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8. 20:38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RMS 타이타닉(RMS Titanic)은 영국에서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중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1,514명이 사망한 해난 사고 중 가장 큰 인명피해였다

 

타이타닉호 침몰


RMS 타이타닉은 첫 항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가운데 하나였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가 운영한 여객선으로 세 척의 배를 운용하였으며 RMS 타이타닉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승객들은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고 대다수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승선 인원은 2,233명이었다
타이타닉호 선내에는 체육과, 수영장 등 호화스러운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느슨한 규제 때문에 구명정은 20척밖에 없었다 구명정의 정원은 1,178명이었다

 


사건 발생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경, 갑판 선원 프레드릭 폴리트는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확인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출항 당시 쌍안경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빙산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폴리트가 빙산을 발견한 후 종을 울리고 선교에 전화를 보고 했다 조타실에 있던 6등 항해서 제임스 무디는 전화를 받고
곧바로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를 했다 빙산을 확인한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은 곧바로 좌현 전 타를 명령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를 전속 후진으로 돌리라는 기관실에 지시를 한 후 보일러실의 방수 격벽이 닫힐 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수는 지시에 따라서 왼쪽으로 키를 돌렸고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했으나 빙산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결국 배를 돌리지 못했다 빙산과 충돌하여 주갑판이 함몰되면서 우현에 구멍이 나버렸다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의 지시로 빙산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타이타닉호는 멈춰 섰고 기계가 더 이상 작동이 되지 않아 움직이질 못했다

보일러실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승객들은 배에 충격을 감지함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타이타닉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되어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 사고에선 역부족이었다 4월 15일 0시 15분, 조난 신호 CQD (Come Quick Danger)을 발신해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을 했다 20km 거리에 정박 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1명밖에 없었던 터라 피로 누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고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응답해 전속력으로 왔지만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하지만 2시 20분경 이미 타이타닉호는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탈출 상황, 당시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지만 승객들에게 곧 침몰한다고 알리지 않았다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혔고 좌현과 우현에  2등 항해사 찰스 라이 톨러와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보트를 내려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그마한 배 보다 여객선이 더 안전해 보였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몇 분 후 위험하다고 감지한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구명보트에 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2등 항해사 라이 톨러는 선장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울 것을 건의했고 선장을 승인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여자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라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당시 여자와 아이들을 태우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구명보트에 더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태우지 않았던 것이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랄 판에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정원을 오버하고 사람을 태워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증언으로는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배 밑 보일러실에는 화부들과 기관부원들이 물로 인해 보일러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계속 밀려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하갑 판부터 물이 밀려오기 시작해 배는 점점 침수되기 시작했다
배가 서서히 기울어지자 혼란에 빠진 승객들은 구멍 보트에 타기 위해 보트를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물에 뛰어들어 보트까지 헤엄쳐갔다
그 와중에 무선사 잭필스와 헤럴드 브리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냈고 하늘에 로켓을 계속 발사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는 조금만 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선박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뭔가 트집을 잡으려던 미 해안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배가 점점 침수되고 기울어졌지만 수백 명의 3등실 승객들을 여전히 배에 있었다 이 가운데 존 애드 워트 허트와 승무원들이 구석구석 돌아다닌 끝에 3등식 승객들을 찾았고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었다

1시 30분경,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승객들은 필사적으로 구명보트를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고 라이 톨러는 5등 항해서 로우에게 허공에 대고 총을 쏘라고 지시한다 혼란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이에 승객들은 배 후미 쪽으로 몰려가서 구명보트를 타려고 했지만 끝내 타지 못하고 배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2시 5분, 접이식 보트 D가 마지막으로 바다에 내려졌고 배에 있던 사람들은 구조 배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 메이시 백화점 소유주 노부부였다 남편 이사도라 슈트라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구조되기 전까지 구명보트에 타지 않겠다면 승선을 거절했고 그의 아내도 같이 승선 제안을 거절한 후 배에 남아 운명을 같이했다

 

타이타닉호 선장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2시 10분,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 왕 중에 월리스 하트리는 구슬픈 찬송가를 지휘하면서 배에서 마지막 연주를 시작했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2시 15분 ~ 17분 사이, 배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통산사 잭 필립스와 조수 헤럴드 브리드는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내고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후 굴뚝 1이 선교 쪽으로 쓰러지면서 사람들을 덮쳐버렸고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갑판을 타고 미끄러졌다
2시 18분 2번 굴뚝 쪽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폭발하면서 무너져내려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름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정전이 생기고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이어 선수 부분이 잠기고 분리되어 다시 기울면서 침몰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수되어 침몰하였다

2시 20분, 배가 완전히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비명을 지르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2℃였다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현장에 돌아가 사람들을 구조하자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끌어당겨 물에 빠질 거라는 걱정에 포기를 하고 만다 그나마 현장에서 가까이 있던 보트에서 사람들이 헤엄쳐와 몇 명이 구조됐을 뿐이었다 

2시 40분, 동사하고 익사해 가면서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소리가 점점 없어졌다 잠시 후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이미 30분 안에 사망한 상태였으며 4명만이 살아남아 있는 상태였다

구조인원,사망인원

탑승인원 2224명, 사망자 1514명, 구조된 생존자 710명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을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 지냈다
1등실에 탑승한 어린이 중에서는 당시 2살이던 헬렌 로레인 알리슨 양만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했으며 2등실에 탑승한 어린이는 전원 구조되었다. 반면 2등실에 탑승한 성인 남자 승객은 168명 중 겨우 14명만 구조되어 92%에 달하는 인원인 154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부자들과 사회 각계층의 고위인사들은 1등실에 탑승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구조되었지만 3등실에 탑승한 이민자들은 과반수 이상이 구조되지 못했는데 특이하게 이민자들보다도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많이 구조되었다. 하인들의 경우 고위인사들을 보좌하기 위해 1등실에 탑승한 상태였는데 해당 하인의 주인들이 자신의 하인을 구조하라고 승무원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3등실의 생존율이 가장 낮은 이유는 가장 낮은 구역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구역이 잠겨 있었고 배에 친숙하지 않은 승객들이 길을 헤맸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승무원들이 이들을 통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타이타닉호 침몰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으로 가는 중이었다.
망원경 보관함 열쇠도 항구에 두고 왔고, 달빛도 없었던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빙산의 대부분은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또한 조타수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동안 우현 전타와 좌현 전타를 헷갈려했다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격벽 구조에 문제가 있어 해수가 하나둘씩 흘러갔다. 게다가 충돌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계속 전진하였다.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호의 유일한 무선사 에반스는 타이타닉호의 조난신호 발신 당시 통신장비를 끄고 자고 있었다.
3등객 승객들이 탈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후에는 대부분 나오긴 했지만 이미 많은 구명보트가 떠난 상태였다. 구명보트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안됐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라는 판에 많은 수의 구명보트가 꽉 채우지 않은 상태로 보내졌다.
타이타닉을 제조할 때 사용한 철의 강도가 문제였는데 이 당시의 기술로는 현재 조선에 사용하는 수준의 철을 제조할 수가 없었다. 즉, 황이 너무 많이 함유되어 강도가 약해진 철을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일부에서 주장하는 저질 철을 썼다는 의견과 달리, 타이타닉에 쓰인 철강은 당대 최상품에 속했다
 

1985년, 미국 심해 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 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훼손도 된 부분이 있었고 뒤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연돌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를 뭉개고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하였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