스팟을 하러간 두 여성은 도대체 어디로 간것일까요?


5월5일 이전에도 이츠보노 온천장을 찾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미 이 둘은 한번 이곳을 방문했고 5월5일에 이곳에 흉가체험을 해보려고 했다가 실종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일각에서는 4가지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곳을 심령 스폿이라고 하여 찾는 폐허덕후들이 있었고 인근 폭주족들의 집합처라는 소문 때문에 인근 주민들은 치안 문제로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①폭주족에 의한 납치와 살해

②북한에게 납치

③바다와 댐,호수,강,절벽에 추락사고

④귀신의 소행



유력한 근거로 폭주족의 소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입구는 철판으로 봉쇄되었지만 사람 한 사람이 지나갈만큼의 구멍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면은 맨 먼저 보이는 풍경이 낙서 투성입니다 기둥에는 도나(도나미)연합의 문자가 보이고 벽에는 온갖 낙서가 많습니다



도야마 현은 "폭주족의 발상지" 라고되어있다. 폭주족이라고하면 '스펙터'가유명하다고 합니다한때 천둥족으로 불리었고 1972 년 6 월 17 일 (토요일) 자정부터 18 일 새벽도야마 현 도야마시에서 도로를 서킷 장 대신 젊은이들의 승용차와 오토바이를 몰고 대기하고 있었고 구경꾼이 삼천 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백 명의 폭주족들이 국도 8 호선이나 시도에 난입후 지나가는 택시와 소방차를 발길질하여 난동을 피다가 끝에 승용차를 몰고선 상점으로 돌진후 상점에서 구경꾼들과 폭주족들이 차와 담배 등 50 만엔 상당을 훔쳐달아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언론과 경찰들이 폭주족이라고 호칭한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소동은 도야마 현에만 머물지 않고 다음 해 9 월까지에 걸쳐 호쿠리쿠 · 중국 · 시코쿠 각 지방 도시까지 파급, 마침내 2500 명 이상 검거를 해냈고 이것이 일본의 폭주족 새벽이라고 합니다



SKC, 도나 연합 도야마 연합, ST 온빠니온 이 폭주족들은 얼빠진 양키 망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도야마 연합이면 현재도 활동중이라고 합니다

도나연합은 2008년 여성을 폭행해 맴버7명이 체포된적 사건이 있었으며...




2001년에는 16세의 여고생이 남자에게 담력 시험을 가자면 도착을 했는데 강간을 당하고 하는 장면은 촬영을 해서 협박을 하면서 매춘을 시켜 돈을 벌인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희생된 현장이 바로 윗 사진이라고 합니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옛말이 여기서 나오는것 같습니다 츠보노 온천장(坪野鉱泉肝試し失踪事件)은 심령스팟으로 유명했지만 폭주족.일반인들이 몰리는 장소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의해서 다치거나 죽을수도 있는곳이라고 합니다


심령스팟을 하러 온 여성 2명도 사람들한테 납치되거나 살해당하지 않았을까요?




약42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었고 120명이 납치된 루트 지도 입니다

호쿠리쿠 일대가 북한과 가까운곳이라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숨을만한곳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왔으며 모국에 의한 납치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시마네 현 마츠에시의 음식점에서 근무하던 카시와기 사치코(당시 26세)는 2012년9월부터 행방 불명이 되어었고 그 후 3년후인 2015년8월 수심 4m의 강바닥에서 그의 차를 발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4월22일 사이타마 현의 18세 남성 4명이 경승요차를 타고 심령 스팟을 하러 가던중 울타리를 뚫고 15m 절벽 아래로 추락해

1명 사망.3명이 경상을 입은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실종된 여성2명도 심령스팟을 하러가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강에 빠져서 못찾은게 아니였던것일까요?




츠보노 온천장(坪野鉱泉肝試し失踪事件)은 호쿠리쿠 일대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체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밤마다 악귀가 나타나며 위층에서 소리가 들리고 창문에서 누군가가 들여다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귀신에게 홀려 해코지를 당해던것일까요?


미제사건으로 남게된 이 사건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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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일본 쁘띠엔젤 사건 짜여진 각본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2. 28. 08:49

쁘띠엔젤(プチエンジェル事件)은 범인 요시자토 코타로(吉里弘太郎, 당시 29세)가 미성년자 데이트 클럽을 만들어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을 하고 초등학생4명을 감금한 사건 입니다 

쁘띠엔젤(プチエンジェル事件) 사건


이미 그는 매춘으로 체포당한 경력이 있고 집행유예증으로 범죄자였다고 합니다 시부야,신주쿠 번화가에서 여학생들에게 노래방,속옷제공,나체촬영이 쓰인 전단지를 돌리며 돈을 벌수 있다고 꼬들겨 많은돈을 얻게되지만 뜬금없이 자살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됩니다

요시자토 코타로가 노린 여학생들의 연령대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였으며 이들을 꼬신뒤 친구들을 소개하면은 한 명당 1만엔~ 3만엔(한국돈 10만,30만)이라는 큰 돈을 주어 돈을 더 많이 벌수 있다며 소녀들을 꼬시게 됩니다



범인은 시부야나 신주쿠의 호텔에서 여학생과 면접을 치르면서 아르바이트라고 말하고 간단한 청소만으로 큰 돈을 주어 경계심을 없애뒨 친구들을 소개해달라고 요구를 한후 여학생들을 남성과 성매매를 시켰으며 아동 포르노를 만들어 비디오로 팔고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사건 발생전 2003년7월 어떤 한 초등학생 한명과 요시자토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나 만엔을 주면서 친구들을 소개시켜주면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말로 유혹을 하고선 서로 휴대폰 전화번호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게 됩니다



사건 발생 2일전 7월11일 요시자토는 페라리 2대를 팔고 아카사카의 위클리 맨션 11층 방을 단기 계약을 한후 양판점에서 20L의 폴리탱크와,아령,연탄,화로 을 구입을 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던 범인 요시자토는 굳이 왜 차량을 팔아서 맨션을 구했을까요?


어느 날 그는 연락을 주고 받았던 초등학생한테 만엔을 줄테니 방을 청소해 달라며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4명의 초등학생들을 불렀고 시부야역앞에서 만나서 택시를 탄후 아카사카 맨션으로 오게 됩니다 방안에 들어온후 4명의 초등학생들은 청소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돌변한 요시자토는 여기에 온 의미는 다 알고 있겠지?라고 말하며 급 태도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범인은 초등학생 4명을 감금을 시켰고 초등학생들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수갑을 채운뒤 탱크와 아령에 연결을 시켰으며 식사는 과자만 먹게했고 말을 안들으면 전기충격기[스턴건]으로 위협을 가했다고 합니다



7월13일 같은날 초등학생들의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게 됩니다 7월15일 매스컴에 보도가 되고 16일 범죄 경력이 있던 요시자코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며체포장을 발부하게 됩니다


7월16일 요시자토의 탐문이 시작이 되고 비닐 텐트안으로 들어가 화로에 연탄을 피어 자살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생을 납치하고 갑자기 자살했다는?

7월17일 초등학생 한명이 주변이 조용해진것을 느끼고 수갑을 풀고선 맨발로 도망나와 근처 꽃집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감금되었던 초등학생들이 풀어주고 자살한 범인을 확인 하게 됩니다


이후 경찰 조사를 통해 사이타마 현 구키시에 위치한 범인의 아파트에서 1,000개 이상의 비디오테이프와 2,000여명 이상의 고객리스트가 발견되었지만 가명으로 인해 사건은 흐지부지 중단되고 맙니다

일본 돈


범인 요시자토 코타로는 아동 포르노 판매는 물론 쁘띠 엔젤이라는 아동 매춘 조직으로 계좌에만 35억 가량의 거액이 예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4명을 납치하고 3일째되는날 갑자기 자살해버렸고 자살한 동기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은채 사건은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경찰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범인 요시자토 코타로는 전날인 16일 이미 자살한 상태였으며 비닐 텐트에서 연탄을 피워 자살을 한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닐이 녹아내려서 자살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비닐안이라 상당히 뜨거웠을텐데도 불구하고 요시자토가 몸부린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서도 없이 순순히 자살을 했다는점때문에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고 합니다


당시 요사자토는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을텐데 갑자기 초등학생들을 납치를 하고 자살을 했다는점이 애초부터 너무나도 이상하다는점입니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비닐 이였지만 그 안에서 연탄을 피워 자살했다는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비닐이 녹아내리기 때문에 자살이 불가능했을것이고 만약에 비닐이 잘 밀봉되어 가능해도 죽기 직전 몸부림을 쳤을거고 흔적이 있어야 했지만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문점은 유서가 없었다는것이고 사건의 순서가 이상하다는점입니다 납치를 하고 바로 자살을 했다는것은 말도 안되며 누군가에 의해서 압박을 받았거나 살해당했다는 겁니다


범인이 자살후 2천명 이상의 대기업 수뇌부,간부,대학병원 의사,변호사,고급관료,거물 정치가,연예인들의 고객 명단이 발견되었지만 가명이라는 이유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정치계,기업인등 거물들이 언론인 등에 의한 사건 개입해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야쿠자 폭력조직에 의한 타살당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건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마무리되었으며 매일 같이 쁘띠엔젤에 대해서 보도하던 매스컴들은 어느 날 다 같이 보도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정체를 알수없는 남자(正体を知ることのない男)


쁘띠 엔젤 사건 피해자 소녀들의 증언 입니다


감금되었던 4명의 소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올때까지 그가 자살한지 몰랐으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도망 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혼자 도망 나왔던게 아니였습니다


당시 목격자의 의하면 남자 1 명, 여자 1 명 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를 확보 했지만 경찰은 이를 묵인한채 수사를 종결시킵니다

이에 범인 요시자토 코타로는 혼자 자살했던게 아니고 방에서 나온 남자의 의해서 죽었을것이며 소녀를 풀어주어 도망나오게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굳이 납치를 안해도 해왔던 방식으로 돈도 많이 벌고 잘 지내왔던 그가 갑자기 왜 납치를 하고 자살을 했던것일까요?... 전말은 폭력, 종교 단체, 정치 세력의 의한 짜여진 각본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이 사건은 미스테리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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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일본 3대 미제 마츠오카 신야군 실종사건 미스테리로 남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2. 27. 16:57

일본 3대 미제사건 마츠오카 신야 실종 사건 입니다 이바라키 현(茨城県) 우시쿠 시(牛久市)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신야의 외할머니가 사망하게 되고 가족들은 도쿠시마 현 코마츠시마시에 가서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게 됩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코마츠시마시 사다미츠 정에 있는 케이코의 친척집에 가서 하루밤을 지내게 됩니다

마츠오카 신야


3월7일 다음날 신야의 아버지 마츠오카 마사노부(松岡正伸)는 아이들과 친척,조카들은 데리고 집 근처를 산책하고 난뒤 아침밥을 먹으러 친척집 현관까지 따라온 신야는 산책을 더 하고 싶어하는것 같아서 마사노부는 둘째 아들을 부인 케이코에게 데려다주고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는데 신야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갔다온 시간은 불과 20초 정도였고 근처에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신야를 찾을수 없게되자 가족들이 근처를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찾을수 없게 됩니다 

이후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게 됩니다



경찰은 산을 헤메다가 실종된것으로 보고 마을 소방대원,일반 시민을 포함한 100여명이 나서서 산을 수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야를 못찾았다고 합니다 다음날 수색 인원을 늘려 3개월 동안 수색을 벌였지만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건 현장은 케이코의 친척집 길목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었고 마사노부의 시야에서 신야가 사라진 시간이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누군가 납치했다는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기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은 겪게 됩니다


신야의 가족들은 도쿠시마의 친척집에 남아서 신야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찾을수 없게 되었고 3월17일 이바라키 현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이후 한통의 전화가 왔지만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신야의 가족들은 티비에 출연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야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끝내 행방을 찾을수 없게 됩니다



29년이 흐른 2018년 1월 31일 실종자 특징 프로그램 TBS 공개 대수색 18에 한 남성이 출연을 하게 되는데 방송 이후 시청자들이 마츠오카 신야와 너무 닮았다면 신야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DNA검사를 통해 친자가 아니라고 밝혀졌다고 합니다..



20초만에 아버지 시야에서 사라진 마츠오카 신야는 어디로 간것일까요? 납치를 당했더라면 목격자이었을테지만 범인의 흔적조차 못찾게 됩니다

그럼 귀신의짓일까요? 아니면 죽은 외할머니가 데려간것일까요?... 미제사건으로 남게된 마츠오카 신야 실종사건은 미스테리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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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잠수함에서 스웨덴 여 기자를 살인한 백만장자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2. 27. 16:03

2017년 8월 10일 스웨덴 기자 킴 월(Kim Wall)은 발명가,벤처 사업가 백만장자인 페터 마드센(Peter Madsen)에게 취재 요청을 하게 됩니다

페터 마드센은 취재에 응했고 자신이 제작한 잠수함 노틸러스 UC3를 타고 덴마크의 북동부의 레프살센 섬으로 갈것을 제안 합니다 킴 월은 무슨일이 생길것을 생각도 못하고 패터 마드센의 제안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가게 됩니다

 

마지막 사진 잠수함

 

그녀가 UC3 노틸러스에 탑승했을때의 시간은 19시 19분이었고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마지막이였다고 합니다...

 

킴 월(Kim Wall)

 

2시간후 그녀는 잠수함에 타면서 위협을 느꼈는지 남자친구 올레 닐센에게 무섭다면서 계속 문자를 보냈으며 저녁쯤에 돌아간다는 메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인 8월11일 새벽까지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걱정된 올레 닉센은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됩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킴 월의 사건 당시 행적을 조사를 시작 했습니다 닐센의 증언으로 페터 마드센을 취재하러 갔다는 사실을 들은 경찰은 마드센의 소재를 파악을 하고 행방을 찾게 됩니다

 

이틀 뒤 마드센의 행방을 찾을수 있었는데요 사제 잠수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인근 해군에 구조요청을 했었고 구조된후 병원에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마드센을 만나 킴 발의 소재를 물는데 전혀 모른다는 증언을 합니다 향해도중 잠수함에 문제가 생겨 향해를 취소하고 동승하고 있던 직원에서 구명선으로 킴 월을 섬에 있는 별장으로 데려가 주라고 명령을 했고 이후 그녀의 행방을 알수 없다는 진술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수상한다는걸 느꼈는지 잠수함을 조사하기 시작 합니다 잠수부가 내려가 조사해보니 잠수함은 사고로 침몰했다고 했지만 누가 고의적으로 침몰 시킨듯 보였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경찰에 추궁에 마드센은 진술을 번복을 하기 시작 합니다

 

 

8월21일 사건 11일만에 인근 해변가에서 시신이 발견됩니다 발견된 시신은 머리와 팔 다리가 절단되어 몸통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시신에서 채취한 DNA는 킴 월의 DNA와 일치했고 머리와 사지가 날카로운 도구로 절단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킴 월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도 마드센은 잠수함 해치에 부딧혀 사망을 했고 죽였다는 의심을 받을까봐 시체를 바다에 유기한것이며 시체 훼손은 자신과 상관없는일이라면 항의를 합니다

 

하지만 2017년 10월6일 끈질긴 수사끝에 킴 발의 머리와 다리,옷가지 그리고 흉기로 사용된 이 발견됩니다 킴 월의 머리를 검사를 한 경찰은 두부에 어떤한 손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해치에 충돌하며 사망했다는 마드센의 주장이 거짓이라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가방을 찾을수 있었던 계기는 킴 월의 남자친구의 닐센의 꿈에 킴 월이 나타나 해안의 조그마한 바위섬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가방을 찾으라는 말에 해안가 바윗섬에 놓여진 가방을 찾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몇일후 드디어 마드센의 자백을 하게 됩니다 킴 월을 성고문을 한후 토막내서 죽이고 몸통을 바다에 유기 하고 얼굴과 팔 다리는 가방에 싸서 유기 했다고 시인을 하게 됩니다

 

페터 마드센(Peter Madsen)

 

 

2018년 4월 코펜하게 지방 법원은 페터 마드센에게 종신형을 선고를 받게 됩니다

 

페터 마드센은 스웨덴 출신의 벤처 사업가이자 백만장자로 잠수함을 제작하고 유인 우주선 개발을 추진할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로 밝혀지게 됩니다 회사 컴퓨터에서 다수의 잔혹 고어 동영상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여성의 목을 찔러 살해하는 고어 동영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장하고 있던 스너프 필름(snuff film)이 발견되었는데 실제 상황을 촬영한 영상으로 그는 초범이 아니였으며 사이코패스라는 분석이 나와 피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여성 실종사건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남 부러울것 없었던 백만장자 페터 마드센 그는 고어 동영상을 보면서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잠수함에서 킴 월을 죽였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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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정화조 죽음 의문사 미제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2. 27. 13:14

1989년 일본 후쿠시마현의 정화조 의문사 사건 福島便槽内変死事件(福島女性教員宅便槽内怪死事件)입니다 1989년 2월 28일 후쿠시마현 타무라군 미야코지촌 산간 마을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23세의 여교사는 저녁이 되어서 일을 마치고 학교옆 교직원 숙소로 잠을 자러 갑니다 대소변을 보기 위해 집 안의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그 안에 신발을 발견하고 이상하다 느낀 여교사는 집 밖으로 나가 뒤편 정화조 쪽을 살펴보다가 열려있는 정화조 뚜껑 안쪽을 봤는데 사람의 다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정화조 의문사 사건 福島便槽内変死事件


여교사는 급히 학교로 가서 교감과 동료 교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학교측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신고를 받고 온 경찰과 소방단원들은 정화조 안에 사람의 시신을 확인하고 발을 잡아당겨서 꺼내려 했으나 정화조 구멍이 너무 좁아서 중장비를 동원해서 정화조를 파서 깨부시고 안에있던 시신을 꺼낼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화조 안에 시신은 건장한 남성이였고 윗옷을 벗은채 정화조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벗은 윗도리는 가슴에 돌돌 말아 굳게 쥐고 있는 상태로 무릎과 팔꿈치에 긁힌 상처만 있을뿐 별다른 외상이 없었고 저체온증과 흉부순환장애로 숨져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일본 미제사건 정화조


정화조 안에서 죽었던 피해자는 교사 숙소에서 10분정도 떨어져있는 마을에 사는 26살의 남성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이 남자가 교사를 훔쳐볼려고 정화조에 들어간후 다시 빠져나올려고 했지만 너무 좁은 나무지 빠져나오지 못해 갇혀서 얼어죽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믿을수 없는 판단이라며 확실한 재수사를 요청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때 밴드활동을 했으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유지보수 회사에 직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활발하고 예의바른 청년으로 마을 사람들하고도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마을의 행사나 결혼식이 있으며 이 청년이 도맡아 했을정도라고 합니다


의문사


여교사를 훔쳐볼려고 정화조에 들어가 죽어다는게 믿기지 않는 유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4천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재수사를 촉구하는 서명서를 경찰에 제출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건의 의혹점이 있습니다 당시 2월말정도였고 일본 북부의 후쿠시마 지역으로 인간이 충분히 얼어죽을 만큼의 환경이였고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윗옷까지 벗고 오물이 차있는 정화조로 들어갔다는 점과 피해자의 구두 한짝은 정화조 안에 있었는데 다른 한짝은 피해자의 집 근처 제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의문점은 사망시기는 시신 발견 2틀전 26일이였고 죽기전 행적은 24일부터 불분명했다고 합니다 이 피해자는 23일 송별회에 참석,다음날 새벽 1시에 술집을 나서 집으로 돌아온뒤 24일 오전 10시쯤에 아버지에게 외출한다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후 피해자의 행방은 찾을수 없었고 피해자의 승용차만 교사 숙소 근처 농협 주차장에서 열쇠가 곶힌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일간 어디에서 생존해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후쿠시마 정화조 의문사 사건이 발생하고 22년이 지난 2011년 후쿠시마 원자벽 발전소 사고와 관련된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죽은 청년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던 회사 직원이였다고 합니다 1989년1월6일 후쿠시마 제2원자력 발전소에서 재순환 펌프의 부품이 깨졌고 깨진 부품의 일부가 원자로 안에 끼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1988년 연말부터 재순환 펌프에 이상이 있다고 알려지만 이를 무시하고 원자로를 계속 가동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당시 원자로의 책임자는 신년 휴가를 간 상태였고 대신 보고 있던 상황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도쿄전력 본사에서 추궁을 받고선 후쿠시마로 돌아가는 길 우에노역에서 투신해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자살한 직원은 정화조에서 의문사 당한 청년의 동료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화조에서 죽은 청년은 자살한 동료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의문사를 당한게 아니냐는 겁니다


여교사를 훔쳐볼려고 더러운 정화조 안으로 힘겹게 들어가 봤다는점이 말도 안되는것 같습니다 그 좁은 통로를 나올지 못할것도 예상했을텐데... 누군가의 의해서 수면제을 먹인뒤 강제로 정화조에 넣어서 얼어죽게 만들어 죽였던게 아니였을까요?

이 사건은 짜여진 각본이 아니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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