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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협객 최고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4. 5. 13:48

대한민국 협객 시라소니 이성순, 본명은 이성순 전주 이 씨로 1916년 2월 29일생이다 1983년 1월 25일 서울 성공 구 군자동에서 사망했으며 개신교를 믿었으며 가족은 아버지 이기정, 배우자, 이진옥, 자녀 술하 2남 5녀, 막내아들 이의현, 형 이성덕이다

가운데 시라소니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17세부터 신의주와 만주 사이를 오가며 기차에서 밀수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절 이성순은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다시 열차에 올라타 목숨을 건졌다 이때부터 이성순은 스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라소니가 이름을 알린 계기는 이북 싸움꾼 박두성을 이기고 나서부터다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 등 함께 만주와 중국을 누비고 다녔었다 스라소니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고 훈련을 해왔다 특기는 먼 거리에서 뛰어들어 공격하는 공중걸이 박치기, 니킥, 팔꿈치 공격, 단검이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넘어와 이북 출신의 서북청년단 이화룡과 정팔과 함께 활동을 했다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부 청년단은 KLO부대원으로 전쟁에 참전했었고 공수 강화훈련을 교육도 했었다
한국전쟁 이후 명동파의 이화룡과 동대문파의 이정재가 둘로 나눠다 라소니는 1.4 후퇴 당시 부산에서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일로 인연이 닿았다

 

이정재


하지만 1953년, 동대문파 이정재에게 동대문 점포 양도를 요구하다가 동대문 상인연합회에 린치 당하여 중상해를 입었고 이정재의 부하 이석재에서 한 번 더 폭행당했다 그간 라소니는 KLO대원들을 위해서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빌렸었다 이후 점포 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에 5억 원에 달한 거금과 상가의 점포를 달라는 더 큰 요구로 부하 김사범, 조열승, 임화수는 물론 이정재 또한 분노하고 자존심이 상해 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정재와 동대문 사단

이 사건은 시라소니 동대문 린치 사건으로 당시 라소니의 부상이 너무 참혹해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부하들을 시켜 사무실로 유인해 흉기로 라소니를 잔혹하게 린치 해 종로 5가의 반도 병원으로 옮겨 진후 얼마 뒤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며 후환을 없애겠다면 이석재는 혼자 백병원으로 찾아가 쇠막대로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렸다
난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정재는 이석재의 뺨을 때리면 크게 호통쳤다고 한다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들의 방해로 실패를 했으며 폐인 생활을 하게 된다

 

임화수

임화수는 처세에 능한 싸움꾼으로 연예가의 대통령이자 동대문의 이인자였다 어린 시절 서울 미나도 극장에서 소매치기를 하면서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광복 후 김두한과 이정재의 도움으로 미나도 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아 영화계의 대부로 급부상하여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정재가 은퇴후 동대문 사단을 물려받아 1인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을 경호하는 곽영주/오른쪽은 곽영주 사형집행 마지막 모습

곽영주는 30대 나이로 경무관으로 승진해 이승만 부부의 총애를 받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곽영주는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와 유지광과 친하게 지냈다
곽영주는 경찰학교 시험에 3번이나 낙방해으나 이정재의 백으로 경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지광

유지광은 이천 출생으로 단국대를 다녔으며 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후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의 행동대장급으로 일했었다 제1공화국 당시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렸다 행동대장 김동진에게 배신을 당하고 신뢰가 높은 행동대장을 원했던 이정재는 사돈인 유지광을 끌어 들었고 특별히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나 조직 내의 특급 비밀이나 중요한 이권이 걸린 문제 등을 모두 유지광에게 맡겼다고 한다 
조직 내부에서의 서열은 이정재가 위였으나 고모부의 동생이라 항렬이 높은 덕에 이정재가 사돈이라고 존칭을 해줬다
실제 유지광은 싸움보다는 머리가 좋았다 뛰어난 언변 실력으로 상대방을 잘 설득했으며 조직 내의 책략을 다 맡을 정도였다

 

 

이후, 3.1 공수 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해 장면,신익희의 경호를 맡았다 5.15 군사정변 이후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일제히 검거할 때 라소니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러나왔다 그리고 당시 구속 중이었던 이정재는 라소니 린치 사건으로 심문을 받았는데 라소니는 린치 사실을 부인하면 이정재를 감쌌다고 한다

 

 

라소니는 서부 청년단들을 교화시키며 생활을 했고 딸들과 친척의 도움으로 단칸 셋방에서 지냈으며 1983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27일 오전 11시 발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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