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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판타지 호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중 사라지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1:45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가 자신이 만든 박스에 풍선을 매달고 태평양 횡단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미제사건이다

1940년,도쿄도에서 피아노 조율사 일가에 태어나서 국립 음악 대학 부속 고등학교 를 졸업 후 야마하 계약 직원으로 도쿄도 고가네이시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을 한후 44 살 때 음악 교재 판매 회사 뮤직 앙상블을 창업하여 피아노를위한 마이너스 원 테이프 (오케스트라 에서 특정 악기를 분리하여 녹음 한 연습용 가라오케 음악 테이프)의 판매를 시작하지만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86년,긴자에서 음악 살롱앙상블을 개점에 실패후 마작 게임장과 커피살롱,펍 레스토랑등을 운영하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다 1990년 4억 ~ 5억엔의 빚을 지고 파산해 빚에 쫓기게 된다


풍선아저씨 '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


어느 날 그는 비닐 풍선 26 개를 붙인 곤돌라 ( 비행선 )을 만들어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해 빚을 갚겠다며 채권자들에게 말을 했다..


1989년 3월 25일,요코하마시에서 개최된 요코하마 박람회 세입자 출점을 해서 거액의 돈을 빚지고 판타지호를 출품하게 된다 하지만 회장 내 전시 위치도 좋지않았고 박람회 자체도 흥하지 않자 관광객 유치로 데즈카 오사무가 디자인한 요코하마 박람회의 마스코트 부루아짱 인형을 만들어 촬영,사인회를 실시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에 흥하지 않자 불만은 품은 스즈키는7월30일 새벽 4시부터 7시 동안 열주에 부루아 짱 인형을 입고 높이 30미터의 철탑을 기어올라 농성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박람회 관계자는 119에 신고를 했고 구조 대원이 사다리 차량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설득하지만 스즈키는 아니아니 포즈를 하는등 거부 한후 1시간 가까이 철탑 위를 배회했다


박람회 협회 측에서 1 일 10 만명의 관람객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3 만 ~ 4 만명으로 드러나고 흥하자 않자 스즈키는 10 월의 폐막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 요코하마 박람회 협회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거에 대해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4월 17일,에는 풍선으로 날아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후츄 경찰서 방범과의 경찰관 의 제지를 듣지 않고 도쿄도 후추시 의 타마가와 하천 부지 에서 치바현 의 구주 쿠리 바닷가 를 목표로하고 오후 12시 45 분에 헬륨 풍선으로 날아 올랐지만 자신이 앉은 의자에 5 미터와 2.5 미터의 풍선 각 2 개를 직접 묶어 달고 추 15kg의 모래 주머니 2 개가 밖에 급상승 약속 고도 400 미터 5600 미터 고도에 도달하자 라이터 불로 구워 5 미터의 풍선이 분리를 하게 된다

이 후 고도가 낮아져 오후 1시 40 분경에 출발 지점에서 24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도 오타구 大森西 일곱 쵸메의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했다. 


불시착으로 왼손에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사과한뒤 성공하면 다음은 하와이를 목표로 예정이며 재차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첫 비행 후, 스즈키는 NHK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을 하게 되었고 풍성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92 년 11 월 23 일 당시 52 세였던 스즈키는 헬륨 이 들어간 풍선 을 다수 붙인 곤돌라 " 판타지 호 "시험 비행을 비와코 호반에서 실시했다.

반년이 지난 1992년11월23일,도시샤대학 교수 미와 시게오(三輪茂雄)와 학생 7명,수많은 취재진들이 모인가운데 스즈키는 헬륨 풍성 여러개를 단 판타지 호의 시험 비행을 시작했다 


이날 명목은 어디 까지나 200 미터 또는 300 미터 상승 실험 것이었다 교통부 (현 국토 교통성 )는 안전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에 비행 허가 신청을 수리하지 않고, 어디 까지나 지상에 계류되어있는 시험 비행하는 조건으로 수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만약 태평양 횡단을 결행 한 후 언론이 호들갑 집으로 몰려 오는 것 같다"고 가족 호텔에 숙박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하고 있으며, 스즈키는 비밀리에 미국까지 비행을 강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시 20 분경 스즈키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뒤 주위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진채 로프를 풀고 비와호 호수에서 미국 네바다준 샌드 마운틴을 향해 출발했다

미와 교수는 어디로 가는 건지?라고 물어보자 미국이예요 제트 기류를 타면 40시간 내에 미국에 도착할거라는 대답을 남기고 떠났다


호텔에있는 가족에게 밤10시부터 휴대 전화로 1시간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해가 아름답다,괜찮다등을 연락을 한후 다음날 아침 6시 아내에게 '갈 곳까지 갈테니 갈까 걱정하지 네!"마지막 전화되었다. 이후 휴대 전화는 불통되었다



24일 자정부터 SOS 신호가 발신되고, 25 일 8시 30 분 해상 수색기가 출동해 미야기 현 긴카 산 앞바다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해상에 "판타지 호"를 발견하게 된다 스즈키는 수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괜찮다면서 SOS신호를 중지했다 이후 3시간동안 2,500m ~ 4,000m 상공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판타지 호가 구름속으로 사라지게되자 수색기는 스즈키의 추적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판타지 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였다...


이케다 마나부는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에서 "생존은 어려울 것"라고 대답하고있다 판타지 호의 비닐 풍선의 소재가 염화 비닐 라면 하루에 약 10 %의 비율로 가스가 공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래 못버티고 바다에 빠져 사망했을거라는 예상했다


마지막으로 판타지 호가 목격 된 때 판타지 호는 긴카 산 앞바다 800km로 고도 2500m 시속 70km에서 북동쪽으로 향하고있어 기상청 간부도 항공 평론가 아오키謙知 도 함께 러시아 캄차카 반도 근처까지 도달 한 이 아닐까 추측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1994년까지는 호적상에는 살아있는것으로 되었으나 일본 민법상 실종 후 7년이 경과되면 자동으로 사망처리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사망한 상태다



남겨진 아내는 회사의 동업자이며 집이 저당에 들어 있고 빚은 남겨진 아내가 계속 지불하고있었다 (2006 년)이후 아내는 이혼 절차를 혼자한뒤 2016년에 재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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