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괴담에 해당하는 글 255

  1. 1955년 미국 홉킨스빌 고블린 외계인 사건2019.03.17
  2. 일본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2019.03.15
  3. 일본 오사카 은행 가짜 야간금고 사건2019.03.15
  4. 일본 영구미제사건 3억엔 사건 완벽한 범죄2019.03.14
  5. 일본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2019.03.14
  6. 일본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2019.03.14
  7. 일본 도쿄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2019.03.13
  8. 일본 도쿄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2019.03.12
  9. 일본 오사카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2019.03.11
  10. 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보험금 노린 사기극2019.03.10
  11. 일본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2019.03.09
  12. 일본 미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2019.03.09
  13. 일본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 미해결 미제사건2019.03.09
  14. 일본 미제사건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북한납치설?2019.03.08
  15. 일본 미제사건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2019.03.07
  16. 일본 미제사건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2019.03.07
  17. 일본 미제사건 파일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2019.03.06
  18. 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 사건2019.03.06
  19. 일본 미제사건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2019.03.05
  20. 1998년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살해사건2019.03.05
  21. 한국 미제사건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2019.03.05
  22. 일본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판타지 호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중 사라지다2019.03.05
  23. 일본 미제사건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2019.03.04
  24. 일본 미제사건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2019.03.04
  25. 일본 미제사건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2019.03.04
  26. 일본 미제사건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2019.03.04
  27. 일본미제사건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2019.03.04
  28. 일본 미제사건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 1년동안 실행된 범인의 연쇄 협박2019.03.04
  29. 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 2년동안 사육 당하다2019.03.03
  30. 제2차 세계대전 일본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22019.03.03

1955년 미국 홉킨스빌 고블린 외계인 사건

실화괴담/UFO∥외계인|2019. 3. 17. 20:18

홉킨스빌 고블린 외계인 사건 (Kelly–Hopkinsville encounter),미국 한 농장에서 외계인 나타나 난동을 핀 미스테리한 사건이다


홉킨스빌 고블린 외계인 사건


사건 발생 1955년 8월21일 저녁,미국 켄터키 주 크리스티안 카운티의 켈리와 홉킨스빌 농장에 있던 성인5명과 어린이7명이 UFO를 타고 내린 고블린,그렘린과 닮은 외계인 12명 ~ 15명을 보게 된다


이 외계인들은 주민들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고 순간 첨 보는 외모에 두려움을 느낀 주민들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외계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창문과 출입구에서 두들기고 부쉬고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렀다



이후 외계인들이 심하게 난동을 부리자 위협을 느낀 엘머서튼(Elmer Sutton)과 빌리 레이 테일러(Billy Ray Taylor)는 외계인들을 향해 총을 쐈지만 죽지 않았다 금속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총알은 팅겨 나가 죽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이 쏜 총알에 놀란 외계인들은 잠시 사라졌으나 지붕에서 주민들을 지켜보면서 혼을 빼놓고 있다가 이리저리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고 반복 하면서 불빛을 뿜기면서 괴기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녔다



그렇게 4시간동안... 외계인들과의 총격전을 벌인후 밖에 외계인들이 없어지자 가족들은 트럭을 타고 경찰서로 도망을 나왔다 경찰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만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경찰들이 농장으로 왔는데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기괴한 불빛을 보았고 땅바닥이 손상되어 있는 흔적을 보자 가족들의 증언을 믿었다고 한다 


그뒤 경찰들이 돌아간후 외계인은 다시 나타났고 새벽 5시까지 총격전이 벌어졌다 5시 이후로 외계인들을 볼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보안관,군인을 농장에 보냈지만 창문과 문쪽에 총 자국만 발견하곤 외계인들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농장 주민들이 본 외계인의 크기는 2피트에서 4피트로 다양했으며 뽀죡한 큰귀,광채의 노란 눈,마른 다리,날카로운 손발톱이였고 몸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은색깔이였다고 한다

또한 하늘을 날아다녔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았으며 위협을 가했지만 무슨 연구라도 하는마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국 한 농장에 나타난 외계인들은 왜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새로온 행성의 인간들이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파악할려고 지켜보고만 있었던걸까?....


UFO,외계인 사건의 역사에서 외계인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인것 같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5. 22:08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鈴木俊之 失踪事件),한 어린이가 밖으로 놀라갔다오다며 나간뒤 행방 불명된 실종 사건이다


스즈키 토시유키 행방불명 사건


사건발생 1965년 7월3일 오후 4시15분경,일본 시즈오카현 이토시 우사미구,스즈키 토시유키(鈴木俊之, 당시 7세)가 밖에 놀러갔다 올게라며 나간뒤 실종되었다 늦은 시간이 되어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는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이틀 후, 한 여성으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3번 걸려 왔다 


이틀이 지난 7월5일 낮 12시30분쯤,200미터 떨어진 인근 호텔에서 한 여성이 유킨 군 집으로 전화를 걸려왔다


집 근처에 아이가 없어진게 사실입니까?그럼 틀림 없겠네요? 라고 말한뒤 끊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인근에 사는 유키 군의 친척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마찬가지로 여성이였다


여성:아이가 없어진게 사실인가요?

친척:예

여성:내가 납치 했다 오늘 3시까지 아타미 역 1 번 홈에서 ...

놀란 친척은 순간 수화기를 던져버렸고 수색대에 전화해 알렸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지만 전화는 끊겨 있었다


같은 시간 유키 군의 아버지의 직장인 여관에 전화가 걸려왔다 또 그 여자 였다

유키 군의 아버지(이름을 불렀다) 계신가요?라고 말한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계속 이상한 전화를 받은 가족과 친척들은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 후 유키 군의 어머니와 경찰 2명은 아타미역에서 범인을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7월6일,동네 아이들의 유키 군을 목격했다는말에 유키 군이 목격된 산으로 가서 수색 했지만 찾을수

없었다

같은 날,인근 생선 가게에 전화가 걸려왔고 또 그 여자였다 4살 난 소년이 전화를 받았다


여성:뭔데? 토시 짱?


곧바로 소년의 할머니가 전화를 받아 누구냐고 물어보자 꺼져라고 한뒤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후로 그 여성으로부터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사건 전 인근 강에서 유키 군이 벌레를 잡고 있었고 여기서 유기 쿤이 납치된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 후 3일째 오전 8시부터 9시반까지 유키 군 집으로 오는 국도에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왕복했으며 뒷자리있던 여자가 창문을 내리고 유키 군의 집 쪽을 보면서 주시 하고 있었다


또한 집에서 100미터 거리에 있는 유키 군의 아버지가 일하던 여관방에 휘집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전기는 켜져 있었고 부엌에는 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한 침대 이불속에는 장난감이 있었고 립스틱이 묻은 목욕 타워이 발견되었다

이 방은 4월에 딱 1번 사용된 방이었다...


이 정황으로 보아 3번이나 같은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1번은 유키 군의 아버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유키 군이 실종된 3일째날 한 여성이 차를 타고 유키 군의 집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킨 군 아버지가 일하던 여관에 유키 군을 데리고 와서 잠시 머물렸다

유키 군을 납치한 범인은 이 여성이 맞다 그리고 왜 유키 군을 납치 했을까? 돈을 요구하지도 않은채 유키 군을 납치 했다는 말만 한뒤 전화를 끊었다


유키 군 아버지와 내연 관계였거나 옛 애인이 아니였을까? 무슨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키 군 아버지에게 원망이 있었던게 아니였을까?

  

여관방에 범인이 여러 흔적이 있었지만 1965년에는 과학수사가 어려웠다 DNA 채취가 어려웠던 시대라 범인을 잡는데는 힘들었다 육감과 직감으로 수사를 하던 시대라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쉬웠었다

인근 강에서 유키 군이 목격된 이후로 더 이상 볼수 없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오사카 은행 가짜 야간금고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5. 17:37

오사카 가짜 야간금고 사건(大阪ニセ夜間金庫事件),일본 산와은행 우메다 지점에 가짜 야간금고를 설치해 고객들이 예금한 돈을 절도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일본 오사카 가짜 야간금고 사건


사건발생 1973년 2월25일 저녁 8시40분,일본 오사카시 키타 구 우메다 의 위치한 산와 은행 우메다 북쪽 지점의 야간금고 벽면에 안내문이 부착 됐다



'이용 고객님들 열쇠 접속 부분 고장으로 인해 금고 개폐가 불가능해졌으니 지점 전용 문에 위치한 임시 금고를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임시 금고 안내문에는 열쇠는 필요없습니다 바로 돈을 넣고 우측 레버를 아래로 끝까지누르면 영수증이 나옵니다 또한 이 금고는 임시금고이므로 영수증을 반드시 챙겨가시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은행 부근에는 상가에 점포가 많았다 점포상들은 당일 번돈을 매일 은행에 예금을 했다 의심할만한 이상한 안내문이였지만 은행을 온 고객들은 은행안이라는 생각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임시금고를 이용했다


그러는 와중에 은행 근처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점장(당시24세)이 매출 30만엔을 들고 은행에 찾았다 그 역시 안내문을 보고 임시 금고로 이동을 했고 돈 봉투를 넣으려는데 안에 뭔가가 콱 막혔는지 봉투가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자 점장은 경비센터에 신고 했다 신고를 받고 온 은행 경비원과 은행 직원이 왔는데 뭔가 이상 하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은행측으로부터 야간금고가 고장났고 임시 금고를 설치했다는 말을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경찰에 신고 했다



조사 결과 임시 금고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가짜 였다 보통 금고와 달리 합판에 스테인리스 판을 붙이고 테투리는 알루미늄 섀시를 사용하고 간판 뒤에는 수은 전지를 설치해서 빛나게 했다 얼핏 봐서는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것 처럼 보였다

게다가 금고의 크기는 은행 금고의 크기와 일치했다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진 금고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못챘다 더구나 의류매장 점장의 돈 봉투가 들어가지 않은 것도 금고를 너무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30분사이, 가짜 금고안에는 2.576만엔이 들어있었고 콱 차있었다 그래서 의류매장 점장이 돈 봉투를 넣으려고했으나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가짜 금고를 완벽하게 만들어지만 돈을 비우는걸 계산하지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현금 수송 담당자들이 와서 기계안의 현금을 빼서 비워주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범인이 남긴 증거물이 많아서 범인을 금방 잡을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가짜 금고가 만들어진 경로가 어디인지를 집중 수사 했다

 

범인은 가짜 금고 설치는 4분만에 이루어졌다 오후 8시 40분, 25명의 사람들이 금고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금고의 열쇠 구멍에 철 조각을 삽입한뒤 간판을 들고 다른 쪽에서 가짜 금고를 설치 했다

설치가 끝난후 바로 가짜 금고를 이용할려는 고객이 들어온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였다


가짜 금고를 설치후 적당한 시간을 가늠해 돈을 회수에 오려고 1층 비상 계단에 담배를 피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류매장 점장의 신고로 은행 경비원과 은행직원이 오게되자 범인들은 돈도 못 챙겨가고 황급히 도망 갔다

1층 비상 계단에는 담배 꽁초,호테이 오사카 다방 성냥갑,작업복,포대자루가 발견 되었다


한달 전인 1월30일,고베 이쿠타 구내의 슈퍼에서 야간금고 플라스틱 플레이트판을 주문 했었고 금고의 본체가 된 합판은 같은시기 이타미 시내의 건축 자재 상점에서 구입 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고의 설치와 돈회수를 생각하면 범인은 3명이상이 유력 했다

그리고 범인은 간판에 「猶」「儘」「成可く」など、旧漢字や旧仮名遣い 옛 한자를 사용한것으로 보아 나이대는 중년 이상으로 추측 했다

가짜 금고에는 범인것으로 보이는 지문이 발견되었지만 대조 결과 신원이 파악 되지 않았다


사건 발생후 3개월,경찰로 시민의 제보가 있었다 두 형제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 형제는 인근 도시에 살고 나이는 30~40세로 화물 관계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잘 되지 않았다 형제는 사업하기전 현장 인근 상가와 판금 도장 관련일을 했었고 사건 직전에 금전 문제를 겪었다

두 형제가 의심스러워 제보를 했다는 지인의 신고였다

이후 경찰은 두 형제를 조사했지만 관련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하게 끝났다 


에필로그?


가짜 야간금고 사건이 벌어진후 2개월이 지난 1973년 5월1일, 오사카 다이마루 백화점에 협박장이 날아왔다

3,000만엔의 현금을 내놓을것 지시에 불응할 경우 3일뒤 소고 백화점에 사건 하나가 터질거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이마루 백화점 측은 아무일도 안 일어나겠지 하면서 거절을 했다


사건발생 5월4일, 소고 백화점 매트 판매장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 했다 결국 다이마루 백화점 측은 직원에게 3,000만엔이 든 가방을 주고선 경찰과 함께 범인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 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한 승용차를 지목해 드렁크 안에다 돈가방을 넣으라는 지시를 받은후 백화점 직원이 돈가방을 드렁크에 넣었다

그런데 범인과의 연락이 끊어졌고 경찰은 급히 차쪽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었고 드렁크에 있던 3,000만엔이 든 가방도 사라져 버렸다

차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돈가방만 없어진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범인들은 경찰들이 쫓아올것을 대비해서 차 트렁크에다가 트릭을 설치해 두었다

차 트렁크가 닫히는 순간 돈가방은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해두었다 그리고 돈가방이 떨어짐과 동시에 낚싯줄에 걸리게 해서 잡히지 않으면서도 돈가방을 안전하게 가로챌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3,000만엔 돈가방이 사라지게 한 트릭에 사용된 장치가 약 2개월전 산와 은행에서 가짜 금고를 만들때 쓰였던 합판과 동일한 재질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만이 아니였다 1984년 ~1985년까지 1년동안, 교토와 한신 일대에서 괴인 21면상이라고 자칭했던 범인들이 글리코,모리나가,마루다이등 식품 회사들을 상대로 협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으로 불린다 이 범인들은 모리나가 제과에 1억엔을 요구하면서 맨홀 위에 둔 옷상자를 통해서 현금을 강탈하려는 트릭이 가짜 야간금고 사건의 트릭과 비슷했다


모두 관서 지방이라는 점을 토대로 두 사건 모두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범인은 실패를 했지만 성공도 했다 그리고 잡히지 않았다 7 년 후인 1980년에 시효가 성립되었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글 출처:링크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영구미제사건 3억엔 사건 완벽한 범죄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22:20

일본 3억엔 사건(三億円事件(三億円強奪事件),일본 도쿄도 휴츄시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으로 3억엔을 강탈한 일본에서 일어난 희대의 현금 절도 사건이다 


일본 3억 엔 사건


아직까지 범인히 잡히지 않은 영구 미제사건이다 범인의 완벽한 계획에 경찰들은 속수 무책으로 당한 사건이기도 하다..


사건발생 1968년 12월10일, 비가 많이 내리던날 도쿄 코쿠분지에 있는 일본신탁은행 코쿠분지점에서 도쿄 후추에 위치한 도쿄 시바우라 전기(현재 도시바)후츄 공장으로 현금 3억엔이 들은 가방 3개를 실은 현금 수송차량이 출발했다 후츄 공장으로 간 이유는 직원들의 연말보너스와 사무비를 지급할 목적 이었다


수소차량은 1964년형 닛산 세드릭 일반 세단이였고 일본신탁은행 코쿠분지점 은행직원 3명이 타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휴츄 공장에 도착할 무렵 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온 경찰이 접근해왔다

경찰은 손을 내밀어 정차하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수송차량은 영문도 모른채 길가에 차를 정차를 했다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무슨 일이시죠?


경찰:일본신탁은행 스가모지점 지점장의 집이 폭파되었습니다 이 수송차량에도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수송차량을 조사해봐야 합니다


코쿠분지점 은행직원:출발 당시 수소차량의 외부와 내부를 모두 검사를 했기 때문에 이상이 없습니다


경찰: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량 하부를 검사해봐야겠습니다

.....잠시후

경찰:다이너마이트다 곧 폭발 합니다 빨리 도망치세요!

실제 범인이 놓고간 오토바이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을 모두 멀리 대피시킨후 수소 차량을 운전하고 경찰 오토바이를 그자리에 남겨둔채 도주했다


이때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은 자신들을 구하려고 폭탄이 장착된 수소차량을 몰고 사라진것으로 생각 했었다 하지만 몇초후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은 경찰이 타고온 오토바이를 보고선 경찰이 놓고간 오토바이가 가짜라는걸 알았다


경찰 오토바이는 혼다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범인이 타고온 오토바이는 야마하꺼였던것이다


도쿄 전역에 경찰 만명의 인원이 투입되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했으나 범인의 흔적도 못찼고 놓치고 말았다


범인이 보낸 실제 협박장


사건발생전 1968년 12월6일,일본 신탁은행 코쿠분지 지점장 앞으로 협박장이 배달되었다 다음날 오후5시까지 현금 300만엔을 지정된 장소에 여성 직원이 가져오지 않으면 지점장의 집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이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12월7일 오후 5시, 경찰 50명이 잠복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범인이 버리고간 차량


사건 당일, 범인은 치밀할 계획을 세웠다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 하기 좋은 장소에다가 경찰 오토바이를 숨겨 놓았다

범인은 가짜 경찰복을 입고 대기를 탔다가 현금 수송차량이 지나가자 가짜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수소 차량을 쫓아 갔다 수소 차량을 따라 붙은후 짜여진 각본대로 코쿠분지점 은행직원들을 현혹 시켜서 수소차량을 탈취를 해서 도주를 했다

이후 현금 3억엔을 원래 가져온 차량에 옮기고 탈취한 차량을 숲에다 유기 시킨뒤 도주를 했고 경찰의 대대적인 검문이 있었지만 걸리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이 흘리고간 실제 물품


범인은 놓쳐지만 범인이 흘리고간 물품이 무려 120여개나 되서 범인을 잡을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증거품이였다 경찰이 얻은 유력한 단서는 수송차량과 오토바이였지만 뚜렷한 단서 하나 나오지 않았다

헌데 경찰은 오토바이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를 했지만 중요한게 아니라며 배제를 했다 왜 그랬을까? 경찰도 공범이였던걸까?


실제 범인이 버리고간 코롤라 차량과 현금가방



사건 발생 4개월후, 코쿠분지 근처 고가네이의 주차장에서 범인이 탔었던 코롤라 차량을 발견했다 코롤라는 시트에 덮혀있었고 차 안에는 빈 현금 가방 3개가 있었다 코롤라는 도난 차량이었다

A군과 몽타주


몇일후 경찰은 코쿠분지에 살았던 19살의 소년 A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을 했다 불량아의 리더였던 A는 자주 차량을 훔치던 상습 절도범이었다


사건 발생전, A는 학교나 은행,현금 수소차량을 털자고 제안한 사실이 있었다 정황상 A는 운전을 잘했으며 지리에 밝았다 또한 부친이 오토바이 경찰이라 경찰 위장 하는데 유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날 A는 집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했다 왜 자살을 했을까? 의문점이다....


A가 죽은후 현금 수소차량에 타고 있었던 은행 직원들의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어야 했지만 1년전에 죽은 A의 사진을 몽타주로 사용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12월21일, 부정확한 몽타주를 일본 일대에 배포했고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A는 3억엔 사건의 범인이 아니였다 협박장이 보내지던 날 알리바이가 있었고 협박장에 검출된 혈액형과 일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범인은 오토바이를 몰면서 한쪽 발을 지면에 끌면서 끈었다는 것이다 발이 지면에 닿을려면 최소 키가 170cm되어야 한다 하지만 A의 키는 165cm에 불과 했다


이후 경찰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탈취된 현금 중 유일하게 알고 있던 500엔짜리 지폐의 일련번호 2,000개를 공개했으나 범인을 잡는데 실패 했다

7년간 10억엔의 예산을 부으면 17만명의 경찰을 투입하고 11만명의 용의자를 지목했으나 수사에는 진적이 없었다 



31년이 지난 1999년,한 여성이 과거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해 놓은 워드프로세서 파일이 유출됐다


워드프로세서 파일은 신주쿠 어느 가게의 단골손님인 남자가 가게 사장이었던 여성의 컴퓨터에 문제의 파일을 보고는 몰래 훔친 것이었다


여성의 일기는 3억엔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후 남자는 워드프로세서 파일을 출판사에 넘겼고 그 해 서적으로 나오면서 화제가 되었다


나는 내가 3억엔 사건의 실행범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표현한 것은 그때 나 자신에게 스스로의 의사가 있었는지 분명치 않아서이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친척집을 전전하던 여고생에게 있어 신주쿠의 재즈바 재즈 빌리지는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

그곳은 떨어져 살던 오빠가 매일 같이 친구들과 상주하던 곳이었다


당시 극렬한 학생운동 전개와 시대의 파도를 비웃으며 오빠와 친구들은 시끄러운 재즈에 몸을 던졌다

나는 그곳으로 처음 오빠를 보러 간 날 오빠의 친구 무리에서 키시를 만났다

도쿄대생인 키시는 스마트한 데다 무언가 오빠의 친구 무리와는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곧 나는 오빠의 친구 무리 사이로 녹아들었고 키시와도 점차 친밀해졌다

운전을 해보고 싶어 하던 나에게 키시는 오토바이와 차량 운전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 모르게 나랑 키시는 비밀스레 가까워졌다


어느 날 키시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키시는 나에게밖에 부탁할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고

나는 내가 필요하다는 말에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승낙했다 


키시의 부탁이란 도쿄 시바우라 전기 후츄 공장으로 향하는 현금 수소차량을 빼앗는 것이었다

키시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나는 몇 달 동안이나 키시와 함께 예행연습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키시와 범죄를 모의하던 그때가 나에게 있어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1968년 12월10일,나는 키시의 계획에 따라 뒷머리를 질끈 감아올리고 현장으로 향한 자리에서 실행범이 되어 현금 수소차량을 빼았았다

키시는 계획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즉시 중단하고 현장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했지만

폭우가 쏟아지고 커버 시트가 오토바이 뒤에 걸리면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현금 수소차량을 따라 잡을수 있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현금 수송차량을 빼앗은 뒤 약속지점에 차를 타고 대기중이던 키시를 만났고 그곳에서 키시에게 현금 가방을 넘기고 나는 미리 준비된 도난차를 몰고 지정된 곳에 유폐시켰다


이후 키시와 나는 얼마간 평소처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냈지만 키시는 빼앗은 현금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나 또한 키시에게 묻지 않았다

거물 정치가의 서자였던 키시는 아마 사건이 범국민적인 관심거리가 되었을 때 스스로 범인임을 자수하여 희생함으로써 내각에 쏟아질 비난을 투쟁의 디딤돌로 만들려던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버림받은 아버지로부터 복수를 꿈꿨던 것이거나 말이다 키시는 사건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져도 나는 여자이고 무현허이니 걱정하지 말고 수험공부에 매진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키시의 말은 맞았다


더불어 키시는 만일을 대비해 빌려두었던 집의 열쇠를 쥐여주곤 나에게 수험이 끝나면 그곳에서 살아도 된다는 말도 해주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키시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했고 키시는 나에게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다고 대답했다


1969년,수험이 끝나고서 나는 키시가 구한 집에서 키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키시는 반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키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에도 지쳐갈 때 즈음 나는 처음부터 집안에 있던 어느 책에서 키시의 메모를 발견했다

책 본문 사이로 마치 낙서처럼 적혀있던 그 메모로 나는 키시가 말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알수 있었다


소녀를 만났다 맑은 눈을 한 소녀는 올곧게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아마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걸 전할수는 없다

나는 그녀의 눈을 더럽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까.


내 오빠인 리키는 1990년 46세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재즈 빌리지 무리 중 작가 지망생으로 오빠와 가장 친했던 켄지도 오바를 뒤따르듯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키시는..키시는 지금도 여전히 실종상태다 키시는 내 첫사랑이다..


여성의 일기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3억엔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자들과는 달랐다 범행 전,범행 당시,범행 후의 경위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록 했다


사건이 벌어지던 현장 부근에 장시간 정차 중인 차량이 목격되었다 차량에는 한 남성이 타고 있었다 이 차량은 범인이 수송차량에서 갈아탔던 차량과 나란히 목격되었다


경찰 오토바이를 타고 현금 수송차량을 탈취한 범인 얼굴

사건 직후 경찰은 검문 대상을 남성으로 제한했었다 범인이 절도 했던 또 다른 차량은 낫산 스카이라인 2000GT에서는 재즈바에서 유통되는 성냥과 여성의 귀걸이가 발견됐다

수송차량에서 다른 차량으로 갈아타던 범인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는 차량이 너무 빨리 달렸고 비가 마니 쏟아져 범인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본것은 범인의 뒷머리가 장발이었다는 증언이었다


경찰의 지목했던 A군과 이 여성의 애인이였던 키시가 동일인물이 아니였을까?

 

A군이 3억엔 수소차량을 탈튀한 범인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불명예를 피하고자 아들을 독살시킨것으로 보인다는 추측이 있었다


사건 당시. 범인이 수소차량에서 다른 차량과 동일한 몸델의 차량을 현장 부근에서 홀로 운전 중이었던 여성의 사진이다 당시 운집한 경찰을 찍던 시민에 의해 찍힌 사진이다 


이 사진과 일기장,A군의 자살?범인은 A군(키시)와 리키의 여동생이 아니였을까?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15:47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事件(いのかしらこうえんバラバラさつじんじけん),일본 도쿄 이노가시라 공원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아 영구 미제사건 이 되었다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1994년 4월 23일,오전 도쿄도 미타카시에있는 이노 카시 라온시 공원의 쓰레기통 비닐 봉투에 들어간 인간의 발목이 버려져있는 것을 우연히 청소원 여성(당시59세)이 발견했다

처음에는 생선이나 돼지고기라고 생각하고 고양이 먹이를 줄려고 열어볼려다가 사람의 다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공원 일대를 수색했고 총 27개에 절단 된 팔다리 몸통의 일부가 봉투에 담겨져 있었고 7곳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신체 부위가 반투명한 봉투에 이중으로 싸여져 있었고 머리와 일부의 몸통은 발견되지 않았다 손발의 지문은 모두 깍여져 있었지만 남아 있던 지문과 DNA를 발견해 피해자의 신원 파악을 알아냈다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사는 1급 건축사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 당시 35세)로 밝혀졌다


당시 발견된 쓰레기통의 시체들


시신은 관절이나 장기등을 무시하고 전기 톱으로 20cm 간격으로 정교하게 절단되었다 이것은 공원의 쓰레기통 투입구 크기인 세로 20cm, 가로 30cm로 거의 일치 했다

또한, 절단된 시체는 혈액 한 방울 남김 없이 빼갔다 혈액 없이 시체를 절단하려면 의학지식이 필요했다 시체는 3가지 방법으로 절단 되었고 범인은 한명이 아니 2,3명이상이라는 추측이다


발견되지 않은 머리와 일부 몸은 어디로 갔을까? 일각에서는 시체 토막들이 4월23일 이전에 버려져 쓰레기차에

실려 쓰레기 매립지에 이미 버러져 찾을수 없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피해자의 발걸음과 목격담


4월21일 오전 7시30분,직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4월21일 오전 8시30분,미나토 구 신바시의 건축 사무소에 출근

4월21일 낮,아내에게 술자리가 있어 늦게 간다고 전화

4월21일 오후 5시 30분,옛 동료들과 술자리에 참가

4월21일 오후 11시30분,신주쿠 역에서 옛 동료2명과 헤어졌다

4월22일 오전 0시10분,집근처역인 키치죠지 역 도착

4월22일 오전 0시15분,키치죠지 역에서 2명의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것을 봤다는 여성의 증언

4월22일 오전 0시~1시경,카와무라 세이치 자택근처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주민 사람들 증언

4월22일 오전 9시경,이노카시라공원 2km 거리에 있는 스기나미구 구가야마 근처 편의점에서

대량의 쓰레기 봉투를 구입하는 남자 2명 목격 반투명 쓰레기 봉투 10팩(총100매)를 구입했으며

1명은 30세 전후로 티셔츠를 입었고 다른 1명은 50세 전후에 검은 작업복을 입었다

쓰레기 봉투를 사면서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점장의 증언이였다


4월22일 저녁,남편 카와무라 세이치가 돌아 오지 않자 아내는 직장에 전화를 걸었지만 출근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동안 무단 외박,무단 결근을 하지 않았던 남편이기에 아내는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4월23일 오전 4시경,이노카시라공원내에서 쓰레기 봉투를 가진 의심스러운 두 사람이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1명은 정장을 또 다른 1명은 점퍼를 입었고 30세전후 165cm키에 점퍼를 입은 남자가 비닐 봉투를 가지고 있

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남자는 2명이 아니였다 공원근처에 2명의 남자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4월23일 오전 11시,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청소를 하던 여성 미화원에 의해 남자의 발목이 발견됬다

공원 일대를 수색한 결과 7곳의 쓰레기통에서 총 23봉지에 토막난 신체 부위가 담겨져 있었다


5월11일 정오,공원 근처에서 오른쪽 어깨의 일부인 뼈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발견 되었지만

경찰의 확인결과 돼지 뼈로 판정 났다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


피해자 남성은 온후한 성격이였고 부부사이도 좋았다 1958년 도쿄 출생 지역의초등학교,중학교를 졸업하고 도립 아키 고등학교는 건축과를 나왔다 성인이 된후 다카다 노바 바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게된 아내 미요코와 결혼을 했고 아내와 아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손바닥 지문을 의도적으로 깍아 있던것으로 보아 아는사이,아주 가까운 인물이 범인이라고 추측 했다 그리하여 친한 사람들,친구,친척,직장 동료등 모두 조사를 했지만 다 알리바이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신흥 종교단체에 의해 살해 당했을거라는 주장이 있다 두 부부는 신흥 종교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신흥 종교에서 탈퇴를 하자 남편을 살해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2009년4월23일 오전0시, 공소 시효가 성립되었다 범인을 찾을만한 단서와 증거가 없어서 수사의 진적이 없어서 수사가 중단 되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4. 12:49

BOAC 스튜어디스 살인사건(BOACスチュワーデス殺人事件),영국 해외 항공 (BOAC 현 영국 항공 ) 일본인 여성 객실 승무원 (스튜어디스)이 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미제사건이다



사건 발생 1959년 (쇼와 34 년) 3월 10일 오전 7시 40분, 도쿄도 스기 나미 구에 있는 젠푸쿠지 강(善福寺川) 하류에서 일본인 여성 승무원(당시 27세)의 시체가 발견 되었다 시체는 옷을 입은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고 물 위에 떠 있었다


처음에는 자살로 수사를 마무리 할려고 했으나 3월11일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부검을 한 결과 목이 졸려 죽은 교살로 드러났다 또한 피해자의 몸과 팬티에서 O형,A형,AB형 남자의 정액이 발견 됐다


피해자 여성은 타케가와 토모코(武川知子)로 1958년 12월, BOAC 현 영국 항공에 취직 했으며 일본인 여성 9명중 1명이였다

이 사건의 전후에 BOAC 항공의 다른 스튜어디스가 돈이나 마약 등의 밀수에 관여 한 사건이 발각 되었다


국제 조직적인 밀수 루트에 관한 모략 사건이 아닌가하는 설도있다

피해자 여성의 행적은 3월8일 오후3시 세타가야에 있는 스튜어디스 숙소에서 외출한것이 마지막이였다

동료들에게 코마고메에 있는 숙부 다카하시 고로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고 말한뒤 외출을 했다

그러나 확인결과 그녀는 숙부의 생일잔치를 갔던게 아니였다 그 핑계로 남성을 만났던게 아니랴는 경찰의

주장이였다


루이즈 벨메르쉬


어느 날 수사 도중에 유력한 용의자가 지목이 되었다 벨기에 신부 루이즈 벨메르쉬(당시 38세)는 벨기에 가톨릭 신부였던 그는 1948년 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와서 1953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돈 보스코사에 배속되어 재무담당으로 일해 왔다


그런데 벨메르쉬는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유치원의보모,간호사들과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한다는 이야기 였다 타케가와 토모코가 죽기전 살레시오 수도회 산하의 성 오델리아 유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벨메르쉬와 만나다는게 확인 됐다


벨메르쉬를 집중 수사를 하던중 하라주쿠 호텔에서 벨메르쉬와 피해자 여성 토모코가 함께 들어간것을 목격자 제보가 들어왔다

3월10일 오전 5시, 토모코의 시신이 발견된 날, 센푸쿠지 강 인근에 살던 주부가 밖에서 차 소리가 나서 확인해보니 하얀색 승용차가 센쿠지강 옆 둑길로 가고 있다는것을 제보 했다


이후 주부에게 차량 카탈로그를 보여 주자 하얀색 르노 차량을 지목했다 벨메르쉬의 승용차가 하얀색 르노 였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자 한결같이 하얀색 르노 차량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벨메르쉬가 범인으로 유력 해지자 당대 일본의 유명한 형사 히라츠카 하치베가 심문을 맡기로 했다

토모코의 성기에서 발견한 정액 혈액형이 O형 남자인것을 확인했던 경찰은 벨메르쉬의 타액을 채취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벨메르쉬는 경찰이 권하는 커피와 주스등 입에 대지 않았으며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다 

5월 11일,12일,13일,20일,21일 총 5회에 걸쳐 30여 시간동안 심문을 했다 벨메르쉬는 토모코와의 성관계를 부인했으며 알리바이가 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3월9일 오후9시에서 12시 사이의 알리바이를 추궁하자 알리바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했고 하라주쿠 호텔에서 투숙한것에 대해 완강하게 부인하다가 경찰이 증거를 보여주자 쉬러갔을뿐이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러는 와중에 경찰은 벨메르쉬의 혈액을 알아내고 정액의 혈액형과 일치함을 밝혀내 구속영장을 청구 할려고 해으나 6월11일 오후7시30분, 벨메르쉬는 로마 본부로 전속되었다면서 하네다 공항에 에어 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떠났다

이후로 수사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


토모코는 왜 죽었을까? 일각에서는 돈 보스코사가 토모코 살인에 개입했다는 추정이 있었다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유치원에서 일하던 토모코가 갑자기 BOAC의 스튜어디스가 된것이 이상했다 20세에서 25세로 연령제한 규정이 있었는데 토모코는 27살로 BOAC의 스튜어디스가 되기 어려웠다 또한 시험성적도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뽑현던데 의혹을 사게 되었다

런던 본사에서 교육을 받았던 토모코는 단독 행동이 많았고 편지를 들고 아침 일찍 어디론가 나가곤 했다 또한 항상 초초하고 무서워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는 동료들의 증언이었다


당시 돈 보스코사는 카톨릭 포교를 위해 위법을 서슴치 않았다 부당이득,암시장,자금밀수,불법자금 수송등을 해왔다 심지어 BOAC는 돈 보스코사의 자금 밀수로였다 여러 정황을 보아 돈 보스코사의 재정 담당이였던 벨메르쉬의 애인 토모코를  BOAC의 스튜어디스로 들어가게 한뒤 달러르르 밀수하는 운반책을 맡기려고 한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다가 토모코는 반황을 했거나 밀수한 달러는 빼돌리려는 모습이 포착되 그녀를 살해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타케가와 토모코를 죽인 범인으로 루이즈 벨메르쉬가 확실했지만 체포도 못한채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도쿄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3. 19:18

히노시 초등학교4학년 남자아이 사망 사건(東京都日野市の小学4年生の首吊り事件は),일본 도쿄 히노시의 타카하타 산에서 초등학생 4학년 (당시 10세) 남자 아이의 손.발이 묶인 상태로 나무에 목을 메달아 사망한 소년이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을 지었지만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였다



2015년10월25일, 사건이 일어나기전 소년은 오전 11시경 어머니에게 놀러갔다온다면서 외출을 했다 그런데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발견된 장소


오후 8시경, 일본 도쿄 히노시의 산에서 목을 메달아 죽은 소년이 발견되었다



소년의 옷과 신발은 나무 근처에 놓여져 있었고 목과 양발 양손이 비닐끈으로 묶어져 있는 상태로 경사진 부분에 옆으로 눕혀져 있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고 저항 같은 흔적이 없었다 또한 현장에서 타인의 지문,DNA등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 경찰은 자살로 판정 했다


죽은 남자 아이는 특수 대안학교(東京賢治シュタイナー学校)에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는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슈타이너가 만든 교칙으로 운영되는 학교다

구애받는 시간표,교과서가 없었고 자유를 중시하는 교육을 했고 한 학년은 10명 정도의 정원이라 이지메나 괴롭힘이 없었어 다들 친하게 지냈다

또한 인터넷,게임,TV을 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사이비 종교 같았다


경찰이 자살로 단정지은 이유는 손과 발이 묶여있었으나 매듭의 강도가 느슨했고 시체에 외상이 없으며 저항한흔적이 없었다 또한 옷과 신발이 강제로 벗겨진 흔적이 없었다


10살 남자아이가 손과 발을 묶고 경사진 나무에 목을 메달아 자살할 생각을 가졌다는게 의문점이다 또한 날씨가 상당히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옷과 신발을 다 벗고 자살했다는점이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학교 친구들이 아닌 타 학교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의 짓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내고 별문제가 없어겠지만 동네 아이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한 아이로 취급을 당해 이지메를 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동네아이들은 소년에 손과발 그리고 목을 비닐끈으로 묶어서 나무에 묶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경사진곳으로 내려가게 한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소년을 지켜본후 소년가 죽자 급히 도망쳤을거라는 주장이다


다카하타산은 등산객들이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산이나 마찬가지로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지매를 당한 시간이 늦은 저녁이라며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 되었지만 여러 의문점이 있는 미제 사건이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도쿄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2. 19:25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歌舞伎町雑居ビル火災),일본 도쿄도 신주쿠 구 카부키 쵸의 명성 56빌딩 상가에서 일어난 화재로 44명이 사망했으며 일본에서 발생한 화재중에 5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가부키초 빌딩 화재사건


사건 발생 2001년 9월1일, 일본 도쿄 신주쿠쿠의 가부키쵸 빌딩에서 화재가 발생 했다 화재 지점은 빌딩 3층에 마작 게임장에서 시작되 옆의 엘리베이터 근처인 건물 3층과 4층의 섹시 술집에 종업원(직원) 중 한 명이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 버려 화재가 급속도록 퍼져 큰 화재가 발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건물 안에 있던 손님과 종업원을 포함 44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 했다 3층에 있던 인원은 19명중의 16명이 사망, 4층에 있던 28명은 전원 사망했으며 3층에서 종업원 3명이 무사히 빠져나왔다 목격자의 의하면 4번째 생존자 있었다고 한다 행방은 확인 되지 않았고 추측으로는 불을 지르고 도망간 범인이 아니였나 쉽다


섹시 술집[섹시 펍(セクシーパブ)] 종업원 한명은 도로쪽 비상구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구급차를 불렀다 또한 종업원2명은 창문으로 탈출해 지붕을 타고 3층 게임점에서 목숨을 건졌다



화재의 원인은 3층 계단에 있는 도시가스 미터기에서 발생한것으로 확인됐다 열로 의해 배관을 연결하는 알루미늄 합금 피팅이 녹아 떨어지는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알루미늄 합금이 녹아 내릴 정도라면 높은 온도여야 한다

일각에서는 방화범이 의도적으로 저지는짓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화재 발생시점에 급히 빠져나온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화재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오작동이 많아서 전원이 꺼져 있었다 또한 4층은 천장 화재 경보기 마다 내장재로 덮어버리고 있었고 3충에는 피난기구가 설치가 안되있었고 4층에는 설치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수 없는 상태였다

소방시스템이 잘되어있었더라면 44명의 사람들은 사망하지 않았을것 같다


2003년 2월, 건물소유주와 세입자등 6명은 소방법 위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되었고 건물은 사용 금지 명령을 받았다 한편 사망자 가족은 건물소유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서 2006년 4월 18일,합의후 건물주와 세입자가 배상을 했다


2008년 7월2일,도쿄 지방 재판소는 건물소유주 및 세입자 포함 5명에게 집행유해를 선고하고 마작게임장 점장에게만 무죄를 선고 했다


화재의 원인은 도시가스 미터기인한 화재로 결론이 났지만 방화범에 의한 화재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단서와 증거가 없어서 범인은 찾지 못한 사건으로 건물소유주와 세입자에 책임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오사카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1. 19:27

일본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쿠마토리쵸 연쇄),일본 오사카 부 구마 토리정에서 17세에서 22세의 젊은 남녀들의 잇다른 연쇄 자살사건이지만 원인모를 죽음도 있기 때문에 미스테리한 미제사건이다


일본 쿠마토리쵸 연쇄 자살사건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 사건이다 의문점이 너무 많은 기묘한 사건이다


소년 A군이 자살한곳


첫번째 죽음


1992년 6월 4일 목요일 오전 3시경, 소년 A군(당시 17세)은 집 근처의 양파 오두막에서 목을 매고 자살 했다


친구2명의 이름과 10만엔, 빚을 갚고 싶어라는 메모를 제외하고는 유서가 없었다 주변사람들은 왜 그가 자살했는지 전혀모른다고 했다


17세 A군은, 중3떄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학생이였고 파칭코의 자주 출입을 했다 동급생에 따르면 친구 B군보다 거칠고 그냥 막 덤비는 스타일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용사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1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그만두고 백수[무직]생활을 했다 이후 친구 B군,C군들과 오토바이트 타고 다녔고 폭주족을 결성해 신나를 흡입 하면서 지내왔다


소년 B군이 자살한곳


두번째 죽음


1992년 6월 10일 수요일, 소년 B군(당시 18세)은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 헛간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다 B군, C군, E군 3명은 이전부터 지인이나 가족에게 "차에 쫓기고있다"고 말했다. B군은 "백색 크라운에 쫓기고있다"고

어머니에게 말을 했었고 어머니가 C군에게 물어보자 여러번 그런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E양은 친구들에게 검은 차가 쫓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18세 B군은, 건축일을 했으며 쿠마토리쵸 일대 불량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친구 A군,C군과 시작한 폭주족 조직에서 리더 였다 당신 임신시킨 여자가 있었고 결혼해서 새로운곳에서 살려고 준비중이였다

친구 A군의 장례식을 치른후 남은 친구들에게 우리 이제 제대로된 생활을 하면서 살아나가자고 격려를 했지만 그도 며칠후 자살 하게 된다


소년 C군이 자살한곳



세번째 죽음


1992년 6월17일 수요일,소년 C군(당시 18세)은 농기구 오두막에서 목을 매고 자살 했다


두손이 뒤로 묶인 채 목을 매달아 죽어 있었다 옷을 깨끗했고 뒤로 묶인 방법은 혼자서도 할수 있는 방법이였고 자살을 못할까봐 일루버 뒤로 묶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손을 묶을 이유가 없다며 항의를 했다


18세 C군은, 고치현 출신으로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를 했지만 중퇴후 B군과 친하게 지내다가 건설회사에 다닌후 미에현에서 여관 종업원 일을 하다가 친구 B군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쿠마토리쵸로 돌아왔다

이후 이전 사귀던 여성 (당시 17 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 두 명의 친구를 데리고 여자를 만나러 갔다 그 여성과 만난후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에게 밧줄 있어?라고 한뒤 6시간후 자살 했다


C군도 B친구처럼 정체를 알수없는 차가 뒤쫓아왔다는 얘기를 했었다


D군이 자살한곳



네번째 죽음


1992년 6월25일 목요일,D군(당시 22세)은 동네 숲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 했다


유서가 없었고 목을 매달아 죽은 나뭇 가지의 높이가 보통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높이였다 그 높이에 혼자서 나뭇가지에 옷으로 매듭을 만들고 자살 했다는점이 이상했다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22세 D군은, 키시와다시의 직원외 뚜렷한 정보 없음


소녀 E양이 자살한곳



다섯번째 죽음


1992년 7월2일 목요일,소녀 E양(당시 19세) 과일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 했다


유서가 없었고 주택가 도로에서 과일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죽어가는채로 발견되었다 주택가 주변은 사람도 꽤 다니는곳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양은 사람이 많은 도로 한복판에서 자살을 했다

게다가 죽기전 머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매우 기뻐했고 죽어가면서 다르다 다르다 말을 계속 반복했다 


19세 E양은 돗토리 현 요나고시 출신으로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오사카 체육 대학에 진학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프트볼 선수였지만 대학 진학 후 육상선수로 전향 했다



A군 B군 C군 D군 E양의 자살 사건 이전에도 2건의 사건이 있었다


소년 X군이 자살한곳



여섯번째 죽음


1992년 4월29일 목요일, 소년 X군(당시 17세)는 신나를 흡입후 연못에 빠져 죽었다


17세 X군은 A군,B군의 중학교 후배고 Y와는 같은 학교다




7번째 죽음


1992년5월 29일 금요일,소년 Y군(당시 17세)는 신나를 흡입하고 호흡곤란으로 사망 했다


17세 Y군은 A군,B군에 속해져 있는 폭주족 이였고 셋은 쿠마토리쵸를 일대를 장악했다 


D군과 E양을 제외한 A군 B군 C군 X군 Y군들은 서로 친분이 있었고 신나와 폭주족에 관련되 있었다 또한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 반경 1.2km 이내였다는것이 의문점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자살이 베르테르 효과 때문에 전염되어서 자살했던게 아니냐는 추정이 있었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야쿠자나 같은 폭주족에 의해한 타살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지만 단서나 증거가 없어서 일단락 되었다

 


출처:링크

 

이글공유하기

댓글()

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보험금 노린 사기극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10. 11:37

칠곡 모텔사장 신부 실종 사건, 2004년 8월 17일, 경상북도 칠곡군의 한 모텔 사장의 신부 최영은(당시 22세)이 결혼한지 5개월만에 갑자기 행방불명된 사건이다

 

최영은


최영은에게 오빠 최국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남매 였다 두 남매는 어린 시절 종교에 깊게 빠진 아버지 때문에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교단체에 끌려 갔다 종교단체에 끌려온 두 남매는 교주한테 억지로 산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로인해 최씨 남매는 9년동안 받아야할 의무교육 받지 못했다 종교시설에 억지로 끌려와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에 최영은은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최국현


오빠 최국현은 동생을 말리며 성인이 되면 같이 나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응하지 않고 혼자 떠난다 이후로 두 남매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10년후 동생 최영은는(은) 오빠에게 결혼할 사람 강씨를 소개했다

하지만 최국현은 강씨를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다 동생보다 15살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성실하고 동생을 아끼는 사랑하는 모습에 둘의 결혼을 승낙 하게 되고 2004년 3월 결혼식을 올렸다


사건발생 2004년 8월17일,결혼한지 5개월만에 동생 최영은이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가출한것이라면 지갑이나 휴대폰을 들고 나갔을텐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한참 신혼 생활을 할 시기인데 갑자기 가출할리는 없고 가출을 해도 오빠 최국현에게 연락을 했을것인데연락한번 오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강씨가 운영하는 칠곡군에 있는 모텔에서 시작되었다 두 부부는 크게 싸우지 않았지만 약간의 다툼을 벌었다 가출할만큼의 큰 싸움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빠 최국현은 곧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몇달이 되어도 동생의 행방을 찾을수 없게되자 남편 강씨가 아내를 찾으러 나갔고 모텔 일은 처남 최국현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1년 ~ 2년이 되도 최영은의 행방은 찾을수 없었다


2006년 6월9일,최영은이 실종된지 2년이 지나고 최국현은 보험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그 전화는 최영은 앞으로 거액의 사망보험금이 걸려 있다는 내용이였다 보험금의 액수는 24억이였고 보험금의 수령자가 매제 강씨였다

최영은이 죽으면 강씨에게 24억이라는 많은돈을 가질수 있게 된다 순간 최국현은 동생 최영은이 단순 가출이 아니라 강씨로 인해 살해당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04년 8월17일,5년이 지나고 최영은눈 법적으로 사망 처리가 된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보험사는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고 남편 강씨는 체포 되었다

체포된 강씨는 살인죄가 아닌 보험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최영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점으로 살인죄를 면하게 된것이다


그런데 남편 강씨가 체포되자 실종되었던 최영은이 8년만에 돌아왔다?

 

2003년 최영은는 남편 강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혼인신고도 하기 전부터 보험에 가입 했다 가입한 생명보험만 총 13개로 수령금이 60억이였고 정해진 기간내에 사망해야만 보험금을 받을수 있는 정기 보험이였다


실종된 최영은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실종된지 1년이 지난 2005년 강씨가 운영하던 당구장에서 일하다가 여러 지역을 오가며 원룸과 월세방을 전전해야 했다

모텔을 운영하던 강씨는 2003년 함께 일하던 최영은이 카드 빚에 시달리는걸 알고 보험사기를 계획했다 

강씨는 보험사기를 감출려고 본처와 이혼하뒤 최씨와 혼인 신고를 한뒤 최영은 앞으로 13건의 보험에 든후 최영은을 숨기고 실종 신고를 했다 13건의 보험으로 최영은이 사망하게 되면은 60억원이라는 거액을 수령할수 있다는 생각에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5년간 최영은을 숨기고 강씨는 5천만원의 보험금을 계속 납부를 했다 2010년 5년이 지나자 최영은는 자동으로 사망처리가 되었다

사망처리가 화정되자 강씨는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 24억을 청구했다 하지만 보험사는 보험사기로 의심하고 강씨를 신고 했다 강씨가 체포된후 재판을 받자 최영은이 자진출석해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조사 결과 최영은는 8년간 사회와 격리돼 감금당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검찰은 최영은이 공범이지만 실질적 피해자에 가까운 최씨를 재판에 넘기는 대신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근로복지공단 및 여성인력개발센터와 연계해 구직 및 직업훈련 상담을 지원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23:32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일본 훗카이도 다이 세츠 산 아사히 다케에서 일어난 의문의 조난 사건이다 일부 해명되지 않은 점이 남아 있지만 조난자가 확인된 사건이다

SOS 조난 사건(SOS 遭難 事件)


사건 발생 1989 년 7 월 24 일 오후,홋카이도 구로다케 산 구로 다케에서 아사히 다케로 가는 길에 행방불명 조난자 남성 2명을 찾기 위해 훗카이도 경찰에서 헬리콥터로 수색을 했다 수색 도중 등산로에 쓰러진 나무를 쌓아 만든 SOS를 문자를 보고 2 ~ 3km 북쪽으로 향하던중 조난자 2명을 구조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2명에게 SOS 문자에 대해서 물어보자 전혀 모른다고 대답을 했고 경찰은 또 다른 조난자가 있다고 생각해 다음날 다시 헬기를 동원해 조사를 진행 했다

수색 결과, 쓰러진 나무 문자에서 30 미터의 범위에서 동물에 의해 물린 자국이있는 골반, 대퇴골, 상완골 등의 인골이 흩어져 있었고 "SOS"라고 외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녹음 된 카세트 테이프와 테이프 레코더가 든 회색 가방을 발견 됐다


회색가방 안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 3개와 녹음기 테이프 레코더,세면 도구 천 조각2장,면허증,치약 세트등의 일회용품이 들어 있었다

유품의 소유자는 1984년 7월에 행방 불명 되었던 아이 치현 고난시의 거주하는 회사원 남성 (당시 25 세)로 결과가 나왔지만 인골을 분석한 결과 남성이 아니였다 25~35세의 키 160cm A형의 여성으로 밝혀졌고 발견 5년전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다 당시 쌓아 올린 나무는 3그루 이상올려 만든것으로 문자의 한폭은 5m이상이라 성인 남성 한명도 힘들다 근데 인골은 여성의 것이였다 그렇다면 남녀 둘이 조난을 당했던걸로 추측할수 있다



수수께끼의 카세트 테이프 케이스중 하나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붙어있었고 애니메이션의 주제가가 녹음된 테이프도 있었다



①SOS 도와달라 벼랑 위에서 움직일수가 없다..를 세번 반복

②장소는 맨 처음 헬기를 봤던 그곳이다

③조릿대가 우거져있어 위로 올라갈수 없다

④여기에서 끌어 올려 달라!



남성은 헬리콥터를 언급하고 있었고 조난 절벽 위에 있는 상황에서 헬기가 날고있는것을 보고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다가 가방안에 있던 테이프 레코더(녹음기) 스위치가 우연히 눌러져 녹음이 된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또한,당시 남성은 벼랑 위에서 움직일수 없다면 SOS구조 요청을 했다

하지만 유류품과 인골이 발견된 장소 주변은 능선이였고 벼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은 벼랑이 있던 장소에서 탈출을 한후 능선 주변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육식동물에게 먹이감이 되었을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실제 SOS 문자


1984년 7월, 조난당한 남자 회사원은 연인이 있었고 같은 날 산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밝혀졌고 연인의 DNA와 인골의 DNA가 일치해 신원이 확인됐다

또한 경찰은 처음 인골이 발견된 장소 근처에 또 다른 인골과 면허증,시계를 발견했고 인골은 남자 회사원 것으로 확인 됐다 두 커플은 조난 당한후 SOS 문자를 만들고 지나가던 헬리콥터를 향해 소리를 질러지만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한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 유류품


남자 회사원의 유품을 전달했지만 유품을 받은 가족들은 두번째로 발견된 면허증과 시계는 맞지만 첫번째로 발견된 유류품은 아니라고 주장을 했다 그래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었지만 목소리가 다르다며 주장을 했다

이후, 1차 유류품과 2차 유류품의 DNA를 조사 한 결과 서로 불일치해 제3의 인물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던중 SOS 문자 근처에서 또 하나의 가방을 발견 되었다 가방 안에는 부적,만화책,카레라 삼각대,보험회사 서류 봉투 1983년에 만들어진 휴지 봉투가 있었다

DNA 조사결과 1차 유류품과 동일했고 회사원 커플이 조난당한 시점보다 1년이나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제3의 인물의 인골을 찾을려고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1989년 8월 4일, 경찰은 현장의 상황에서 범죄 가능성은 없다 더 이상의 단서가 나오지 않는 관계로 현장 수색을 중단하기로 결정 하기로 한다


사건의 의문점이 너무 많다 회사원 커플이 같이 입산했다가 문자 근처에서 조난당해 사망한것으로 결론이 났다

SOS 구조 문자를 만든 남성은 회사원 커플이 아닌 제3의 인물이였다

그런데 SOS 구조 신호를 보낸 남성은 왜 구조문자를 만들고 구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 시간에 산을 탈출해도 남을 시간 이였다


또한, 조난당한 세사람은 왜 시간차를 두고 한 자리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기묘한 사건이며 미제사건으로 남게된 SOS 조난 사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18:08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東電OL殺人事件),도쿄 전력 간부 직원이었던 여성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가 아파트에서 살해된 미제 사건이다 유력한 용의자로 네팔인이 범인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요코하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원뢰로 인정되 감옥에서 풀러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


사건 발생 1997년 3월19일 오후 5시,도쿄도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에있는 목조아파트 101호 방 안에서 도쿄전력의 간부급 여직원 39세 와타나베 야스코(渡辺泰子)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 현장 아파트


처음 시체를 발견한사람은 아파트의 관리를 맡았던 네팔 요리 가게의 점장이였다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당시 30세)는 이 아파트 옆 건물 4층에 불법 체류한 네팔인 4명과 살고 있었고 피해자가 생전에 매춘했던 상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


사인은 교살(사람을 목을 졸라 죽임)로 사망 했다 시간은 8일 자정부터 다음날 9일 새벽으로 추정 했다 1997년 5월 20일, 경찰은 살인 현장 옆 건물에 살고 있는 불법 체류자 신분과 피해자 여성 지갑에 있던 4만엔이 없어진점등을 고려해 경찰은 고빈다를 용의자로 체포 했다



-살인 현장에 남겨진 사용 된 콘돔에 피고인의 정액과 체모 발견

-피고인은 피해자와 안면이 아니라고 공판 시작 몇 달 동안은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 후 몇 번의 성교하는 정도의 사이로 이었음이 판명 거짓말이 발각 된 것.

-사건 직전에 현장 근처에서 피해자와 함께 목격 된 남성이 피고인 여부.

-현장 아파트의 열쇠를 피고인이 소지하고 있었지만, 사건 이틀 전에 관리자가 반환하는 데 함께 투숙하는 사람이 열쇠를 전달 키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고하는 피고인의 진술의 신용성.

-교유 관계를 상세하게 증거, 사건 직전에 만난이 범죄자라고하는 피해자 수첩의 신용성.

-사건 전에 7 만엔 밖에 소지하고 있지 않은 피고인이 사건에 따라 10 만엔을 지인에게 건넨 돈의 마련.

-피고인이 근무했던 가이 힌 마쿠하리 역 근처의 음식점에서 오후 10시 폐점까지 근무하는 경우 살해 시간과되는 오후 11시 30 분 전후까지 시부야 역 부근의 현장에 도착할 것인가? 피해자의 정기권이 피고인의 토지 감이없는 토시 마구 의 민가에서 발견 된 것.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


피해자 여성은 게이오 대학 경제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도쿄 전력에 입사 한 엘리트 사원이였다 그러나 회사에 퇴근 후 시부야 구 마루야마 쵸 부근의 거리에서 손님을 초대하고 매춘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 졌다

도쿄 전력에 입사한 그녀는 연수입 1,000만엔으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1991년경부터 시부야 일대에서 6년간 매춘을 해왔다 그 이유로는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와 압박감과 어머니와의 갈등이였다는 추측이 있었다


아버지는 1949 년 도쿄 대학 공학부를 졸업, 도쿄 전력에 근무하고 공무 부부장시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했기 때문에 강등을 당했고 와타나베 야스코가 게이오 대학 2학년 때 52세에 암으로 사망 했다 

와타나베 야스코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린 109건물 화장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와타나베 야스코는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반원전을 주장하자 반감을 느낀 직속상관 카츠마타 츠네히사는 와타나베 야스코를 뒷조사를 한후 시부야에서 매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시부야 마루야마 쵸 일대에 있는 야쿠자에게 청부살인을 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사건 발생 당일전 피해자는 퇴근 후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시부야 109의 화장실에 들렸고 야쿠자는 뒤를 쫓아 살해를 한뒤 마루야마 쵸(渋谷区円山町)에 있는 2층 목조 아파트키쥬우소우(喜寿荘) 1층 101호실의 빈 방에 유기를 했다는 추측이 있다


사고 이전 후쿠시마 원전(事故前の福島第一原発)/카츠 마타 도쿄 전력 회장(勝俣恒久 東電会長)



도대체 와타나베 야스코를 죽인 범인은 누구였을까?  네팔인 고빈다 프라사드 마이나리가 였을까? 카츠마다 츠네히사의 청부살인이였을까........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 미해결 미제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9. 12:01

시바마타 여대생 방화 살인 사건(柴又女子大生放火殺人事件),수사는 계속되고 있지만 범인은 체포 되지 않은 미해결 사건이며 수사 특별 포상금(공공 현상금 제도) 대상 사건이다

코바야시 쥰코(小林 順子(こばやし じゅんこ,당시21세)


1996년 9월 9일 오후 4시, 반경 도쿄도 카츠 시카 구 시바 3 쵸메의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에 신고로 소방대원이 출동 했다 약 2시간 후 화재를 진압후 소방대원이 자택 안을 확인해 보던중 2층에서 상지 대학교 4학년 여대생 코바야시 쥰코(小林 順子(こばやし じゅんこ,당시21세의 시신이 발견해 즉시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사망 했다


시신은 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옆을 향해 누워져 상반신에 이불이 덮여 있었다 시신을 확인 해보니 입과 손에는 테이프로 부착되어 있었고 두 다리는 팬티 스타킹 묶여있었으며 목은 날카로운 칼에 6차례 찔려 과다 출혈로 죽어있었다 


사건 현장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2006년9월, 경찰은 두 다리 묶는 방법이 휘감기매듭이라는 특수한 방법,현장에 남겨진 성냥갑 안에 범인의 DNA를 발견

2015년 9월, 2층 시체에 걸려 있던 이불에 묻은 혈액에서 범인 DNA를 발견 했다 두 DNA 모두 가족 이외의 DNA로 범인것으로 확인되었다

2009년1월, 범인이 가져온 접착 테이프에는 세 종류의 개털을 확인했다 피해자의 집은 한번도 개를 키운적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키우던 개로 판단 했다 부검에 따르면, 폐에서 그을음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 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 발생 당일날 오후부터 강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아버지는 후쿠시마에 출장중이였고 준코의 언니는 직장에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쥰코 둘만 있었다

15시50분,준코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기 방에서 한층으로 내려와 미용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자전거 타고 갈거야?라고 물은 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피해자의 가족은 부모님 언니,쥰코 이렇게 4명이였다 쥰코는 명문대학 조치대학 4학년생이였고 2일후 해외 유학을 떠나려던 시기에 변을 당했다

현장의 상황이나 교우 관계 등으로 안면의 범행이라고 생각했다 범행이 준코의 해외 유학 여행 2일전 상황을 생각하면, 범인은 준코의 일정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있어 관련 조사를 해보았지만 유력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 


사건 당일 오후 4시 30분부터 40분 무렵,  20 ~ 30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우산도 쓰지 않은채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배회를 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도로에 서서 피해자의 집을 엿보고 있었다

오후 4시경,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니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40세 전후의 남자가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주부를 미행하고 집 앞에서 라이터를 만지면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3시까지 6시간동안 흰 장갑을 낀 남자가 카나 마치 공원 주변을 서성였다

사건 전날인 8일 오전 5시경, 피해자의 집 근처 게시판 부근에서 젠장 때려 죽이는거야를 외치며 군가를 부르면서 자전거로 달려온 남자

사건 당일 오후 4시경, 검은 우산을 쓰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피해자 집 근처에 서 있었다

사건 3일전, 40세 중년 남자가 남의 집 문 앞에서 라이터를 만지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오후 4시30분, 비가 많이 내리던날, 흰 장갑을 낀 20 ~30대 초반의 남자가 우산도 쓰지 않고 현장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사라졌다 



준코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쥰코 씨 스스로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있는 모습도 있었다고 2016 년에는 언론에서 새로운 증언이 공개되었지만 현재도 유력한 단서가 파악되고 있지 않다

한때 TV 프로그램의 초능력 수사로 해외에서 영매를 불러오고 영시에서 범인을 특정하려고 시도했지만 어이 없게 무산 됐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 북한납치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8. 21:09

야마모토 미호 실종 사건,야마모토 미호(山本 美保)가 자택에서 도서관에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후 행방불명된 미제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미호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사실을 알고 의아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미호의 가족들


미호의 가족은 아버지,어머니,큰 아들,미호랑 쌍둥이 미사 다섯식구였지만 큰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미호마저 행방불명이되고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다


이틀 뒤인 6월6일, 미호가 타고간 미니 바이크가 고후역 앞에 놓여있었고 6월8일에는 니가타현 카시와자키 아라하마 해안가에서 손가방이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면허증과 지갑이 있었고 도난당한 물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종 반 년이 지난 4년간 미호로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오게 된다 대부분 수초만에 끊어졌지만 실종후 3년 4개월에서 6개월사이 2개월동안 2번의 전화가 걸려왔고 10~15분정도의 긴 통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만히 들고 있었다

10월18일, 몹시 서러워 흑흑 소리를 내며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미호지? 잘 있어?

미호:잘 있어(・・・げんき・・・).....

어머니:잘 있니? 잘 있어?어서 돌아와.....

갑자기 TV소리가 커진다


얼마후 전화가 끊어졌지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는 카시와자키에 갔다고 말한후 다시 전화가 끊겼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미사가 빨리 돌아와라고 얘기하니 끊겼다 불과 1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사가 사라진후 일각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로 보고 있다 1970년~1980년대 사이 일본에선 이유를 알수 없는 실종자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일이 많았다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이라는 사실이 알려진것은 2000년대 고이즈미준이치로 총리가 방북하여 북일 정상 회담을 하면서부터였다

미호 실종사건 당시 일본에서 납치라는 인식이 없었던탓에 미호의 가족들은 18년간 미호가 귀가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2002년3월,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한 하스이케 카오루부부의 납북문제 보도에서 몇번이고 카시와자키라는 지명이 나온것이다


카시와자키는 미호가 실종된 날 들고 간 손가방이 발견된 장소다 미호 가족들은 의심이 확인으로 바뀌게되었고 동생 미사는 납북 문제가 명확해진 지금 나서질 않으면 영영 미호를 만날수 없을거라 생각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자 야마나시현 경찰이 미호의 가족들의 사정을 듣고선 연락을 하게 되었다 미호의 이름을 납북 가능성이 있는 특정 실종자 조사회에 올렸다 미호 구출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는동안 부친 미츠오가 병으로타계하여 세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2004년, 야마가타현의 유사마치 해안에서 익사체가 발견이 되었다 DNA 확인결과 미호의 쌍뚱이 자매 미사와 일치했다 20년전에 발견된 시체가 미호였던 것이다

미호가 실종되고 2주후인 1984년6월21일, 일부 백골화된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와 관광객이 발견하여 신고했다 일란성 쌍뚱이 미사와 DNA가 일치해서 미호와 동일인물이라고 판명했고 자살에 의한 익사였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DNA 감정을 한것이다 야마나시현 경찰은 미호씨로 추정되는 시체가 2구 있는데 1구는 DNA감정이 가능하니 감정을 하자고 2004년4월26일에 4번이나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은 일체 듣지 못했고 미호 시체가 2구나왔다는 말에 충격을 받게 된다 경찰 주장이 거짓말이 확실했다


또한 20년전에 발견된 시체의 DNA는 일치했지만 키,체형,복장,속옷사이즈등 당시 미호의 인상착의가 아니였다...


납북 피해자로 접수한 미호를 두고 납북당하려다가 실패한 가능성을 보고 있다 북한 공작원이었던 안명진의 말에 의하면 납치한 사람이 저항하면 심하게 구타를 한뒤 죽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미호가 그런 상황이였다면 유사마치 해안가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권혁이 1994년 북한에서 봤던 여성이 미호와 너무 닮았다고 증언했다 납북당했다면 북한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후 미호의 가족들이 남긴말 이다..


우리들은 진실이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시체가 미호가 맞다면 당장이라도 아빠와 오빠의 묘에 안치해서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체의 자료와 유류품 사진 속에 미호를 나타내는 건 무엇 하나 없습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7. 16:50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北海道室蘭女子高生失踪事件),고등학생 1학년 치다 아사미(千田麻未,당시16세)가 빵집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중 실종된 미제사건이다

치다 아사미(千田麻未,당시16세)


2001년 3월,아사미는 집에서 가까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3월6일이 학교 휴교일이라 오후 1시에 커피 볶는법을 배우러 간다고 점장하고 약속을 했었다

3월6일 오전 11시30분경, 아사미는 빵집 본점에 전화를 걸어 오후1시에 갈려고 합니다 점장님 계신가요?라고 여자직원과 전화 통화를 했다 여자직원은 알았다고 한뒤 아사미가 1시에 온다고 점장에게 전달했다


낮 12시가 되자 아사미는 집을 나서 편의점에 잠시 들린후 하쿠쵸다이중앙(白鳥台中央)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뒤 히가시마치 터미널(東町ターミナル)에서

12시2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이때 친구의 목격 증언에 따르면 버스에 탄후 아사미가 뒷좌석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한다



12시56분, 아사미는 빵집 근처 히가시도리(東通り) 정류장에 왔지만 내리지 않았고 히가시마치니쵸메(東町2丁目) 정류장에 내렸다 이때 시각은 오후 1시로 빵집 점장님과의 약속이였다

버스에 내린 아사미는 대형슈퍼 무로란사티(室蘭サティ)에 들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화장품 매장 카메라에 포착이 되었다 오후 1시 04분부터 1시 26분 사이였다 먼가를 살려고 온것은 아닌것 같았다 매장을 배회하면서 누구를 찾고 있거나 피해다녀다거나 했던걸로 보인다


아사미가 버스를 탄 정류장


무로란 사티를 나온 아사미는 우연히 동급생 남자 2명과 마주쳐 간단하게 인사를 한뒤 버스를 타고 빵집에서 가까운 정류장에 13시 41분경 하차 한것으로 밝혀졌다

1시42분,아사미는 빵집 옆 히가시도리 정류장에 도착한후, 남자친구에게 지금 아래에 도착했다고 말한후 전화를 끊고 오후1시46분 다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은 아사미는 지금 말할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걸게라고 말한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남자친구 말로는 주변이 조용해서 실내에 있는듯한 느낌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남자친구는 다시 아사미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무로란사티 화장품 매장 CCTV에 찍혔던 모습과 동급생2명이 목격된 이후로 아사미를 볼수 없었고 남자친구와의 전화통화를 했지만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점장과 마지막에 아사미가 있던곳과 빵집과의 거리


아사미가 마지막으로 통화한곳이 아르바이트하는 빵집 근처였다 당시 점장은 아사미를 기다리고 있었고 오지 않자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서 자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지만 알리바이가 없었고 마지막에 아사미가 있던곳이 빵집 근처라서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점장을 용의자로 지목을 했다


빵집 직원


점장은 아사미가 오지 않자 가게를 나갈때 아사미를 찾으러 가겠다고 직원에게 말했다고 했지만 직원은 그런말을 듣지 못했다고 증언을 했다 또한 아사미를 찾으러 갔다고 말했지만 아사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점이 수상했다


점장 건물


한편, 탐정을 자처하는 인물이 블로그에서 점장이 운영하던 점장은 건물 소유자이고 2층과 3층은 빈 임대 아파트였다 빈 아파트 어느 방에 아사미를 감금하면서 지내오다가 의심을 받자 아사미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경찰은 점장을 용의자로 의심해 집과 매장을 수색했지만 빈 임대 아파트에 방을 조사하지 않는 실수를 했고 점장이 조사받던 도중 빌려왔던 여고생 강간물을 비디오 가게에 반납한것이 이상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범인은 점장일 확률이 높다고주장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점장이 1순위 였지만 빵집 주변 상황을 보면 아닐수도 있다 빵집 뒷문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뒤편에 있는 산이 있어서 납치를 한후 시체를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토커의 납치일 가능성도 있다 아사미는 부모와 남동생까지 4인 가족으로 살았고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성적도 좋았다 얼굴도 미인이라서 팬클럽이 있을정도였다


워낙 이뻤던 탓에 다니던 학교 남학생들과 성인남자들이 따라다니거나 연락처를 받는등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동급생들과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물어보니 아사미를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었고 계속 전화를 걸어와 괴롭혔다고 한다 

실종 당시 아사미는 남자친구와 두번째 통화를 할때 지금 얘기 할수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걸게라는 말을 한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떄 스토커가 따라와 당황했던 아사미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할려고 했는데 스토커의 방해로 전화를 끊게 되었고 스토커는 곧바로 아사미를 납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목격자도 없고 단서도 없어서 무로란 여자 고교생 실종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게된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7. 08:57

아이치현 네 모자 살인사건(愛知豊明母子4人殺人放火事件),일본 아이치현 토요아케시의 주택에 어떤 한 남성이 침입하여 4명의 모자를 살해하고 방화한후 도주한 미제 사건이다

사건발생 2004년9월9일 새벽 4시25분경, 인근 주민에 신고를 받고 119가 도착해 불을 진화 했다 피해자는 아내 카토 리요(加藤利代,당시 38세), 장남 유우키(佑基, 당시 15세), 장녀 리나(里奈, 당시 13세), 차남 쇼고(正悟, 당시 9세)였으며 아버지는 늦게 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없었던 이유로 살인을 면할수 있었다 전날 남편 카토 히로토(加藤博人)은 오후 11시경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을때는 평상시 처럼 아무일도 없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오전 4시 5분경, 집 근처에 사는 형에게 자택에 불이 났다는 얘기를 들은 남편 카토 히로토는 직장 동료에게 사정을 얘기한후 집으로 달려갔으나 자택은 모두 타있었고 연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카토 히로토는 소방대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다 숨을 거둔 상태였다


등유는 네 모자 시체 외에도 곳곳에 뿌려져 있었고 성냥개비와 등유가 묻은 신문지가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집에는 원래 등유가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가져 올것으로 확인 되었다 아이 치현 경찰(愛知県警察)은 처음에는 일반 화재로 생각했었지만 실내 등유를 뿌린 흔적과 시신에 손상의 흔적을 본후 살인 방화 사건으로 수사를 전환하고 특별 수사 본부를 만들게 된다



범인의 침입 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현관과 부엌 문(부엌 및 목욕탕 앞 통로에 연결)외에 1층의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2층 방 창문이 방충망이었기 때문에 들어오는것이 가능했지만 2층에 올라간 범인의 흔적이 없었다

남편 히로토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심야에 귀가했을 때는 뒷문 옆에 숨겨놓았던 만능 열쇠로 출입하고 있었다 근데 사건 당일은 주차장의 소정의 장소 (창고)에 뒷문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아내와 장녀는 잭 나이프로 얼굴과 다른 부위 수십곳을 찔린 상처가 있었으며 장남과 차남은 칼에 찔린 상처가 없는걸로 보아 둔기 같은것으로 맞았던 걸로 판단 했다 또한 저항에 흔적이 없는걸 보아 네 모자가 자고 있을때 벌어진것 보였다 당시 네 모자는 범인의 방화 후에도 어느 정도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현장에는 범인의 혈액 흔적이 없었다 범인은 네 모자를 살해 한뒤 입고 있던 옷 등을 현장에서 함께 소각했을 가능성이있다


오전 4시경 이웃 주민이 여성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범행은 30 분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살인과 방화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 소방 작업을 하던 소방대원과 근처의 주민이 현장 근처에서 수상한 승합차를 목격했는데 30~40대 가량의 남성이 운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였다 2003년 7월 하순 오후 8시반, 누군가가 피해자 집의 현관 문을 억지로 열려고 했으며 2004년에는 피해자 집을 둘러보는 수상한자를 봤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네모자 살인사건이 잊혀질 무렵, 2005년 3월 11일,남편 카토 히로토가 전 직장의 회사에서 약 520 만엔을 컴퓨터 구입비로 횡령한 사기혐의로 체포되었고 다른 회사에서 약 5500만엔의 약속 어음을 가로 챈으로 사기 혐의로 재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카토 히로토는 사기죄로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을 받고 복역중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남편 카토 히로토가 네 모자를 죽인 범인이 아니냐는 추론이 있었다 카토 히로토(당시 45 세)는 대기업 자동차 메이커의 자회사 자동차 부품 회사 근무하면서 고급 클럽에 자주 다니는 등 씀씀이가 심했고 애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사기 혐의로 체포될 당시 경찰은 네 모자 살인사건에 용의자로 지목을 하고 수사를 했었다 이 과정에서 카토 히로토에 애인과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증거는 없지만 카토 히로토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증언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고백했다고 추정을 했다 이에 카토 히로토는 사기혐의는 인정했지만 네모자 방화사건은 억울하다며 완전히 부정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남편 카토 히로토였지만 알리바이가 확실해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청부살인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건발생 1년전부터 피해자의 집을 배회하는 수상한자가 2번이나 목격되었다 도둑이라면 굳이 같은 집을 2번이상 훝어볼 필요가 없었다 다른집도 많은데 굳이 피해자 집을 여러번 훝어봤던것일까?  살인을 계획한 청부살인이 아니였을까....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파일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6. 17:13

카메이도 여성만화가 살인사건(江東区亀戸漫画家女性殺人事件), 2000 년 9 월 29 일 일본 도쿄도 고토 구 카메이 여섯 쵸메 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며 범인이 검거 되지 않은 미해결 미제사건 이다



2000 년 9 월 29 일 오후 1 시경, 센서스 조사원이 도쿄도 고토 구 가메이도 6 초메 카메이 그린 아파트 604 호실에있는 만화가 요시다 요코 씨댁을 방문했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벨을 눌러봤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볼려고 했지만 악취가 심하게 나섰던 이유로 센서스 조사원은 관리인에게 통보 하게 된다 관리인과 같이 들어가 안을 확인해보니 목이 졸라 죽어있는 요시다 요코(吉田陽子,당시 28세)의 시체를 보게 된다


요시다 요코(吉田陽子)가 살았던 아프트


당시 요시다 요코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아래는 벌거벗은 몸으로 얼굴에 흰 천을 덮어진채로 침대에서 부패되고 있었다 집안을 수색해보니 9월18일, 날짜로된편의점 영수증이 나왔다 영수증의 날짜와 시신의 부패를 대조해보니 약 19일이상 경과한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건 때 요시다 요코는 침대위에서 누군가 목을 졸라 살해를 당했고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집 안은 어질러져있지 않았고 방에 있던 현금 300만원이있었지만 그대로 있는걸로 보아 원한 관계로 인한 범행으로 추정했다


요시다 요코는 동인지로 유명한 아마추어 만화 작가였다 고등학교때부터 만화를 그렸고 동인지를 발행하는등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후 독립한 요시다 요코는 10년동안 혼자 생활하면서 꾸준히 만화를 그려왔다 

소질과 노력으로 인해 그녀는 20살에 이미 연수입이 1,000만엔을 벌만큼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부터가 유흥 업소에 근무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화를 그려서 충분히 돈을 벌면서 생활을 할수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유흥업소 일을 하면서 만화를 그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는 친정에 돌아와 부모와 동거 할 예정이였던 요시다 요코였다



시신은 19일되어서야 발견이 되어서 범인의 흔적과 단서를 찾을수 없어서 사건은 난항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아사히 TV 어떤 방송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을때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요시다 요코의 친구가 말하길 열성팬에게 스토커를 당하고 있었고, 읽지 않아도 되니 가지고 니가갖고있어 난중에 열어봐도대! 라는 얘기였다


편지에는 스토커 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고 그 팬이 나를 죽일것 같다는 내용이였다


하지만 이 편지와 증인내용은 가짜였다 필체로 거짓말이 들통난 요시다 요코의 친구는 처음엔 부정하다가 거짓말을 했다고 시인했다 왜 이런짓을 했냐고 물어봤더니 인기 작가인 그녀가 부러워 질투했다는 이유다


범인 몽타주


그리고 방송에서는 영국의 군사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크리스 로빈슨이 초능력으로 범인의 몽타주가 작성되었지만 범인의 몽타주로 사건을 해결하기에는 미흡했다


요시다 요코 생전 모습 사진


범인은 누구였을까? 열성팬? 요시다 요코의 친구? 청부살인? ...

이글공유하기

댓글()

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6. 12:23

911테러 사건(September 11 attacks),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 다발적 항공기를 납치 하고 미국 뉴욕 맨해튼,세계무역센터,워싱턴 펜타곤 건물에 자폭 테러한 사건이다


미국 911테러 사건


911테러 사건으로 테러범 포함, 2,996명의 사망자와 6,261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 한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테러범은 모두 사망하였고 워싱턴 국방부에서는 실종된 사람이 125명, 세계무역센터 2,500명이상, 뉴욕 소방관,경찰관,경찰견,응급사등 412 순직하게 된다 미국 전역은 하루만에 동시다발적 테러사건으로 비상사태에 빠지게 된다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2001년 9월 11일, 오전 7시59분,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11명의 승무원과 76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모하메드 아타(Mohamed Atta) - 당시 33세, AA 11편의 납치 행동대장, 이집트 국적. 마르완 알 셰히의 사촌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Abdulaziz al-Omar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와일 알 셰리(Wail al-Shehri)[6] - 당시 28세, 사우디아라비아, 왈리드 알 셰리의 형

왈리드 알 셰리(Waleed al-Shehri) - 당시 23세, 사우디아라비아, 와일 알 셰리의 동생

사탐 알 수콰미(Satam al-Suqami) - 당시 25세, 사우디아라비아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8시14분,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9명의 승무원과 51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마르완 알 셰히(Marwan al-Shehhi) - 당시 23세, 아랍 에미리트 국적, UA 175편의 납치 행동대장. 모하메드 아타의 사촌

파예즈 바니하메드(Fayez Banihamed) - 당시 24세, 아랍 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중국적

모한드 알 셰리(Mohand al-Shehr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함자 알 감디(Hamza al- Ghamdi) - 당시 20세, 사우디아라비아아메드 알 감디의 동생

아메드 알 감디(Ahmed al-Ghamdi) -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함자 알 감디의 형


아메리칸 항공 77편(aa77)



8시20분,아메리칸 항공 77편(aa77), 6명의 승무원과 53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 탑승


하니 한주르(Hani Hanjour) - 당시 29세,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AA 77편의 납치 행동대장

칼리드 알 미드하르(Khalid al-Mihdhar) - 당시 26세, 사우디아라비아

마제드 모퀘드(Majed Moqed) - 당시 24세, 사우디아라비아

나와프 알 하즈미(Nawaf al-Hazmi) - 당시 25세,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살렘 알 하즈미의 형

살렘 알 하즈미(Salem al-Hazmi) - 당시 19세[9],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나와프 알 하즈미의 동생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8시42분,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7명의 승무원과 33명의 승객 = 4명의 테러범 탑승


지아드 자라(Ziad Samir Jarrah) - 당시 26세, 레바논 국적, UA 93편의 납치 행동대장.

아메드 알 나미(Ahmed al-Nami) - 당시 24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이드 알 감디(Saeed al Ghamdi) - 당시 21세, 사우디아라비아

아메드 알 하즈나위(Ahmed al-Haznawi) - 당시 20세, 사우디아라비아


첫번째 테러



보스턴 관제소에서는 이륙한지 15분이 지난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과 교신을 시도하지만 응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후 우리는 비행기들을 납치했다 가만히 있으면 무사할것이다 지금 공항으로 회항하고 있다는 교신을 듣게 된다

관제사는 곧바로 연방 항공국과 공군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납치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였고 큰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런데 aa11편의 사무장이었던 베티 옹이 기내 전화로 비행기의 납치 사실을 알리게 된다 잠시 후 aa11편은 뉴욕 상공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베티 웅의 전화도 끊기게 된다


8시46분, 11명의 승무원과 76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아메리칸 항공 11펀(aa11)이 시속 790km의 속도로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제1 세계 무역 센터) 93층과 99층 사이에 충돌했고 항공기는 폭발되지 않은채 건물에 박혔다


이때 까지만해도 언론사와 사람들은 조종사의 조종 실수로 충돌한것으로 추측을 했었다...


아메리칸 항공 11편(aa11)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 충돌 동영상 : 링크


두번째 테러



9시5분, 9명의 승무원과 51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이 잠시 동안 교신이 끊긴후 불규칙하게 비행하고 있는것을 뉴욕 관제소에서 포착을 하였고 항로를 벗어나 뉴욕 상공으로 들어와 금방이라도 추락할듯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시속 950km의 속도로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제2 세계 무역 센터) 77층과 85층 사이에 충돌하였다


2번째 테러가 일어난후 사람들은 비로소 단순 사고가 아닌 미국에 대한 테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남쪽 타워 중저층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건지 모르고 있었다 방송실에서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기 때문이다 잠시후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이 충돌된후 대피를 하라는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난중에 알고보니 비행기가 충돌한 곳이 방송실이였던 것이다

폭발 열기와 유독 가스로 인해 수백명의 사람들은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려 죽어가는 광경이 포착된다 9시59분, 약 56분만에 남쪽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같은 시간대 부시 대통령은 앤드류 키드 보좌관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고 보고를 들었지만 태평하게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7분이 지나고 초등학교 교실을 떠났다 사건 당시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바로 초등학교를 떠났다고 과장해서 논란을 빚어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ua175)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 충돌 동영상 : 링크


세번째 테러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 2번째 테러를 당한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테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미국 상공에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중에 납치된 항공기를 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교신이 안되는 비행기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비행기의 이륙을 금지시켰고 고층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다

만일을 대비한 공군은 전투기의 출격을 준비하였고 백안관,국회의사당,워싱턴DC와 뉴욕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다 2번째 테러이후 만만의 준비를 했지만 계획된 테러범들을 이길수 없었다  9시37분, 6명의 승무원과 53명의 승객 = 5명의 테러범이 탑승한 아메리칸 항공 77편(aa77)이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하여 들어가 큰 화재가 발생했다


메리칸 항공 77편(aa77)국방부 건물 펜타곤 충돌 동영상: 링크


네번째 테러 실패


10시3분, 7명의 승무원과 33명의 승객 = 4명의 테러범 탑승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129km 떨어진 곳에 추락하였다

정황상 워싱턴 DC의 미국 구회의사당이나 백안관을 목표로 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이 추락한 이유는 조종석에서 항공납치범들과 승객들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저항으로 추가 테러를 막을수 있었지만 추락후 탑승객 전원은 사망 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ua93) 추락 동영상:링크


테러후 모습



911 테러 세계무역센터 충돌 동영상:링크 / 링크2


2004년 10월, 오사마 빈라덴이 인터넷을 통해서 왜 911테러를 계획했는지 밝혔다 1982년도에 미국 제6함대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도와서 대규모로 공격을 했던 사건이 원인이라고 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각종 첨단장비와 5천달러의 현상금까지 걸고 오사마 빈 라덴을 잡으려고 아프가니스탄가서 전쟁을 했으나 오사마 빈라덴을 잡지 못했다

2011년 5월 2일,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의 위치를 확보했다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있던곳은 아보타바드 호화 주택가에 위치한 안전가옥이었다

2011년 5월 2일, 밤 01시00분 미국 특수부대 DEVGRU 25명은 헬리콥터 4대에 탑승한후 오사마 빈라덴의 안전 가옥을 기습 공격했다 오사마 빈라덴의 조직원들은 로켓탄과 소총으로 저항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일이라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모두 사살되었고 빈라덴은 침실에서 사살되었다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감행할수 있었던것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sm]의 도움이 컸다 199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빈라덴과 모하메드는 미국에게 복수할 비장의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은 훈련된 조종사를 이용해 비행기를 납치하고 미국의 시설물들을 공격하자는 계획이였다


10대의 항공기 납치, 국방부,CIA,FBI,세계무역센터,주요 시설등에 자폭 테러[충돌], 마지막 비행기는 직접 조종해 적당한 곳에 착륙한뒤 미국의 중동 정책을 비난하는 발표하고 남자 승객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만 풀어준다



오사마 빈라덴은 4명의 테러리스트들을 독일로 보내 미국의 비행 학교 등록을 시켜 훈련을 시켰다 이후 2001년, LA에 도착을 한 테러리스트들은 계획대로 비행기를 납치를 해 911테러를 일으킨다


911테러 이후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파키스탄에 잠적했다 CIA에게 체포된 테러리스트의 자백으로 그의 위치가 발각되어 2003년 3월1일 체포되었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미국 영공에 떠 있는 수만대의 비행기다 모든 비행기를 통제하고 감시했지만 철처히 계획된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조직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 911테러를 막을수 없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9:53

나카무라 미나코 실종사건,1998년 4월6일,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서 살던 나카무라 미나코(中村三奈子,Megumi Yokota,당시 18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 학원을 등록하러 가던중 실종된 미제사건 이다


나카무라 미나코



가족들이 집에 와보니 미나코에게 대입 학원 등록비로 주기로 한 돈 50만엔중 3만엔을 빌려간다고 메모를 남겼지만 학원에 가지 않았고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수사중 미나코가 실종되기 9일 전인 3월25일 미나코의 이름으로 여권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급된 여권은 실종되기 4일전인 4월3일 발급 되었다

당시 가족들은 미나코의 여권 발급 사실조차 몰랐으며 여행을 갈려고 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한점은 집 근처 나가오카시에서도 여권발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미나코는 니가타시까지 가서 여권을 발급했다는점이다

사건 당일 미나코는 여행을 갈려는 옷차림도 아니었고 평상복을 입고 짐도 없이 집을 나섰고 자주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두고 간점을 빼고 이상한점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실종 다음날인 4월7일, 미나코는 니가타 공항을 통해 서울로 갔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다 미나코의 이름으로 나가오카 여행사 서울[김포]행 대한항공 티켓을 예매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여행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중년 나이 정도의 여성이 미나코의 이름을 사칭하고 서울행 항공티켓을 예매를 의뢰 했다 그리고 그 중년 여성은 일본에 자주 왔는지 익숙해 보였고 숙소 예약은 필요 없다며 왕복이 아닌 편도 항공권을 원했다

집을 나간 당시의 복장 (모자와 후드) 나카무라 미나코


또한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중년 여성이였다 하지만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의 당시 복장은 남색 후드 같은 감색 청바지, 파란색 체크 모자를 썼었다


항공티켓을 받은 중년의 여성은 사람을 찾고있는 모습이였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탑승구로 향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또 있었거나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에게 직접 항공티켓을 예매하라고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고할 염려가 있어 사칭까지 하면서 까지 항공티켓을 예매를 했던 것이다


4월7일, 서울로 출국해 도착했지만 중년 여성과 나카무라 미나코의 행방은 찿을수 없었다

가족들의 의하면 미나코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혼자서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자체가 말도 안된다며 증언을 했다


미나코의 실종은 제3자의 개입이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미나코에게 접근했고 왜 한국으로 데리고 가는지가 의문점이다


미나코 어머니 나카무라


현재 미나코 어머니 나카무라는 지금도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한국에 자주 온다고 한다

39세의 나카무라 미나코


한국 경찰이 과거의 얼굴 사진 등을 합성 하고 39 세가 된 현재의 얼굴의 이미지를 제작 한 것으로 22 일 확인됐다


실종된 나카무라 미나코는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충동적으로 가출을 한것일까? 아니면 협박과 위협으로 인해 어디로 강제로 끌려간것일까? 나카무라 미나코의 실종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의문점을 많이 남게한 사건인것 같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1998년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살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6:04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사건,울산광역시 김용민(당시 12세)는 살충제가 들은 요구르트 먹고 22일 새벽 혼수상태에 빠진후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발생 1998년7월19일, 뱃일을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 김영세(당시 49세)는 햄버거를 사 달라는 아들 김용민(당시 12세)를 위해 백화점으로 가게 된다


김용민은 6살때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를 절둑거리게 되어 걸어서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2km되는 먼 거리를 걸어 백화점에 도착해 음료수 코너에서 딸기맛 요구르트 3개를 사서 스낵 코너로 갔다

샌드위치를 산뒤 요구르트와 먹던 김용민은 요구르트 맛이 이상하다며 말한뒤 이상 증세를 보였다 곧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고 7월 22일 새벽 1시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울산 지역은 언제 어디서 다시 나올지 모르는 독극물 요구르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에 경찰은 우유팩에 바늘 자국등 외부에서 주입된 흔적이 있나 찾아봤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요쿠르트 제조 과정에 다른 이물질을 넣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 최종적으로 요구르트를 아들에게 준 아버지 김영세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했다

하지만 김영세는 참고인 조사후 이미 잠적한 뒤라서 그를 조사할수 없었다



이후 김영세의 행적을 추적하던중 시골 아주 깊숙한 곳에 은둔해 살면서 도인 행세를 하고 있는것을 포착 했지만 잡질 못했다 



사건 당시 김영세는 아들의 사달라고해서 요구르트를 구매했다고 진술했으나 CCTV 확인결과 김영세(본인)이 직접 구매 한걸로 포착이 되었다

수 차례 동일 백화점에서 같은 요구르트를 구입했고 요구르트에 독극물이 들어있다고 백화점에 항의한것이 의문을 남겼다



그리고 김영세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김용민이 6살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보험금을 수령했지만 다리를 고쳐주지 않고 도박판에서 전부 탕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1년동안 뱃일을 하지 않았다 김영세가 탔던 배의 선장한테 물어보니 단 8일 동안만 일을 했고 뱃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며 그만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김영세에게 요쿠르트를 팔았던 백화점 직원들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된다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데도 백화점에 항의만 하고 있는것이 이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웃으면서 병원을 나왔다는점과 식품을 먹고 탈이 나면 보통 식중독을 먼저 의심하는데 독극물 타령을 하는 김영세를 보고 수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에 경찰은 김영세를 다시 조사하기 위해 장례식이 끝난후 경찰서로 출석할것은 요구했지만 아들 김용민의 발인날 목욕탕에 다녀오겠다면 장례식장을 나간뒤 사라졌다


김영세가 잠적후 잊혀져 버리나 했는데, 김영세가 행방불명된 후 2000년 공소 중지되었으나 2013년 6월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제조사에서 제조 과정에서 독극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공소시효를 하루 앞둔 2013년 7월 17일 재차 기소되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한국 미제사건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4:52

인천 십정동 부부 살해사건,인천 부평구 십정동에서 집 주인 김씨(당시 56세),부인 임씨(당시 53세)가 피살된 채로 발견된다 두 사람 모두 칼로 전신을 난자당한채로 살해당했으며 적금 통장이 사라진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범인은 추적했지만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2006년 11월 16일, 오전 7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한 주택, 1층에 사는 세입자가 죽은 집주인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집주인 김씨는 8군데 자창이 발견되었고 아내 임씨는 37군데나 칼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시신 옆에는 피 묻은 비옷과 신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김씨 부부를 발견한 세입자는 그 날 새벽 2층에서 전화벨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상한 느낌에 아침에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김씨 부부가 숨져 있었다고 진술 했다

방안 서랍은 열려 있었고 누군가 뒤진 흔적이 있었지만 패물과 현금은 모두 그대로 있었고 없어진 것은 부엌 찬장에 있던 1억원의 적금 통장이였다


김씨는 건축업을 했었고 임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빚이 없었고 이웃과의 관계로 원만 했다 당시 범인은 현관문을 따고 들어오지 않았고 담을 넘지도 않은걸로 보아 김씨부부가 문을 열어준 상태에서 집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김씨와 범인은 평소 알던 사이나 무슨 일때문에 잠시 들렸다는 것이다 김씨 주변 인물을 조사했으나 용의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유력한 단서로 현장에 피 묻은 비옷이 있었다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 범인은 피 묻은 비옷을 버리고 간것일까?

사건 당일날은 비나 눈이 오지 않아 옷에 피가 튀는 걸 막기 위해 입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씨 부부는 당시 범인에게 칼로 공격을 당하면서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항을 했으면 다른 부위에 상처가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이에 경찰은 범인이 수십 차례 칼로 찌르는것으로 보아 원한 관계에 인한 살인으로 추측을 했다

 

범인은 현장에 머리카락,지문을 남겨놓지 않았는데 족적과 피 묻은 비옷을 남겨놓았다 왜 남기고 갔는지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였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가족들에 대한 수사도 벌였다 김씨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의대생,차남은 수의대생이였고 같이 살지 않았다 의심쩍어으나 가족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혐의를 벗었다


이후 경찰은 모든 계좌와 가입한 보험등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만 돈을 빼간 흔적도 없었기 때문에 원한 관계로 결론을 지게 됬다


경찰은 김씨 부부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60여명의 형사를 투입해 1,500여명의 인원을 조사했지만 수사를 진행 했지만 추가적인 단서와 흔적을 못 찼은채 수사를 종결하게 되는 미제사건으로 남게된다



한편으로는 영화 공공의적 모방 범죄로 보고 있다 1억원의 통장을 가져갔지만 돈을 빼간 흔적도 없었고 두 아들과 1,500여명의 주변 인물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범인은 영화 공공의적를 보고난뒤 이유없이 묻지마 살인을 했을거라고 추측을 했지만 신빙성이 없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 판타지 호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중 사라지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5. 11:45

풍선 아저씨 행방불명 사건,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가 자신이 만든 박스에 풍선을 매달고 태평양 횡단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미제사건이다

1940년,도쿄도에서 피아노 조율사 일가에 태어나서 국립 음악 대학 부속 고등학교 를 졸업 후 야마하 계약 직원으로 도쿄도 고가네이시에서 피아노 조율사로

일을 한후 44 살 때 음악 교재 판매 회사 뮤직 앙상블을 창업하여 피아노를위한 마이너스 원 테이프 (오케스트라 에서 특정 악기를 분리하여 녹음 한 연습용 가라오케 음악 테이프)의 판매를 시작하지만 실패를 맛보게 된다

1986년,긴자에서 음악 살롱앙상블을 개점에 실패후 마작 게임장과 커피살롱,펍 레스토랑등을 운영하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다 1990년 4억 ~ 5억엔의 빚을 지고 파산해 빚에 쫓기게 된다


풍선아저씨 '스즈키 요시카즈(鈴木嘉和)'


어느 날 그는 비닐 풍선 26 개를 붙인 곤돌라 ( 비행선 )을 만들어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해 빚을 갚겠다며 채권자들에게 말을 했다..


1989년 3월 25일,요코하마시에서 개최된 요코하마 박람회 세입자 출점을 해서 거액의 돈을 빚지고 판타지호를 출품하게 된다 하지만 회장 내 전시 위치도 좋지않았고 박람회 자체도 흥하지 않자 관광객 유치로 데즈카 오사무가 디자인한 요코하마 박람회의 마스코트 부루아짱 인형을 만들어 촬영,사인회를 실시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진에 흥하지 않자 불만은 품은 스즈키는7월30일 새벽 4시부터 7시 동안 열주에 부루아 짱 인형을 입고 높이 30미터의 철탑을 기어올라 농성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박람회 관계자는 119에 신고를 했고 구조 대원이 사다리 차량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서 설득하지만 스즈키는 아니아니 포즈를 하는등 거부 한후 1시간 가까이 철탑 위를 배회했다


박람회 협회 측에서 1 일 10 만명의 관람객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3 만 ~ 4 만명으로 드러나고 흥하자 않자 스즈키는 10 월의 폐막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 요코하마 박람회 협회가 대책을 세우지 않는거에 대해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4월 17일,에는 풍선으로 날아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후츄 경찰서 방범과의 경찰관 의 제지를 듣지 않고 도쿄도 후추시 의 타마가와 하천 부지 에서 치바현 의 구주 쿠리 바닷가 를 목표로하고 오후 12시 45 분에 헬륨 풍선으로 날아 올랐지만 자신이 앉은 의자에 5 미터와 2.5 미터의 풍선 각 2 개를 직접 묶어 달고 추 15kg의 모래 주머니 2 개가 밖에 급상승 약속 고도 400 미터 5600 미터 고도에 도달하자 라이터 불로 구워 5 미터의 풍선이 분리를 하게 된다

이 후 고도가 낮아져 오후 1시 40 분경에 출발 지점에서 24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도 오타구 大森西 일곱 쵸메의 민가의 지붕에 불시착했다. 


불시착으로 왼손에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사과한뒤 성공하면 다음은 하와이를 목표로 예정이며 재차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첫 비행 후, 스즈키는 NHK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을 하게 되었고 풍성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1992 년 11 월 23 일 당시 52 세였던 스즈키는 헬륨 이 들어간 풍선 을 다수 붙인 곤돌라 " 판타지 호 "시험 비행을 비와코 호반에서 실시했다.

반년이 지난 1992년11월23일,도시샤대학 교수 미와 시게오(三輪茂雄)와 학생 7명,수많은 취재진들이 모인가운데 스즈키는 헬륨 풍성 여러개를 단 판타지 호의 시험 비행을 시작했다 


이날 명목은 어디 까지나 200 미터 또는 300 미터 상승 실험 것이었다 교통부 (현 국토 교통성 )는 안전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에 비행 허가 신청을 수리하지 않고, 어디 까지나 지상에 계류되어있는 시험 비행하는 조건으로 수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만약 태평양 횡단을 결행 한 후 언론이 호들갑 집으로 몰려 오는 것 같다"고 가족 호텔에 숙박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하고 있으며, 스즈키는 비밀리에 미국까지 비행을 강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시 20 분경 스즈키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뒤 주위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진채 로프를 풀고 비와호 호수에서 미국 네바다준 샌드 마운틴을 향해 출발했다

미와 교수는 어디로 가는 건지?라고 물어보자 미국이예요 제트 기류를 타면 40시간 내에 미국에 도착할거라는 대답을 남기고 떠났다


호텔에있는 가족에게 밤10시부터 휴대 전화로 1시간마다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해가 아름답다,괜찮다등을 연락을 한후 다음날 아침 6시 아내에게 '갈 곳까지 갈테니 갈까 걱정하지 네!"마지막 전화되었다. 이후 휴대 전화는 불통되었다



24일 자정부터 SOS 신호가 발신되고, 25 일 8시 30 분 해상 수색기가 출동해 미야기 현 긴카 산 앞바다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해상에 "판타지 호"를 발견하게 된다 스즈키는 수색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 괜찮다면서 SOS신호를 중지했다 이후 3시간동안 2,500m ~ 4,000m 상공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판타지 호가 구름속으로 사라지게되자 수색기는 스즈키의 추적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판타지 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였다...


이케다 마나부는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에서 "생존은 어려울 것"라고 대답하고있다 판타지 호의 비닐 풍선의 소재가 염화 비닐 라면 하루에 약 10 %의 비율로 가스가 공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하늘에서 오래 못버티고 바다에 빠져 사망했을거라는 예상했다


마지막으로 판타지 호가 목격 된 때 판타지 호는 긴카 산 앞바다 800km로 고도 2500m 시속 70km에서 북동쪽으로 향하고있어 기상청 간부도 항공 평론가 아오키謙知 도 함께 러시아 캄차카 반도 근처까지 도달 한 이 아닐까 추측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1994년까지는 호적상에는 살아있는것으로 되었으나 일본 민법상 실종 후 7년이 경과되면 자동으로 사망처리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사망한 상태다



남겨진 아내는 회사의 동업자이며 집이 저당에 들어 있고 빚은 남겨진 아내가 계속 지불하고있었다 (2006 년)이후 아내는 이혼 절차를 혼자한뒤 2016년에 재혼 했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20:25

도쿄역 보관함 사체 유기 사건, 일본 도쿄의 도쿄역에서 신원을 알수 없는 70대 여성의 변사체가 노란 여행가방에 담겨 물품보관함에서 발견된 사건으로 범인은 커녕 시체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못한 미제사건이다


2015년4월26일, 오전 9시40분경 일본 도쿄역 물품보관함을 관리하는 직원이 물품보관함에서 노란 여행가방을 발견하고는 분신물로 간주해 역무실에 맡기게 된다

전날인 4월25일, 오전 9시경 보관함을 점검했을때 문제의 여행가방은 없었다고 한다




사건발생 한달후 2015년 5월31일, 일본 도쿄의 도쿄역, 보관기간이 지났는데 찾아가지 않자 직원은 역무원 입회 하에 노란 가방을 발견 하고선 열었는데 안에는 70대 여성의 시체가 담겨져 있었다

변사체의 여성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외상은 없었다 변사체는 반으로 나눠져 있었고 부패가 진행중이였다


역에는 다수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에 범인을 찾을거라 기대했지만 1개월이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기능때문에 범인을 찾을수 없었다


부검을 하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여러 사실을 알아낼수 있었다



나이는 70세 이상,키 140cm, 마른체형에 굽은 허리를 했고 이마에 5mm 돌출, 치아는 없어서 틀니를 착용했다 머리카락은 백발,손가락은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인상착의는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었다 


일본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할수 없어 난항을 겪었다


사건은 2017년까지 이어졌고 일본 경찰은 도쿄역 일대에 시민들을 상대로 변사체의 몽타주 전단지를 돌렸지만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일각에서는 장례비가 없거나 노령 연금을 받을 목적으로 부모가 죽은뒤 시신을 방치하거나 암매장 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7:09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北関東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1979년 일본 이래 토치기현과 군마현을 줌심으로 벌어진 의문의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 사건이다 1979년 토치기현과 군마현 일대 두 현의 경계에 해당되는 반경 20km 일대에서 4명의 여자 어린이가 살해되고 1명은 실종되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


첫번째 사건-1979년 8월3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살던 5살 여자 어린이가 자신의 집 근처 야쿠모 신사의 경내에서 놀다가 실종된후 8월9일 등산가방에 담기 전라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담았던 등산 가방은 특수 사양의 한정 판매된 물건이라 범인을 잡을거라 생각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두번째 사건-1984년 11월17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의 5살 여자 어린이가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되고 2년후인 1986년3월8일 집에서 1.7km 떨어진 장소에서 백골이 된채로 발견되었다


세번째 사건-1987년9월15일,군마현 닛타군 오지마마치의 초등학교 2학년 여자어린이(당시8살)가 새끼 고양이를 안고 집 근처 오지마 공원에 놀러 나갔다가 실종되고 1년후인 1988년11월27일, 토네가와 하천부지에서 백골이된 사체 일부는 발견하게 된다


네번째 사건-1992년5월12일,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 살던 4살 여자 어린이가 파칭코 가게 근처에서 실종된후 5월13일 와타라세강 근처에서 등산가방에 담긴 전라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DNA 조사로 스가야 토시카즈가 범인으로 체포되지만 경찰의 판단착오로 인한 누명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누명을 벗을수 있던 이유는 니혼 TV의 시미즈 키요시의 보도 에 하천부지에서 피해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 걷고 있던 다른 범인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다섯번째 사건-1996년7월7일, 군마현 오타시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4살 여자 어린이가 실종되었다 2,4번째 사건처럼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되었다 

동일범으로 추측한 경찰은 파칭코 가게의 CCTV를 확인한 결과 아시카가 사건에서 목격된 범인과 용모가 흡사한 남자가 찍혔다고 한다


납치 살해된 여자 어린이들의 나이는 4~8세, 파칭코 가게에서 실종, 하천부지에 시체를 유기, 주말에 사건이 발생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동일범으로 추정을 했다


범인은 소아성도착증 혹은 아동성도착증[성도착증] 성향을 가지 남성으로 군마현 오타시와 토치기현 아시카가시 일대에서 휴일날 범행을 저지른것으로 보아 그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일 가능성을 제기 했다


용의자 사진


CCTV에서 기타칸토 여자 어린이 연쇄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의 몽타주가 나왔지만 희미하게 보여 범인을 찾기에는 무리였다 

유일한 범인의 단서였지만 끝내 범인은 못잡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cctv에 찍힌 범인 동영상:링크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6:21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嵐真由美さん失踪事件)은 1994년 9월2일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갔던 아리시 마유미(嵐真由美, 당시 27세)는 친구를 만나겠다며 외출을 한뒤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라시 마유미


3개월된 딸을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진 마유미의 실종...


언니 요코


[언니 인 요코 씨의 증언]


실종 당일 마유미는 이해할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다 친구와 만난다고 언니에게 말하고 나갔다 실종 다음날 마유미의 언니 요코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니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외출전 마유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실종 당일날밤 지인 남성에게 수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언니의 옷장에서 지인남성과 사귀고 싶었지만 배신했다 미안이라는 마유미의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언니는 지인 남성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실종된 당일 오전에 마뮤미와 만났고 내가 마유미를 죽였다면 감옥에서 속죄해야죠?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수상하게 여긴 언니는 심부름 센터에 가서 지인남성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의뢰를 하게 된다 조사 결과 지인남성은 사건이 일어난 1년후인 1995년3월9일 캔 주스 2개를 들고 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게되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이후 경찰이 산속을 수색했지만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2011년10월13일 TV 아사히의 "슈퍼 J채널 추적! 진실의 행방에서 마유미 실종사건을 다루게 된다 마유미 실종 당시 언니는 자신의 옷장에서 여동생의 메모를 발견했고 메모에는 마유미와 지인남성과 불륜을 하고 있었고 지인남성의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는 인터뷰를 하게 된다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의 인터뷰에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요코의 인터뷰가 끝나고 바로 아버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코의 이야기는 믿지 말아라

메모를 걸어두었다 말로 하면은 딸 요코가 들을까봐 메모로 적어둔것 같다..


마유미 실종 당시 아버지는 요코가 증언한 얘기가 거짓말이라는것을 알고 있었고 마유미가 왜 실종되는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동안 아버지는 왜 묵인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은 아버지와 언니 요코의 진실로 풀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둘은 먼가 있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실종된 마유미는 어디로 간것일까? 납치? 아니면 살해를 당했던것일까..... 아라시 마유미 실종사건은 아무런 단서도 못차고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5:14

사쿠마 나나 유괴 사건(佐久間奈々さん誘拐事件)은 일본 치바시 와카바구 타베타쵸 도로에서 중학생 1학년 여학생 사쿠마 나나가 실종된 사건이다

사건 발생 1991년 10월 27일, 12시경 사쿠마 나나는 당일 자정 무렵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약 4KM 떨어진 편의점으로 야식을 사러 나왔다

오전 1시경, 이것저것 물건을 산뒤 돌아가는 길이였다 126번 국도를 건너 타베타쵸 근처에 왔는데 태풍으로 인해 도로에 쓰러져있던 나무를 못 피하고 자전거를 부딪히게 된다

이때 뒤에서 갑자기 낯선 남자가 잠깐 멈춰라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물으면 다가왔다고 한다 155cm키에 나이는 4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로 청소년 생활 지도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한다


아이들 앞에 다가온 청소년 생활 지도원 남자는 4명의 학생에게 잔소리를 하게된다


사쿠마 나나



16세 미만의 청소년이 밤 11시 넘었는데 돌아다니는건 위법이다 경찰에 넘기고 싶지만 너희들은 불량 청소년이 아닌것 같으니 대표로 한명만 나와 같이 얘기좀 하자! 라고 말한뒤 사쿠마 나나를 지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나의 친구 3명에게 너희들은 돌아가 있어 몇분만 이야기하고 돌려보내마라는 말을 남기고 나나는 그 남자와 함께 국도 옆 작은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그남자의 말대로 친구 3명은 나나의 집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을 하고 있던중 이상하다 들어 나나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급히 연락을 받고온 부모는 나나의 친구들과 같이 나나를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새벽 4시20분, 히가시치바 경찰서에 신고하게 된다


사쿠마 나나를 납치한 범인 몽타주


그런데 경찰의 조사결과 126번 국도에 청소년 생활 지도원 근무가 없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청소년 생활 지도원을 사칭해 나나를 납치한것이다


몇일 후 나나가 납치된 당일 오전 1시 20.30분 경 차를 몰고 이동중 현장 근처 교차점에서 나나와 그 남자가 걷고 있는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오전 4시 주택가 치시로다이쪽을 걷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뚜렷한 단서.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2012년12월 치바시 국도 주변이 일본 내 북한 공작원들의 비밀루트로 밝혀져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수사의 진척의 도움이 되지 않고 사쿠마 나나의 실종사건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27년이 흐른 지금 사쿠마 나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미제사건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1:50

일본 마스야마 히토미 실종사건(増山ひとみさん失踪事件)은 사건 발생 1994년 2월19일, 결혼을 앞두고 있던 마스야마 히토미(당시 21세)는 퇴사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던중 길에서 실종된다 히토미는 치과에 근무하고 있었고 3주 뒤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실종 당일이 마지막 근무였다



실종된후 히토미의 동료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실종되기 수일전부터 히트미의 집으로 아무 말없이 끊는 전화가 계속 걸려왔고 실종 당일에도 직장에 전화가 걸려왔고 마스야마 히토미씨 계십니까?라는 전화를 동료가 받았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히토미와 결혼하는 남자의 전 여자친구였고 몇번이고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히토미는 시계를 보며 만날 약속을 하는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 전화를 받고 난뒤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귀가하던 모습이 마지막였다고 한다


히토미의 행방이 모연하던중 근무지로부터 500M 떨어진 공터에서 히토미의 차를 발견하게 된다 차는 그대로 있었고 동료들에게 받은 선물과 꽃다발,소지품,결혼반지가 차안에 있었다 




그리고 차 겉에는 바보,못난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1년후인 1995년 1월,한 중년 여성이 히트모의 집의 전화를 걸게 된다


히토미 동생:마스야마 입니다

여자:여보세요?

히토미 동생:네?

여자:언니야!

히토미 동생:네?

여자:언니야!

히토미 동생:누구세요?

여자:언니라고!~

히토미 동생:도대체 누구신가요?

여자:히토미예요~

히토미 동생:네?


이후 중년여성은 갑자기 전화를 뚝 끊는다.... 실제전화통화내용:듣기


히토미라고 했던 중년 여성은 누구였을까? 전화를 추적할 결과 공중전화로 걸어왔다고 밝혀졌지만 신원을 파악 하지못했다

추측으로는 히토미와 결혼하는 남자의 전 여자친구일 가능성이 있다 알리바이로 체포되지 않았지만 야쿠자의 딸이였고 히토미가 실종전 계속전화를 걸어왔었고

실종 당일에도 전화를 했던 인물이 전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히트미 애인이 실종 후 인터뷰에서 찾을수 없을겁니다 라고 발언한것이 히토미 실종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점이다 또 다른 증거는 히토미가 실종이 된후 히토미와 결혼을 하기로한 남자가 전 여자친구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 정황으로 보아 범인은 전 여자친구일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고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히토미 실종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미 경찰은 알고있더라도 야쿠자의 딸이라서 섣불리 수사진행을 못했을 것이다 일본 야쿠자는 세계 3대 세력으로 기업,경찰,검사,정치권,연예인,언론등 모두 관여하고 있다 즉 일본 전역에 이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곳이 없기 때문에 건드리면 안되기 때문에 모르척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추측


1995년 1월 중년 여성이 히토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히토미라고 했던것으로 보아 히토미는 생존해 있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 뚝 끊어질것을 보면 누군가에게 도망치다 잡혀거나 옆에 누군가 있었다는것다  


이후 히토미는 감금을 당한후 강제로 성매매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확률은 극히 적다 히토미가 살아있었으면 히토미와 결혼하기로 한 남자와 전 여자친구와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 여자친구는 마음이 돌아선 남자친구를 다시 붙잡을려고 히토미를 살해해 다시 돌아서게 한것으로 판단이 된다


만약에 살아있지 않다면 1995년 1월에 걸려온 전화가 히토미의 마지막이였을 것이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일본 미제사건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 1년동안 실행된 범인의 연쇄 협박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4. 10:00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グリコ・森永事件)은 1984 ~ 1985년 사이에 일본 교툐와 한신 지역을 중심으로 메이저 제과기업,식품 기업들에게 일어난 연쇄 협박 사건으로 범인을 못 잡은 미제사건이다


글리코 사장


사건발생 1984년 3월 18일 오후 9시,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일본 굴지의 제과회사 에자키 글리코 사장 자택에 총을 무장한 정체불명의 남성 3명이 침입했다 에자키 사장의 부인과 딸을 화장실에 묶어 가둔 다음 욕실에서 목욕하고 있던 에자키 사장을 납치해 달아났다 에자키 사장의 부인은 간신히 줄을 풀고 화장실에서 나온뒤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다음날 3월19일 새벽 1시, 오사카부 타카즈키시에 위치한 글리코사 이사의 집으로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전화가 걸러온다 범인은 이사로 하여금 지정한 장소로 현금 10억엔과 금괴 100kg을 들고 오라고 요구 한다

이사는 경찰에 신고 하게 된다 오사카부 경찰은 효고현 경찰과 합동으로 수사를 시작 하게 된다 이후 범인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지정한 장소와 몸값을 가져오라고 요구하게 된다 글리코사에서 범인들의 요구대로 몸값을 마련해 그 장소로 가서 경찰이 잠복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범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범인들이 몸값을 받아낼 생각이 있는지 의심을 품었다 현금 10억엔,금괴 100개의 무게만 무려 230kg 이였다 몇초라도 빨리 몸값을 받아서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였다 또한 에자키 사장의 어머니와 부인과의 통화에서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다고 말하자 범인은 돈은 필요없다고라고 대답한것이 이상했다 몸값이 목적이 아니라면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이였을까요?


사건발생 3일후 3월21일 오후 2시30분, 일본 국철 직원이 오사카부 이바라키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에자키 사장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경찰은 급히 출동해 에자키 사장의 신변을 확보하고 자택에 귀가 시켰다

에자키 사장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들은 오사카부 셋츠시 토카이도 신칸센 차량기지 근처에 데려와서 아이가와천의 치수조합 작업 오두막에 가두었고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했다고 한다


에자키 사장 납치 사건이 잊혀질 무렵 4월2일, 에자키 사장의 자택에 염산이 들어있는 안약 케이스와 협박장이 도착했다 4월8일까지 자신이 지정한 장소로 현금 6천만엔을 가져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경찰은 다시 지정한 장소에 가서 잠복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4월8일, 마이니치 신문과 산케이 신문의 오사카 지국 앞으로 자신들이 에자키 사장의 납치범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편지가 도착했다이를 도전장이라고했다 내용은 도전장을 세상에 공개하라고 요구였다 편지에는 서명이 없었고 발신인 에자키 사장의 명의였다 


4월10일 오후 10시 50분경, 오사카시에 위치한 글리코사 본사에 화재사건이 발생한다 이 불로 사무실 150평방미터 가량을 태웠고 글리코사 영양식품 저장고에 세워진 소형차가 불에타지만 금방 진화되었다

당시 모자를 쓴 의문의 남자가 도망치는것을 본 주민이 목격했고 곧바로 범인을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4월23일, 에지카 글리코사 앞으로 1억 2천만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하고 다음날인 4월24일 범인은 레스토랑,고속도로 서비스 에이리어,공중전화박스로 계속 장소를 변경하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날 오사카의 각 메스컴들 앞으로 범인들의 두 번째 도전장이 도착했다 자신들을 괴익 21면상이라고 자칭했다


5월31일, 에지카 글리코사에 도 다시 3억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을 했고 6월2일 셋츠 시내의 한 레스토랑 주차장에 3억엔을 넣은 차를 세워둘것을 지시한다

6월2일 당일, 오사카부 경찰본부 특수수사과 1과 직원 30명이 출동해 차량의 엔진을 고장나게 만든후 잠복하여 범인을 기다렸다 오후 8시45분 어떤 한남자가 3억엔을 넣은 코롤라 차량을 타고 출발했다 얼마가지 못해 차는 멈췄고 잠복한 경찰들에 의해 남자는 잡히게 된다

근데 이 남자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협박을 받아 이 차를 몰고 지정한 장소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뿐이라는 진술을 했다 경찰은 곧바로 범인이 지정한 장소로 출동해 의문스러운 차량 한대를 발견하고 추격했지만 국도 1호선의 교차로에서 놓치고 만다

6월25일, 범인들은 편지로 에자키 글리코사를 용서하겠다 오늘로 글리코사 협박을 멈추겠다는 선언을 한다



일본 마루다이 식품회사


이후 글리코사에 대한 협박은 없었지만 6월22일, 마루다이 식품 앞으로 협박장을 보냈다 글리코랑 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면 5천만엔을 준비하라! 제안을 받아들이다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직원모집 광고를 내라는 내용이였다

같은 날 마루다이 식품 상무의 집에 현금을 담은 가방을 준비하라는 협박문이 날아왔다 마루다이 식품은 바로 경찰에 신고 한다 


6월28일 오후 8시3분,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데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된 테이프를 튼 것 같은 전화에서 범인은 자신이 지시한곳으로 오라고 말한뒤 전화를 끊었다 오사카부 경찰본부 특수수사계 형사 7명은 마루다이 식품 직원으로 위장해서 지시한 장소로 가보니 지시문이 놓여 있었다

지시문에는 타카즈키역에서 교토로 가는 전철을 타고 좌측 창문을 보다가 흰 깃발이 보이면 창밖으로 5천만엔이든 가방을 던지라는 내용이였다 가방을 가지고 간 경찰은 그대로 전철에 탑승했으나 범인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종점 교토까지 갔다


그런데 전철 안에 잠복해있던 형사 한명이 의심스러운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여우눈을 한 남자였다 이 남자는 마루다이 식품 직원으로 위장한 형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5천만엔을 들고 있던 형사를 계속 따라 다니고 있었다 범인으로 추정해 체포할려고 했지만 범인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지시를 하면 체포하라는 말에 범인을 눈앞에 두고선 멍을 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멍을 타고 있을 무렵 타카즈키시에 도착을 했고 플랫폼의 혼잡함 가운데 범인을 놓치게 된다


1984년7월, 마루다이 식품 이사의 집에 현금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을 했고 7월6일 오후8시7분 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가 걸려와 지정된 장소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범인은 4번에 걸쳐 장소를 변경한 끝에 최종 장소에 현금을 가져오게 했으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루다이 식품은 초반 범인의 협박을 비밀리에 부쳤으나 매스컴을 통해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후 마루다이 식품에 대한 협박은 끝나게 된다


일본 모리나가 제과 회사


1984년 9월12일, 오사카부 오사카시에 위치한 모리나가 제과의 칸사이 판매 본부에 협박장이 배달된다 글리코랑 똑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면 1억엔을 준비하라 그렇지 않으면 청산소다를 제품에 넣고 매장에 놓아두겠다는 내용이였다

9월18일 범인은 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를 모리나가 제과의 칸사이 지사로 걸어왔고 같은 내용을 다섯 번 반복해 강조를 했다 범인은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모리나가 제과 협박은 마무리 됬다


범인의 협박장과 청산소다가 들은 제품


하지만 범인은 처음 보냈던 협박장에 말대로 행동을 했다 10월7일 ~ 10월13일 사이에  오사카부와 교토부, 효고현과 아이치현의등 여러 슈퍼마켓에서 의문스런 모리나가 제품이 발견되었다

제품 겉에는 물러나는게 좋을거다,위험, 먹으면 죽는다..괴인21면상이라는 내용의 종이가 붙어있었고 제품안에는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


10월8일, 오사카의 한큐 백화점으로 협박장을 보냈다 한큐 백화점 매장에서 모든 모리나가 제품을 철거하라, 모리나가는 우리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쳐부수겠다는 내용이였다


10월15일, NHK 오사카 방송국 앞으로 정제된 청산소다가 배달되고 각 신문사에는 도전장이 보내졌다 이 청산소다로 몇명을 죽일수 있을까?라는 내용이였다

퀴즈의 상품은 청산소다가 들어간 모리나가 제품이고 퀴즈 정답을 보낼곳은 경시청 총무부 기획과장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일본 하우스 식품 회사


모리나가 제과에 대한 협박과 꼬장이 끝날 무렵 1984년 11월7일 하우스 식품 총무부장의 집에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내용은 11월14일 교토 후시미구의 레스토랑에 현금 1억엔을 들고 오라는 협박장과 청산소다가 들어간 하우스 스튜가 동봉되어 왔었다

11월14일, 오후 8시 20분 범인으로부터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로 녹음된 테이프가 현금을 전달한 장소를 지정했다 교토부 경찰 본부와 오사카부 경찰 본부에 합동수사본부는 오사카와 교토에 다수의 경찰을 배치했다 역시나 지정 장소에는 지시문이 있었다 지시문대로 이동했고 총 4번의 반복끝에 최종 장소가 지정되었다

메이신 고속도로의 남교토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대기 중이던 교토부 형사가 여우눈을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저번에 놓쳐던 유력한 용의자였던 것이다 형사는 곧바로 보고 하였고 여우 눈을 한 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세번에 걸쳐서 다른 경찰들에게 목격이 되었다 범인은 현금을 실은 차를 오츠 서비스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오즈 서비스 구역에 형사 2명을 배치했다 그런데 여우 눈을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남자는 미행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벤치에 뭔가를 붙이는 등 수상한 행동을 했지만 형사 2명은 감시만 하라는 지시에 또 다시 놓지케 된다


이후 오츠 서비스 구역에 오사카부 경찰 본부의 특수수사계 형사들이 도착해서 현금 수송차를 살피는 있는 여우 눈을 한 남자를 보게되지만 체포 지시가 없어서 또 다시 놓치고 만다 그사이 여우 눈을 한 남자는 일반 도로로 빠져나갔다

다시 범인은 차량을 쿠사츠 주차 구역으로 이동하게 했고 나고야 방면으로 가다가 흰 천이 보이면 그 천 밑에 있는 깡통에 넣은 지시서를 보아라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무선통신이 되지 않았고 그곳으로 가보니 지시와는 달리 깡통은 보이지 않게되자 10시20분 합동수사본부는 수사를 중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우스 식품에 대한 협박 사건 수사의 상황을 전혀 모르던 시가현 경찰 본부 관할 경찰서의 외근직원이 순찰중 천이 붙어있는곳 근처에서 밤인데도 전조등을 켜지않고 있는 소형 자동차가 정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검문을 할려고 소형차로 다가가자 급발진해 도망을 친것이다 이에 외근 직원은 차에 타 소형 자동차를 추격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9시25분 경찰차가 소형 자동차를 발견했지만 운전자는 도망친 뒤였다 차량은 11월12일에 도난된 차량으로 밝혀졌으며 사건의 범인이나 관련자가 탔을거라는 추측을 했다 이 사건으로 외근 직원은 소형차의 운전자를 잡지 못한 책임으로 사직을 해야만 했다

11월9일 하우스 식품의 부장 앞으로 협박장이 날아왔다 11월14일의 있었던 일을 언급을 했으며 지금은 모리나가를 상대하느라 바쁘니 너희들은 나중에 상대해주마라는 내용이였다 이 협박장을 끝으로 하우스 식품에 대한 협박은 중단되었다


실제 범인 협박장


1984년12월7일, 후지야의 노무부장 앞으로 협박장이 도착했다 테이프와 청산소다가 동봉되어 있었다 며칠 뒤 12월15일 노무부장 에게 다시 협박장이 도착했다

내용은 12월24일 오사카 우메다 백화점 옥상에서 2천만엔을 뿌리라는 내용이였고 후지야 노무부장은 이를 거부했다


12월26일, 도쿄의 슈퍼 사장 앞으로 협박장이 도착했다 1월5일 이케부쿠로의 빌딩 옥상에서 2천만엔을 뿌리라는 내용이였고 이를 거부 한다


12월 4일, 아마추어 무선통신인이 수신 대역에서 이상한 내용의 무선이 잡아낸것이다 21면상과 타마사부로가 주고 받는 대화였다


타마사부로(玉三郎): 21면상, 여기는 타마사부로...

21면상: 약은 준비할 수 있는가?

타마사부로: 사람(ひと), 뚜껑(ふた), 사람(ひと), 여섯(ろく)[4] 항공권이 왕복으로 확실히 잡혀 R6[5]에 가는 경우에는 당일치기로 반드시 갈대가 붙지 않도록 돌아오라.

21면상: 후지야는 돈을 낼 것 같지 않다.

타마사부로: 후지야는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마추어 무선통신인은 이를 녹음해 경찰에 신고를 했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고 후지야의 협박은 중단된다


1985년2월13일, 언론들에게 발렌타인 데이 폐지를 주장하는 도전장이 도착했고 같은날 도쿄와 아이치현에는 물러나는게 좋아 위험이라고 적힌 초콜릿들이 잇달아 발견 되었고 초콜릿에는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 메이지와 롯데의 제품에도 청산소다가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2월24일, 범인들은 언론에 모리나가에 대한 협박 종료를 선언하는 휴전장을 보냈지만 3월6일 와카야마현에 위치한 전통 일본식 과자를 만드는 회사 스루가야에 5천만엔을 요구하는 협박장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8일, 스루가야에게 현금 받는 걸 연기하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했고 스루가야에 대한 협박이 중단됬다


1984년8월7일, 시가현 경찰본부의 본부장이 퇴직하는 날 자기 관사 마당에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본부장은 하우스  식품 협박 사건때 수상한 차를 놓친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직하는 상황이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이 사건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8월12일, 범인으로부터 선언문이 보내졌다 이제 회사들 협박하는 걸 그만두어도 할일은 많다 악당 인생 참 재미있지라는 내용이였다 사건종료를 선언하는것과 분신자살한 시가현 경찰 본부 본부장에 대한 조의 대신이라고 밝혔다

범인이 사건종결을 선언한후 하우스 식품의 우라카미 이쿠오 사장은 아버지 우라카미 야스시게의 성묘를 찾아가서 이 사건의 종료를 알리려고 비행기를 탔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이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다


실제 협박 테이프


더 놀라운 사실은 사건 발생 6년전 1978년 8월17일, 글리코의 상무 앞으로 돈을 요구하는 1시간짜리의 협박 테이프가 배달되었다 중년의 남성의 목소리로 자신을 부라쿠민 해방동맹 간부라고 자칭을 했다

글리코 사장 납치,글리코사 방화,청산살포과장의 유포등이 발생할것이며 이 일을 막고 싶으면 3억엔을 내놓으라는 내용이였다 6년뒤 테이프 내용대로 사건은 발생했다

여우눈을 한 남자 몽타주


사건은 1년만에 종결이 되었고 범인들은 많은 증거물들을 남겼지만 신상을 찾을 만한 단서가 없던 탓에 범인을 잡는데 실패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되는 여우눈을 한 남자를 몇번이나 목격했지만 윗대가리의 지시로 인해 멍을 타고 있어야 했으며 끝내 놓치고 말았다 몇번이나 지시할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에 여우눈을 한 남자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경찰에 내부 스파이가 있었던게 아니였을까? 

이글공유하기

댓글()

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 2년동안 사육 당하다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 20:06

나카노 여중생 납치 감금 사건은 2014년 명문대 졸업생이였던 테라우치 카부(寺内樺風, 당시 23세)가 중학교1학년 사이토 살구(당시 13세)을 납치한뒤 2년간 감금하다가 소녀가 탈출해서 경찰에 신고해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건 당일 2014년3월10일 오후 4시경 여중생은 사이타마현 아사카시에서 하교를 하던중 어떤 남성이 차를 타고 나타나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게 되었다 변호사가 보호해줄테니 차에 타라는 말과 함께 억지로 차에 실려 눈에 안대를 한채 범인의 자택 맨션에 감금 된다

납치 당시 한 남성과 대화하는 것을 근처 주민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이후 휴대폰과 지갑도 소지하지 않은 채 2년간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사이토 살구가 적은 메모


실종 당일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피해자의 어머니는 집도 학교도 당분간 쉬고싶어 친구네 집에 있을테니 찾지마세요라는 딸의 메모를 발견하게 되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아 곧바로 부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사이토 살구


딸 정보가 있는 전단지를 돌리지만 2년동안 행방을 못찾게 된다


테라우치 카부에게 납치된 여중생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고 테라우치 카부 외출할때엔 잠금장치로 방에 감금되었다 전화도 사용할수 없었고 실종 직후 집에 보낸 편지는 협박에 의해 강제로 쓰여졌다고 한다

2년간 방 안에서만 감금된 것은 아니며 함께 외출을 할때도 있었고 도망칠려고 생각을 했지만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


2016년 3월 27일 휴대폰을 사러간 아키하바라을 보고 늦게 돌아올것 같아서 두려웠지만 용기내어 도망쳐 나왔고 공중전화로 가서 모친에서 전화를 걸었다


모친:어디에 있어?누구랑 있어?

여중생:혼자 있어

모친:당장 경찰에 신고해


전화통화가 끝나고 여중생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보호 조치되었다


감금당할동안 여중생은 범인에게 세뇌를 당했었다고 한다 아무도 널 찾지 않는다는 말로 세뇌에 빠져나올 의지를 상실한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넌 버러졌다는 말에 여중생은 처음엔 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 했다


탈출 2일전 인터넷 검색으로 자신의 이름을 쳐보다 재학중이던 중학교의 졸업식 소식과 함께 가족들도 줄곧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후 도망쳐야겠다는 결심을 세운 여중생은 집 안을 청소하던중 우연찮게 현금 500엔을 발견하고선 탈출할때 쓰기위해 몰래 숨겨두었다고 한다


2년만에 가족들은 딸을 눈물로 맞으며 다시 가족의품에 돌아온것에 기쁨을 나타냈고 보도(대중 전달매체) 덕분이며 감사한다고 답했다


한편 신고를 받은 경찰은 용의자인 테라우치 카부를 지명수배하였고 28일 새벽 시즈오카현 이토시내에서 피투성이의 남성이 걸어가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 용의자를 체포하게 된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이유는 자살한 생각을 가진 용의자는 대형 커터칼로 목을 그었으나 죽지 않았고 중상을 입어 신변 확보 후 병원에 입원되었다


31일 오전 경찰은 미성년자 유괴혐의로 시즈오카의 병원에 입원해 회복중인 용의자를 체포를 했다 테라우치 카부에게 혐의에 대해 물어보자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변명할 말을 없네요라고 인정했다


용의자는 도쿄 고등 법원에서 1 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2 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이다...


테라우치 카부(寺内樺風, 당시 23세)



여중생을 납치하고 2년간 감금한 테라우치 카부는 누구인가?


학창 시절은 건실하고 똑똑했고 보통 사람같은 평범한 존재였다고 한다 고교시절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열광하는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다고 한다


대학시절엔 항공에 관심이 많아 파일럿이란 별명을 들었고 미국의 파일럿 양성 학교에서 세스나 조종 면허를 취득했다 부친은 용품 회사의 사장이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았다


명문대 치바대학을 2016년도에 졸업하고 4월에 신주쿠에 있는 소방 설비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거주중인 맨션은 대학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 맨션에서 2년간 여중생을 감금을 했고 2월까지 치바에서 살다 나카노의 아파트로 이사 했다

이사가기전 맨션은 1985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방음 시설이 안되있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들에 의하면 여중생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용의자는 중학생 시절부터 여자아이를 납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납치전 인터넷으로 소녀를 유괴 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던중 아사카시 장소를 정하고 혼자 집으로 가는 소녀를 유괴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중생에 증언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점이 제기 되었다 전화는 안되지만 인터넷은 가능했었고 부모가 자신을 찾는걸 알고있었다는것이다 또한 범인의 집에 택배 기사가 방문했을때 여중생은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달았다는 말과 다르게 방 외부에선 잠금 장치를 건 흔적이 없었다는점과 새로 이사한 나카노의 아파트는 안에서 금방 열수 있는 오토록이 달려있었다 또 다른 의문점은 2년만에 부모님과 재회한 여중생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가족들을 맞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은 억지.흔한 망상이지만 피해자의 태도가 납치와 감금을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지만 범인에게 세뇌를 당하고 호의적으로 생각했다면 여중생은 범인에게 길들여졌던 것일까?

이글공유하기

댓글()

제2차 세계대전 일본 731부대 마루타 생체실험

실화괴담/사건사고|2019. 3. 3. 13:48

일본 731 부대 마루타 생체실험(ななさんいちぶた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으로 생화학무기 개발등의 목표로 만들어진 육군 부대다 원래 목적은 중국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만주지역에 풍토병(콜레라, 장티푸스 등)이 창궐해서 물을 정제해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방역급수부대로 창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합군에 밀리던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이시이 시로 박사를 의무대 사령관으로 취임시키고 화학.세균전등 생화학무기 개발을 목적을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하게 된다

이시이 시로 (Shirō Ishii, 石井四郎)

 

731부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인,중국인,소련인,러시아인,몽골인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오거나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감행했다 이들은 생체실험 수용자들을 마루타라고 불렀다 마루타의 뜻은 수용자들을 가리키던 단어로 고통을 못느끼는 통나무로 불린다 민간인을 포함한 군인등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으로 죽었던 것이다 

이들은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지역 주민을 모두 추방시켰으며 심지어 인근 지역 주민(자국민)을 데려와 생체실험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할려면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했으며 몰래 내다보는 승객이 보이면 체포를 해서 심문을 하거나 강제로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했다

일본 731부대

 

일본 731부대가 성인 남녀노소불문하고 임산부,아동들까지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해부와 실험이 마춰없이 이루어졌다 이 실험으로 수 만명이상의 사람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실험기록 내용

 

- 성인남녀,아동,영아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생체 해부 대상이 되었다 실험의 유효성을 위해 마취없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질병에 감염을 시킨후 외과수술로 해부하였고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출혈의 연구를 위해 팔다리를 절단하였고 절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

-팔이나 다리르 얼려 절단하거나 다시 녹인후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

-위를 외과적으로 절제한뒤 식도와 장을 연결,뇌,폐,간등의 절제 실험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강제로 매독,임질을 감염을 시켜 연구를 했으며 일부는 간수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질식할때까지의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목을 매달아 연구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동맥,심장에 공기 주입

-신장에 말의 소변 주입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물과 음식을 주지 않음

-사망할때까지 저기앞의 방에 넣음

-극저온 방에 넣어 동상이 걸리게 한뒤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와 얼마나 생존하는지 연구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고 한다

-사람을 통채로 원심분리기에 넣어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연구

-몸의 일부만 얼리고 실험,임산부도 포함

-총기 관통력 테스트를 위해 총을 쏘았다

-영하 50도에서 몇분이 지나면 죽는지 실험

-방안에 독가스를 터트려 몇분후에 죽는지 실험

-몸에 전기코드를 연결한 다음 독가스를 터트려 몸의 변화 관찰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해 생체실험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피부를 산채로 벗겨냄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한뒤 성전환 수술 실험

-수용자를 세워두고 수류탄을 던저 거리 측정

-수용자에게 화염방사기 시험

-말뚝에 묶은뒤 세균방출폭탄,화학무기,폭발성 폭탄 시험

-벼륙을 감염시켜 세균전의 유용성 연구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만두에 넣어 먹임

-동물의 혈액을 수용자에게 주입해서 효과 연구

-바닷물을 수용자에게 주입하여 생리식염수 대치 실험

-방안에 불을 지핀뒤 엄마와 아이를 가두고 모성애 테스트 실험

-살아있는 수용자를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동물의 내장과 교체해 실험

-대량 학살을 위해 저진공에 사람을 넣어 죽이는 실험

 

 

이 실험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은 원판에 묶어 돌린뒤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심지어 수용자의 신체부위에 돈을 걸고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하는 도박게임도 즐겼다 때때로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을 했으며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가장 병약하거나 반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전에 육모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했다

 

일본 731부대의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조선인,중국인,몰골인,러시아,유럽,흑인,미국인등 군인과 일반인,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린이를 포함해 1만명이상의 사람들이 생화학무기 개발의 실험 재료로 살해되었다

 

이 실험으로 731부대는 성공을 거두었고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중국 도시에 투하를 하게 된다 중국은 이 생화학 무기로 인해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이유도 없이 학살된다

2005년 8월2일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땅속에서 발견해 공개했다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당한 한국인 독립운동가 40여명이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패전후 731부대는 모든 시설을 파괴했고 남아있던 생체실험 수용자 400여명을 모두 죽이고 소각 했다이 과정은 3일동안 계속되으며 그들은 이를 청소라고 표현했다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수용자를 포함 모든 부대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731 부대원들은 그 누구도 처벌되지 않았고 일본 의료계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때 일본의 생체실험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생체실험 관련자료들을 제공하고 러시아에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731부대의 처벌을 막았고 묵인했던것이 미국이라고 할수 있다

 

국립 문서 보관소가 공개 한 관동군 방역 급수 부 (통칭 731 부대) 대원들의 실명이 기재된 유수 명부

 

일본군 '731 부대'대원들이 3607 명의 실명이 적힌 명단이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공개 되었다 공개 된 것은 731 부대를 중심으로하는 '관동군 방역 급수 부 "의"부재중 명단 " 1945 년 1 월 1 일자로 작성된 군의관 52 명, 기술자 49 명, 간호사 38 명, 위생병 1117 명 등의 실명이나 계급,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다고한다

출처 : 명단 링크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여기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을 하고있다  2002년 8월 도쿄의 지방 법원은 처음으로 제731부대의 존재와 범죄 사실 일부를 인정 했지만 그 당시 있었던 일본의 만행은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것이다

 

 

이글공유하기

댓글()
__+@_